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사적 재판장의 모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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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요란하다. 매스컴과 SNS를 통해 연일 비보를 접하며 같은 땅에 발붙이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동료 시민으로서 한동안 무거운 심경을 덜어내기 힘들었다. 공적인 경로를 통해 유포된 교사 사망의 내막도 가히 충격적이었지만, 더한 탄식을 불러일으킨 것은 그러한 기사나 게시글에 달린 익명 혹은 비공개 계정의 댓글들이었다.
책임 소재는 엉뚱한 곳으로 뻗쳐나가고 있었다. 육아에 어려움을 호소하는 부모들에게 솔루션을 제공하고 관계를 개선해 주는 프로그램의 메인 출연자이자 해당 분야의 권위자에게로. 요약하자면 이런 내용이었다. 문제아의 일탈을 어른들의 방기와 부주의로 환원하는 코칭법을 선전하기에 교실에서 발생하는 사건 사고 역시 교사의 책임으로 전가된다는 것이고, 이에 감화된 학부모들이 이를 무기 삼아 교사를 공격하면서 이런 사달이 초래됐다는 것.
그러나 해당 프로그램의 오랜 시청자라면, 그래서 아이 못지않게 부모와 교사, 같은 반 아이들의 입장과 처우를 고루 고려해 온 프로그램과 출연진의 행보를 안다면, 그러한 이의 제기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궤변인지를 알 것이다.
한편, 얼마 지나지 않아 군중의 화살은 또 다른 특정 개인을 향해 있었다. 금번 비보로 그동안 인고해 온 교사들 그리고 여론이 교권 회복과 시스템 개선 요구를 보다 적극적으로 개진하면서 과거 한 유명인이 자신의 아들을 담당하던 특수 교육 교사를 고소한 일화가 공개되어 사회적 파장으로 이어진 것.
그로부터 꽤 시간이 흐른 지금은 양 당사자 간 배려와 이해가 부족했던 것으로 매듭지어져가곤 있지만, 처음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당시에는 고소인 학부모를 지탄하는 대중적 반응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전자와 달리 꽤나 일리 있는 견해들도 다수였지만, 개인의 과잉 대처를 지적하는 것 이상으로 한 가족을 가학적으로 몰아세우는 악플들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불특정 다수의 댓글로 누구나 사적 재판장에 오르내리는 시대. 그 체제를 견고하게 둘러싼 익명의 판사들은 ‘정의’를 명분으로 법봉을 들지만, 실상 그들의 관심은 ‘누구를 심판대에 세우고, 어떻게 분노를 쏟아낼 것인가’이다. 그들의 평결은 결코 쉬이 유예되는 법이 없다.
그렇게 재판장의 공기가 달궈지는 동안, 사안의 본질은 호도되고, 그 틈으로 부조리한 시스템은 몸집을 더 불려간다. 한동안 사적 재판장의 모순에 대해 고뇌하는 동안 나는 작금의 현실을 그대로 포개어 놓은 듯한 영화 <죄 많은 소녀>를 떠올렸다.
극의 얼개는 오늘날 잔재해 있는 마녀사냥의 참상을 연상케 한다. 며칠 전 실종된 여고생 ‘경민’이 한강에서 주검으로 발견된다. 이에 경민의 주변인들은 크게 동요하고 각자 자신의 무고를 입증하고자 혹은 죄책감을 덜고자, 담당 형사와 담임은 수사를 속히 종결하고자 희생양이 될 죄인을 몰색 하기 시작한다.
이때 같은 반 친구 ’영희‘가 경민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동행했던 사람이란 사실이 밝혀지고, 둘 사이에 친구 이상의 기류가 있었다는 심증이 더해지자 경민의 부모, 담임과 학교 친구들은 영희의 책임을 속단하고 가해자로 몰아간다.
심지어 애초에 경민과 친분도 없던 반 아이들은 비약적으로 분노에 휩싸여 마치 경민을 대리해 보복하기라도 하듯, 영희를 학교에서 갈구기 시작하고, 심지어는 집을 찾아가 집단 린치를 가하기도 한다. 몸도 마음도 너절해진 영희는 담임에게 자신의 무고를 토로하지만 그 역시 영희의 고통을 외면한다.
그렇게 다수의 편의를 위해 ‘죄 많은 소녀’로 낙인찍혀야 했던 영희는 표백제를 삼키며 자살 기도를 한다. 다행히 목숨은 부지하지만, 그로 인해 영희는 목소리를 잃고 만다.
영희의 비극에 학급 친구들은 제 책임을 지우기 위해 병문안도 오가며 영희를 극진히 살피고, 환대한다. 심지어는 자신들과 같은 공범이던 담임에 대해 거짓 소문을 의도적으로 퍼뜨려 그를 곤경에 빠뜨린다. 경민의 자살에 대한 죄책감을 해소하고자 영희를 죄인으로 치부하고 절벽 끝으로 몰아세웠던 것처럼.
죽은 ‘경민’, 목소리를 잃은 ‘영희’는 말이 없다. 그 부재와 침묵을 대신해 메꾸는 건 자의적인 해석이다. 경민이 오래전부터 자살을 계획해 왔고, 우울 증세를 보였다는 것이 명백해진 이후에도 분노를 쏟을 대상이 필요했던 경민의 엄마는 영희를 따라다니며 지속적으로 괴롭힌다.
한편, 이미 한 번 마녀사냥의 희생양이 되었던 영희는 교탁 앞에 서서 방관자이자 2차 가해자였던 친구들과 담임을 향해 수화로 말을 건넨다. “여러분 앞에서 가장 멋진 죽음을 완성하러 왔습니다”. 파편적인 증거만으로 영희를 죄인으로 몰아세웠던 그때처럼 담임과 아이들은 그 서슬 퍼런 문장에 각자 믿고 싶은 의미들을 새기고 찬사를 보낸다. 경민이 그랬듯, 영화는 종국에 홀로 캄캄한 지하보도 속으로 소실되어가는 영희의 뒷모습을 관망하며 막을 내린다.
진실 한 줌보다 제 입맛에 맞게 부풀려진 허구가 더 중요한, 정의를 명분으로 하지만 불의가 창궐하는, 모순적인 사적 재판장. 그 적폐를 종식시키기 위해 필요한 건 ’느리고 깊은 접근‘일지 모른다. 중요한 사안일수록 그에 대한 접근은 느리고 깊어야 한다. 그렇게 시간과 공을 들이고 나면 사안의 본질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 말과 판단을 유보할 줄 아는 자세. 그것은 오늘날 ‘지성’의 또 다른 명명일 것이다.
[김민서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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