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Leçon 2: 인생도 프랑스어를 배우듯이 [문화/전반]

목표는 "잘하려고 애쓰지 않기"
글 입력 2023.08.15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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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is, France

 

 

프랑스어가 어려운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복잡할 줄이야. 겨우 두 번째 수업인데 살짝 머리에 나사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프랑스어의 알파벳은 영어랑 모양은 같지만 발음이 전혀 다르다. 한국어와 영어에 없는 발음은 들어도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E와 U, Q는 모두 내게 같은 소리로 들렸다. 어리둥절한 나에게 선생님이 천천히 설명해 주셨다.

 

"E는 입을 동그랗게 오므리고 '으'라고 발음하고, U는 똑같이 입을 오므리고 '이'라고 발음해 보세요."

"왜? 왜? 에? 위? 의? 으이...?"

 

10번 따라 발음하면 한 번 정도는 맞다고 하는데 나 조차도 내가 어떻게 발음하고 있는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혀가 입안에서 제 맘대로 움직인다. 태어나서 한 번도 발음해 보지 않은 소리를 입에서 내보려고 하니 마치 신생아가 되어 처음 말을 배우는 것 같다. 처음 써보는 혀의 모양과 근육은 낯설고 어색하다.

 

여러 개의 모음이 모여서 소리를 내는 복합 모음은 그야말로 혀가 입안에서 길을 잃는다. eur, œur 와 같은 발음 또한 한국어에는 없는 발음이다. sœur(여자 형제를 뜻함)의 발음을 듣고 일단 "쒜"라고 살짝 메모해두었지만 참고만 할 뿐 정확하게 발음은 아니니 많이 듣고 많이 발음해서 혀에 기억시키는 수밖에 없다.

 

발음 기호를 대략 배우고 학생들끼리 돌아가면서 단어를 읽기 시작했다. 엉망진창이다. 단어를 보자마자 망설임없이 유창하게 읽고 싶지만 발음기호를 해석하기 위한 몇 초간의 버퍼링이 필요하다. 영어에 익숙한 우리는 영어식으로 발음하거나 단어의 마지막 자음을 발음하지 않는 것을 잊어버리고 자꾸 발음을 한다. 처음 한글을 배울 때의 어린 나는 이런 느낌이었을까.

 

보고 읽는 것도 이렇게 어려워서야 언제쯤 내 생각을 자유롭게 프랑스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이제 ABCD를 읽기 시작했으니 지금 영어를 하는 만큼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일은 이번 생에는 어려울 것이다. 20년 넘게 많은 시간과 돈을 들인 영어도 겨우 이 정도인데 1주일 한번 배우는 프랑스어로는 불가능하겠지. 사랑하는 프랑스 작가들의 작품을 원서로 읽어내는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다.

 


Theatre.jpg
Paris, France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놀랍고 신기하게도, 프랑스어를 배우고 따라 하는 과정은 무척이나 즐겁다.

 

월요일 오후 수업이 끝나면 매주 화요일 아침은 혼자서 복습하는 시간이다. 전 날 수업 시간에 들었던 선생님의 발음을 잊기 전에 얼른 발음 연습을 한다. 네이버 프랑스어 사전을 켜놓고 소리를 따라 해본다. 입에서 한 단어 한 단어가 흘러나올 때마다 신기하다. 배우는 즐거움이 이런 것이구나. 이런 순수한 배움의 기쁨은 오랜만이다. 낯설고 설렌다.

 

프랑스어가 꼭 필요해서 배워야만 하는 상황, 이민 또는 유학, 시험 점수가 필요한 상황이었다면 고통스러운 과정이었을 것이다. 정해진 기간 안에 실력을 올려야 하고, 잘하지 못하는 나를 계속해서 자책하고, 타인의 학습 속도와 끊임없이 비교하고, 내 주특기인 열등감과 자괴감의 대 환장 파티였겠지. 이미 수없이 해본 과정이라 겪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다.

 

"프랑스어 마스터에 걸리는 시간", "효율적인 프랑스어 공부 방법" 을 검색해 본다. "프랑스어 공부할 때 절대 하지 말아야 할 10가지"와 같은 포스팅을 탐독한다. (그러면서 정작 공부는 하지 않는다.) 애초에 프랑스에서 태어났으면 이런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어도 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난 왜 한국에서 태어났지. 저 멀리 평행우주 어딘가에는 프랑스에 태어난 내가 있을까. Everything Everywhere At All Once 영화처럼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프랑스어 능력자 버전의 나를 능력을 현생에 끌어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 존재하지도 않는 "프랑스어 능력자 버전의 나"와 비교하며 자괴감에 빠진다. 공부는 부담과 압박감과 고통으로 다가온다. 프랑스어가 싫어진다.

 

 

Paris.jpg
Paris, France

 

 

프랑스어를 배우러 가기 전 친구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프랑스어를 배우는 내 목표는 이거야. 잘하려고 애쓰지 말기. 스트레스가 된다면 당장 그만두기."

 

아름다워서 배우기 시작한 프랑스어를 오랫동안 탐미하기 위해서 천천히 즐길 수 있을만큼 공부하고 있다. 애초에 남들보다 뛰어나게 잘 할 필요가 없이 시작한 공부라 비교할 대상도 없다. 세상에서 가장 프랑스어를 느리게 배우는 사람이라도 상관없다. 오늘 즐겁게 공부했으면 그것으로 오늘 배움은 성공적이다. 

 

우리의 삶은 쓸모를 증명해야 하는 과정같다. 특히 한국처럼 빨리빨리에 중독된 경쟁 사회에서는 남들보다 빨리 배워야하고 성과도 탁월해야 한다. 스스로 또는 타인의 기대치를 뛰어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이 자연스럽게 모든 영역에 내재되어 있다. 한 외국인 친구는 한국 사람들은 취미생활조차 너무 "프로페셔널" 하게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번 아웃을 겪으면서도 그것이 번 아웃인 줄 모르고 달려왔던 시간들. 옆을 보면 다들 그렇게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 같아서 으레 나 또한 그렇게 살아야 할 것만 같았다. 기대치와 목표를 높게 세우고 그것을 향해 달려가는 삶. 성취 뒤에 또 다른 목표. 

 

나는 누구에게 무엇을 증명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끊임없이 갈아 넣었을까.

 

일상도 프랑스어를 배우듯이 가볍게 살아보자고 생각한다.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말고, 나의 쓸모를 굳이 증명하려 하지 않고, 타인과 비교하지 않고, 시간에 쫓기지 않고 자유롭게. 천천히 순간을 음미하면서.

 

열등감과 불안감을 느끼는 상황이 온다면 지금 프랑스어를 배우는 순수한 기쁨을 기억할테다. 하루 하루를 살아있다는 기쁨으로 채우기. 존재 자체로 행복하기. 오늘 행복했으면 그 날 하루는 성공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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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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