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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의 "타자의 추방". 120페이지 정도의 얇은 책이지만 책장이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생소한 철학 용어는 어렵고, 예리하게 현실을 꿰뚫는 문체에 하릴없이 찔릴 수밖에 없었으니까.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기며 계속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아직 생각이 굳건해질 정도로 사회 경험이 많지 않다. 나와 다른 의견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은 묘하게 거슬린다. 정보를 받아들이는 방식도 한쪽으로 자꾸만 기울게 된다. 나와 생각이 비슷한 커뮤니티를 찾고, 내 생각의 근거가 될 만한 콘텐츠를 찾아 읽게 된다. 이렇게 나로만 가득 채우는 행위가 과연 옳을까.


저자는 '같은 것의 테러'를 시작으로, 타자가 부재한 사회의 단면을 짚어내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인상 깊었던 대목 중 몇 개를 추려왔다.

 

 

박탈이나 금지가 아니라 과잉소통과 과잉소비가, 배제와 부정이 아니라 허용과 긍정이 사회체를 병들게 한다. 억압이 아니라 우울이 오늘날의 병적인 시대의 기호다. 파괴적인 압박은 타자가 아니라 내부로부터 온다. (p7)

우리는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면서도 어떤 것도 인식하지 못한다. 정보와 데이터를 쌓으면서도 어떤 지식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체험과 흥분을 애타게 추구하면서도 언제나 같은 상태로 남아 있다. 친구와 팔로워를 쌓으면서도 어떤 타자도 만나지 못한다. (p10)

인터넷 속에서 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 더 관광객이다. 우리는 더 이상 문턱에 거주하는 호모 돌로리스(슬픔의 인간)가 아니다. 관광객은 변신과 고통을 수반하는 경험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같은 상태에 머무른다. 그들은 같은 것의 지옥을 여행한다. (p56)

 

 

나만 해도 SNS상에서 나와 전혀 다른 사람, 성향이 다른 매체들을 팔로우하지 않는다. 사실 비슷한 생각이 가득한 자리에 다른 것이 들어갈 자리는 없다. 그래서 생각하기 싫고, 다름이 불러일으킬 갈등은 귀찮다.


생각이 넓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 번은 완고한 생각을 깨야 하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같은' 정보만을 섭취한다. 각종 SNS의 '좋아요' 기능과 유튜브 알고리즘이 그렇다. 내가 듣고 싶은 것만 계속해서 듣고, 그 밖의 세상은 없는 세상이다.

 

타자가 사라진 시대에 무한히 확장하는 나는 의미가 없어진다. 그 누구도 '꼰대'가 되고 싶은 사람은 없다지만 늘 같은 것만 보는 사람을 꼰대라고 한다면, 꼰대가 아닐 사람은 거의 없지 않을까.


그래서 무한한 확장은 '진정성'과 맞닿아 있다. 저자에 의하면 진정성은 '오직 자기 자신과만 같을 것', '오로지 자신을 통해서만 자신을 정의할 것'을 요구한다. 온전한 나라고 믿은 자아와 행동이 신자유주의 판매 논리 아래서 일종의 상품이 된다. 신자유주의가 허용하는 '잡다함' 이외의 다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같음'만이 진열된 사회이며, '다름'은 없다.


저자는 세계화, 테러리즘, 자기소외 등의 거대한 맥락을 통해 '같은 것의 테러'를 지속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SNS는 이 테러를 가속화하는 수단으로 기능한다. 그리고 '같은 것의 테러'를 막기 위해 마지막 대목에서 경청하기를 제안한다. 이 때 '경청'이란 수동적 행동이 아닌 '특별한 능동성'을 뜻한다. 즉, 자신을 비우고 타자의 다름을 긍정하는 것인데, 계속해서 같은 것을 채우고, 자기만의 스피커로 제 목소리를 외치는 시대에 제법 큰 의미가 있을 듯 하다.

 

 

소란스런 피로사회는 듣지 못한다. 어쩌면 미래의 사회는 경청하고 귀 기울이는 자들의 사회라고 불릴지도 모르겠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전혀 다른 시간이 시작되게 하는 시간 혁명이다. 타자의 시간을 다시 발견해야 한다. (p119)

 

  

사실은 너무 멀리 와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조금만 생각이 달라도 금방 피로함을 느끼는 내 모습을 생각하면 쉽지 않다. 그렇지만 마지막 인용처럼 타자의 시간을 다시 발견해야 한다. 타자로부터 나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우리의 화살표를 내가 아닌 밖으로 돌려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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