[에세이] 거슬리지만 그럼에도 생동했던, 또렷한 여름의 조각들을 보내며

여름을 좋아하느냐하면 그건 아닌 줄만 알았다.
글 입력 2023.09.22 13:50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에세이_본문_구름.jpg

 

 

평일 아침, P와 집 밖으로 나서자 시원한 공기가 맨살에 흩어진다.

 

날씨 너무 좋은데... 이제 진짜 가을인가 봐!

 

사소한 것에도 쉽게 감탄하는 재능은 엄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분명하다. 웬만큼 궂은 날씨가 아닌 이상 대부분의 날씨에 매료되는 나는 서운함을 남기는 늦여름을 애써 외면하며 호들갑을 떤다.

 

계절이나 날씨에 음악을 페어링 하면 그 시기를 온몸으로 체감하는 느낌이 든다. 정말 내가 그 계절을 산다는, 걷고 있다는, 만끽한다는 느낌. 그날은 늦여름의 아쉬움을 초가을의 반가움으로 달래보려 서영은의 '가을이 오면'(참… 단순하다.)을 듣겠다는 다짐을 P에게 전했다.

 

어느덧 여름의 끝자락이다. 밤에 산책을 할 때면 대화에 집중하지도 못할 정도로 시끄럽게 굴던 매미의 울음은 사그라들고, 체한 듯 가슴께를 탁 막는 텁텁한 무더위도 물러가는 늦여름과 초가을 그 어드맨.

 

여름을 좋아하느냐하면 그건 아닌 줄만 알았다. 여름은 좋아하는 계절로 꼽기에 유독 불편함이 많았다.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에 들고 싶어 1시간을 공들여 한 화장도 무너지게 하는 야속한 더운 날씨, 산책과 이야기를 곁들인 낭만적인 밤을 방해하는 끈덕진 습도와 치근거리는 날벌레들은 결코 좋아하려야 좋아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매해, 특히 여름이 지나갈 때면 슬그머니 살갗을 파고드는 성가신 가시 같은 통증이 날 콕콕 쑤셔댄다. 이게 가을을 타는 걸까. 기어코 닥친 부모의 이혼과 그로 인한 본가의 공중분해 때문인가. 아니면 다가올 현 회사와의 계약만료 때문인가...

 

그리도 지긋지긋해 했던 낡은 속성들과 안녕을 고할 시간이 왔는데도 왜 마냥 해방감이 들지는 않는 건지. 어쩌면 저 날은 '가을이 오면'과 같은 계절 노래가 아니라 클래식을 듣겠다고 말했어야 했나 보다. 그 어떤 가사도 내 마음을 대변하지 못했을 테니. 그래서 마음과 조금이라도 어긋난 가사를 듣노라면 마뜩잖아 음악을 자꾸 바꾸어댔을 테니.

 

반추와 후회가 평생의 습관이자 취미인 나는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하는, 거슬리지만 그럼에도 생동했던, 또렷한 여름의 조각들이 휘발되는 것을 보며 붙잡고 싶어 한다. 세게 쥘수록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세상엔 쥐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것이 태반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알고 있지만.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다시 볼 수 있는 사진, 영화, 음악, 글 따위에 다시는 오지 않을 이 시기의 흔적을 묻혀 간직하는 일뿐이라는 것도 알고 있지만.

 

그냥 아직은 보내기가 아쉽다. 가을을 환영하지 않겠다는 말이 아니라 다만 여름이 가는 것이 속상하다는 말이다. 가을의 존재보다 여름의 부재가 지금은 더 크다는 말이다.

 

글을 쓰며 P가 건넨 따뜻한 얼그레이를 마셨다. 씁쓸한 무언가가 코와 혀끝에 맴돌았다. 목 넘김이 느껴진 후에도 잠깐 더 내게 머물러준 그것에 괜히 눈물이 날 거 같았다.

 

 

 

20230812203634_sgemilgn.jpg

 

 

[권기선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