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누구나 겪는 음악 취향 발전 과정 [음악]

음악을 듣는 이들과 모든 예술을 즐기는 이들이 겪는 성장 과정
글 입력 2023.08.29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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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이치를 다 깨달은 선신은 자연 속으로 은둔하여 조용히 살아간다. 역으로 세상을 주무르는 이들은 세상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결점을 숨기며 살아가는 불완전한 이들이다. 무엇이든 분야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겸손해진다. 벼는 익을수록 겸손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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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안다고 생각하는 첫 순간은 보통 우매함의 봉우리에 올랐을 때이다. 짧은 기간 내에 많은 지식을 습득하니 이정도면 많이 알고 있다고 자신하게 되지만, 그정도는 아직 문턱에 불과하다. 이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은 조금 더 지나서 일 것이다. 세상이 그보다 넓고 한 평생을 집중해도 다 알지 못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는 순간이 온다.

 

음악을 듣는 레퍼토리를 넓혀가며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된다. 처음은 음악을 발견한 순간 시작한다. 보다 정확히는 음악 장르를 듣고 있다는 사실을 즐긴다. 재즈라면 재즈를 검색해 찾아듣는다. 클래식이라면 클래식을 검색해 듣는다. 말 그대로 검색하는게 주요 포인트이다. 처음부터 명반을 찾아 들을 배경은 없다. 그렇기에 가장 대중적이고 노출이 많이 된 부분을 찾아듣게 된다. 장르에 입문하게 되는 순간이다.

 

그 순간이 지나면 점차 같은 장르 내 다른 음악을 듣고자 한다. 본인 정도면 많이 듣고 익숙한 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는 어리석은 생각이다. 아직 우매한 봉우리에는 올라가지도 않은 상태이다. 그런 자신감을 가진 상태에서 다른 음악을 시도해본다면 당황스러울 수 있다. 그동안 숙련되었던 음악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시험을 준비하는 이가 기초만 떼고 오니 시험에서 아는게 있을리 전무하다. 여기서부터 음악을 계속 사랑할 사람과 아닌 사람이 나누어지게 된다.

 

음악의 본모습을 보게 된 이후 앞으로도 계속 들을 자신이 있다면 열심히 찾아들을 것이다. 이젠 너무나 많은 음악이 있다는 사실에 답답할 수 있다. 심지어 내가 들었던 음악이 너무나 유명한 곡들이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자신의 미숙함을 돌아보는 순간이다. 여기서부터는 등산을 시작하는 초심자의 겸손함이 잠시 갖춰진다. 태산 같은 영역을 바라볼 때 인간으로서 느끼는 당연한 감정이자 태도이다.

 

꾸준히 음악을 듣다보면 대부분의 시간을 그 음악과 보내게 된다. 이동시간이나 잠자기 전, 영상을 찾아보기도 하고 좋은 곡이 또 뭐있나 검색도 해보고, 책도 읽어본다. 이런 과저에서 습득하는 지식은 풍부하다. 살면서 처음 겪어보는 영역에 대한 호기심은 지식에 대한 탐구를 일으킨다. 그럼 이제 전문가가 되는가? 아직 멀었다. 이제 ’첫 번째 우매함의 봉우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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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칭 전문가 가 된 이들은 ’음악‘과 ’지식‘을 구분하지 못한다. 음악은 예술의 일종으로 지식으로 완전히 대체할 수 없는 부분이다. 감각으로 판단하는 부분이기에 지식이 갖추어저도 음악을 판단할 정도의 감각이 훈련되어야 한다.

 

이 과정은 매우 천천히 일어난다. 재능이 없는 한 그동안 살아왔던 방식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 단순히 음악을 ’듣는다‘에서 ’감상한다‘가 가능하려면 인내심이 가장 먼저 요구된다. 음악을 끈기 있기 듣는 것 자체는 같은 음악을 음의 배열로 느끼는 것에서 벗어나 맥락 속에서 음의 독보적인 위치를 알게해준다. 이 과정이 초심자가 해내야 할 가장 큰 관문인 것이다.

 

대부분은 이 과정을 거치지 않고 ‘지식’에 의존해서 들을 음악의 레퍼토리를 넓혀간다. 그러나 단순히 앎을 토대로 예술에 의존한다면 흥미가 곧 떨어질 수 있다. 지식과 감각이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이 음악응 듣는 행위를 ’일‘로 느끼게 만들게 된다. 결국 귀는 휴식을 원하고 음악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처럼 침묵을 편안해 한다.

 

현재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정보가 펼쳐지는 시대에서 지식이 감각을 앞서는 상황은 당연한 것이기에, 이를 깨닫는 과정이 필요하다. 뭘 또 깨닫나 싶지만 여기부터 자신만의 속도를 가질 수 있게 된다. 정보를 무분별하게 빨아들이는 것에 의미가 없다는 사실은 다른 방향을 보게 유도한다. 음악을 감상하는 그 자체에 관심을 가지게 하므로 ‘감각’으로 돌아올 수 있다. ‘감각’이 발달하면 점차 서술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른다. 고차원적인 음악을 듣지 않더라도 더이상 일상의 표현으로 설명할 수 없는 요소가 자주 등장한다. 비로소 ‘지식’이 필요한 올바른 시점이다.

 

감각을 설명할 수 없는 그 단계에서 온 인류가 몸을 비틀며 의견을 낸 문헌 더미를 뒤지며 스스로를 이해시킨다. 모든 학문이 그렇듯 개인의 성취로는 한계가 있기에 각자 알아내고 느낀바를 세계와 나눈다. 나눔을 전수받은 인류들은 다시 이를 바탕으로 사고한다. 이 과정이 선순환되며 인류라는 종을 지적으로 성장시킨다.

 

거창하게 말했지만, 이제부터 음악을 바라보는 시각을 갖게 되었다 말하는 쪽이 더 쉬워보인다. 오히려 이 시점부터 ‘어떤 음악들을 들었다는’ 역사는 중요하지 않다. 어떤 음악을 들었는가가 역사적 의의를 갖는 시점은 각 음악이 주는 새로운 발상이 생겼을 때이다.아무 생각 없이 음악을 들은 후 남는 것이 ‘그 음악을 들었다‘라는 정보 외 아무것도 없다면 음악의 가치는 상실된 것이다. 최소한 인간의 본능인 호불호라도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며칠이 지나서 그 음악을 떠올린 후 다시 듣고 싶은가? 아마 이 대답에 “사실 음악을 들었다는 사실만 기억나지 음악이 기억나지 않아요”라고 말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음악이 취향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조차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면 두 번째 우매함의 봉우리는 어디있는가? 바로 자신이 머릿속에 있다. 자신의 가치가 확립된 순간 그 가치의 우선도가 높아진다. 다른 의견은 자연스레 묵살된다. ’지식‘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만 ’의견‘을 받아들이는 훈련은 지금부터 시작하게 된다. 만약 의견을 듣지 못한다면 발전 없는 사람으로 남게 된다. 만약 발전하지 않아도 좋다면 어쩔 수 없는것일까? ”저는 지금이 좋아요!“와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은 지금이 행복하니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같은 자극에 계속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건 너무나 안일하다. 무료함에 빠지고 익숙함에 권태를 느끼는 과정이 반복될 것이다. 고난은 예정되어 있다. 따라서 변화를 추구하는 자세는 앞으로의 삶에 대한 보험인 셈이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음악을 듣는데, 음악이 아니더라도 한 분야에 푹 빠지게 되면서 겪는 과정은 여기까지다. 아마 본인이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이상으로 서술할 수 없는게 아닐까. 앞으로의 단계는 어떨 것인지 예상 해보자면, 아마 ‘초심자 배척‘일 듯 싶다.

 

의견을 수용하는 자세는 전문가 간의 상호작용이다. 그 단계에서 익숙해지면 초심자의 태도는 멍청하고 의미없어 보일 터이다. 자신이 걸어온 길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각자가 자신의 선이 어디까지인지 잘 되돌아보며 초심자에게도 자비를 베풀 수 있는 마음도 가질 수 있길 바란다.

 

 

[윤지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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