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그는 지나간 날들을 기억한다 - 화양연화 [영화]

글 입력 2023.08.30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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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

In The Mood For Love, 2000

 

감독 : 왕가위

배우 : 장만옥, 양조위


우연히 같은 날, 같은 아파트로 이사 온 차우와 리첸은 의도치 않게 오가며 자주 부딪힌다. 한편 두 사람의 배우자는 언제부턴가 자리를 비우는 일이 많아지고, 그들을 바라보는 차우와 리첸의 마음속엔 의심이 자라난다. 결국 서로의 배우자가 외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두 사람은 대책을 의논하기 위해 만난다. 하지만 처음의 의도와 달리 서로에게 빠지게 된 두 사람은 자신들의 감정과 주변의 시선에 혼란스러워한다.

 

***

 

예비군 훈련을 왔다. 익숙했던 그 길을 오르다 보니 모든 게 초라하게만 느껴졌던 훈련병 시절이 떠올랐다.


일어날 시간이에요.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 나를 흔들어 놓았다. 단잠은 끝났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다. 근무가 끝나면 기상 시간일 것이다. 알았다는 투로 손을 흔들고 전투복을 찾는다. 환복은 최대한 신속하게, 그리고 조용하게. 나로 인해 아무도 단잠을 방해받지 않도록.


나의 자리는 당직관이 보이지 않는 출구 쪽이다. 생활관을 돌며 온도와 습도를 체크하고 기록한다. 소일거리가 끝나니 남은 건 정적이다. 전임자가 편지라도 쓰라며 주고 간 라이트 펜이 손에 들려 있다. 그러나 누구에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 주인 없는 편지는 단어 하나 불러내지 못한다. 불빛을 딸깍거리며 속으로는 군가를 되뇌인다. 아는 군가를 모두 부르고 나면 5분쯤 지나 있다. 앞으로 몇 번을 더 불러야 하는 거지?


모두들 무엇을 하고 있을까. 지금쯤이면 개강을 했을까. 캠퍼스는 다시 왁자지껄한 소음으로 가득 차 있겠지. 학교를 떠나던 날을 떠올렸다. 지방에서 올라오는 부모님을 기다리며, 나는 마지막으로 텅 빈 캠퍼스를 걸었다. 과방, 강의실, 동아리방, 도서관과 소강당 등등.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나는 모두에게 홀로 작별을 건넸다. 다시 돌아가면 더 이상 볼 수 없는 얼굴들도 있을 것이다.


문득 K가 보고 싶어졌다. J가 보고 싶어졌다. S가 보고 싶고 Y가 그립다. 보고픈 이들이 점점 더 많아진다. 괴로운 시간이다. 나는 이곳에서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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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세계에서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차우와 리첸은 자신의 집이 아니라 남의 집에 세를 들어 살았다. 지역 신문의 편집장인 차우는 자신의 글이 아닌 타인의 글을 다뤘다. 리첸은 수출회사 사장의 비서로 일했다. 그런 그들을 두고서 얼굴 없는 배우자는 바람을 피웠다. 누군가에게 의탁해야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그들은 그렇게 그 누군가를 잃어버렸다.


결국 그 세계의 부스러기가 되어버린 그들은 쓸쓸하게 부유했다. 리첸은 집을 두고서 매일 같이 거리의 국수집에서 저녁을 해결했다. 코앞의 집을 두고서 그들은 비를 피해 다른 건물의 처마에 몸을 숨겼다. 그들이 가는 길에는 언제나 그림자가 선행했다. 아무것도 아닌 두 사람은 부지런히 그림자를 좇았다. 그렇게 기댈 곳이 없던 그들은 서로에게 기대기로 하였다.

 

그런 그들에게 ‘글’은 자존(自存)을 부여했다. 역할극의 형태로 자신들의 배우자가 저지른 부정을 흉내 내며 사랑을 해갈하던 두 사람의 처지는 차우가 무협지를 쓰면서부터 달라졌다. 이제 두 사람은 더 이상 과거의 자취를 좇지 않았다. 역할극의 문법은 현재형이 되었다. 주인공도 바뀌었다. 그들의 배우자는 무대에서 퇴장했고, 그 빈자리는 차우와 리첸이 채웠다. 차우는 얹혀살던 집을 벗어나 글을 쓴다는 핑계로 두 사람만의 공간을 얻었다. 리첸은 더 이상 거리에서 국수를 사 먹지 않았다. 이제 그들은 서로의 배우자가 비밀을 털어놓을 미래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그러니 글을 쓴다는 것은 가장 적극적인 행위다. 그것은 나를 아는 것이고, 나아가 존재를 탐구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너 자신부터 알라’고 소리친 이는 소크라테스였다. 진리를 아는 건 그 뒤의 일이다. 다시 말해 타인에게 매여있던 차우와 리첸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글이었다.


한편 어떤 글이든 마침표는 존재한다. 두 사람을 향한 주변의 시선이 날카로워질수록, 서로를 향한 감정이 강렬해질수록 끝에 관한 그들의 조급함 역시 애끓는다. 결국 차우는 그녀에게 이별을 연습해 볼 것을 제안했다.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종말 앞에서 그는 마치 앙드레 말로의 소설 속 인물들이 자살로써 삶의 권리를 놓지 않았듯 이별로써 자신들의 사랑을 구하려 했다.


그러나 이별 연습은 말처럼 연습이 되지 못했다. 차라리 예고라는 단어가 더 어울린다. 소심하기 짝이 없는 남자의 이별 선언 앞에서 여자는 ‘우리만 결백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라고 흐느꼈다. 하지만 그건 두 사람이 애써 얻은 자존의 반환이자, 사랑에 대한 부정이다. 그 물음에 여자는 이미 예전에 스스로 답했다. 같이 들어가면 모두의 의심을 살지도 모른다는 말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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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제목은 화양연화, 해석하자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때’쯤 된다. 내겐 스무 살이 그랬다. 따지고 보면 우린 모두 차우였고 리첸이었다. 타인의 간섭과 규율에 익숙하던 학창 시절을 넘어 맞이한 성인의 세계는 아무것도 정의되지 않았던 텅 빈 도화지였다. 새로운 공간과 사람들이 우리를 맞이했고, 이전에는 맛보지 못한 자유가 우릴 들뜨게 만들었다. 술과 담배는 더 이상 금지되어야 하는 게 아니었다. 밤을 새우며 놀아도 뭐라 하는 이도 없었다. 홀로 여행을 다녀오고 첫 연애라는 것도 해보았다.

 

그리고 스무 살의 끝에서 우리는 비로소 ‘책임’을 배운다. 대학에 다니기 위해선 등록금이, 등록금을 벌기 위해선 나의 시간을 포기해야 한다. 예전처럼 부모님께 용돈을 받아쓰는 게 얼마나 죄송한 일이며, 한 번의 실수로 사람을 영영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걸 안다. 나를 미워하고 욕보이기를 즐기는 사람들 앞에서 그들의 차별과 멸시를 웃음으로 넘기는 일이 얼마나 역겨운지를 안다.


어른은 모든 걸 할 수 있는 시기가 아니었다. 할 수 없는 것들을 하나씩 발견하고 체념하는 시기였다. 그렇게 포기를 통해 나를 알아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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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작가의 <스무 살>을 보면 이런 문장이 나온다. “남몰래 흘리는 눈물보다도 더 빨리 우리 기억 속에서 마르는 스무 살이 지나가고 나면, 스물한 살이 오는 것이 아니라 스무 살 이후가 온다.” 스무 살은 특별하다. 그 특별함은 무지로부터 온다. 무지를 벗어난 그 순간부터 우리에게 찾아오는 건 책임과 체념이다. 작가가 스무 살 다음을 ‘스무 살 이후’라고 부르는 이유가 거기 있다. 이제 당신에겐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일만이 남아있다. 때문에 스무 살은 우리 모두의 첫 번째 후회인지도 모른다.

 

시간이 한참 흘러 차우는 어느 이름 모를 사원(앙코르 와트)을 여행하다 작은 구멍을 발견했다. 구멍 앞에서 오래된 이야기를 떠올린 차우는 그 구멍 속에 자신의 비밀을 묻고 돌아섰다.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의 비밀과도 이별을 선언했다(끝내 서로를 만나지 않았던 연인은 그렇게 미완에 그쳤던 자신들의 이별을 완성한다. 아닌 게 아니라 차우가 구멍 속에 비밀을 속삭이는 그 장면은 연인 간의 키스를 연상시킨다). 그가 그곳에 남긴 말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홀로 남은 리첸은 어디에 자신의 비밀을 속삭이고 덮어 놓았을까. 두 사람은 결국 재회하지 못했을까.

 

짧은 문장을 남기며 영화는 끝났다. “그는 지나간 날들을 기억한다. 먼지 낀 창틀을 통하여 과거를 볼 수 있겠지만 모든 것이 희미하게만 보였다.”


그리고 나 역시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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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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