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다른 여름, 그리고 손잡을 나를 찾아서 - 다른 여름 [공연]

작열하는 여름은 오로지 '나'로서 지나가야만 한다
글 입력 2023.08.11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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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에는

연극 <다른 여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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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연속 전국대회 예선탈락, 문제아의 집합체로 불리는 대한고 핸드볼부는 해체되고 부원은 뿔뿔이 흩어진다.

 

그러나 여기, 결승까지 갔던 전 대한고 핸드볼부 선수가 있다. 그는 바로 ‘고곽대’다.

 

그는 결승전이 끝나기 몇 초 전, 단 한 점을 남겨두고 지고 있던 상황에서 7미터 드로우 라인 앞에 선다. 고곽대가 넣지 못하면 게임은 끝이나 다름없다. 그 엄청난 부담감 앞에서 그는, 오줌을 지리고 쫓겨난다.

 

<다른 여름>은 오줌싸개 찌질이 실패자, 고곽대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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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집단 상상두목 제공 / ⓒ황호규

 

   

 

스포츠 심리 추리극의 짜릿함


 

이 연극에 ‘스포츠 심리 추리극’이라는, 일견 너무 길어 보이는 타이틀이 달린 것은 절대 허세가 아니다. 핸드볼부가 해체된 그해 여름, 대한고 체육관에 불이 나기 때문이다. CCTV 속 영상에 선명히 비친 것은 분명 고곽대. 그러나 그는 자신이 3학년 고곽대가 아닌 2학년 ‘최고작’이라고 주장한다. ‘상상하지 않고선 나를 알 수 없다’라고 이야기하는 고곽대, 아니 최고작. 그는 누구이며 대체 체육관에 어떻게 불을 지핀 것인가?

 

오덕구 형사와 이수희 선생님은 번갈아 가며, 때로는 함께 최고작/고곽대/고곽대 선배/검은 새(놀랍게도 모두 한 인물이다)를 심문해 나간다. 격하게 움직이는 동선과 극으로 치닫는 인물 간 감정의 갈등은 환상적이다.

 

주인공의 정체를 추리하기 바쁜 와중에 ‘화재를 일으킬 만한 물질이 없었다’라는 국과수의 검사 결과까지 등장하며 사건은 미궁으로 빠진다. 불을 지필 게 없었는데 불이 났다니! 연극 내내 내 앞에 보이는 이 사람이 방화범인지 아닌지 땀을 쥐고 지켜봤다. 관객을 끌어가는 힘이 있는 연극이지만, 어두운 감정선과 빠르게 오가는 대사의 무게가 상당하다. 1시간 30분이라는 러닝타임 내내 관람하기엔 관객이 지쳐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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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집단 상상두목 제공 / ⓒ황호규

 


 

숨 돌릴 틈은 드릴게요


 

그래서일까? 다행히도 관객이 ‘숨 돌릴 틈’이 제법 있었다. ‘댄스 브레이크’와 심판의 존재가 연극의 중간중간 웃음을 주었다. 특히 심판 역을 맡은 유은지 배우의 연기가 깊이 인상적이었는데,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고 무대를 오가는 첫 등장부터가 신선한 충격이었다.

 

‘심판’은 공연 시작 전, 나를 포함한 관객에게 직접 핸드볼을 만질 기회를 주며 호응을 유도했다. 덕분에 막이 올라가기 전부터 극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야기의 진행 도중 때때로 호루라기를 올리거나 흥겨운 몸짓으로 관객의 긴장을 풀어 극의 흐름을 이어가는 연기가 대단했다. 분명 눈에 띄는 모자를 쓰고, 더 눈에 띄는 인라인스케이트를 신고 있음에도 전혀 눈에 거슬리지 않았다. 극장을 나오며 친구와 이구동성으로 ‘심판 배우분 너무 대단하지 않아?’라고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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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시작 전, 관객의 호응을 유도하는 유은지 배우

창작집단 상상두목 제공 / ⓒ황호규

 

 

이 극은 장면을 ‘댄스 브레이크’로 전환한다. 입장하면서 보았던 드럼이 바로 이때, 깔리는 음악과 함께 제 역할을 멋지게 해낸다. 어딘가 핸드볼의 자세인 것도 같은 이 안무가 실제로 핸드볼 선수들의 동작에서 따온 것이라는 것을 알고 보니 이 연극이 얼마나 많은 고민 끝에 만들어진 극인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긴장감 있는 음악에 맞춰 비장하게 춤추기도, 때로는 관객이 다 함께 웃을 정도로 우스꽝스러운 모양을 취하기도 하는 댄스 브레이크 덕분에 팽팽 돌아가던 내 뇌를 중간중간 쉬어줄 수 있었다. 배우들의 춤 솜씨가 정말…. 대박이었다!

 

이렇게 관객의 ‘숨 돌릴 틈’이 되어주었던 음악과 드럼, 그리고 안무는 장면이 전환된 후, 감정을 고조시키는 것에도 큰 몫을 해낸다. 마치 내 심장 소리처럼 극 속으로 뛰어드는 드럼이 극장을 나오면서도 어렴풋이 남아 있는 느낌이었다. 처음 보는 ‘심판’의 존재부터 드럼과 안무, 그리고 댄스 브레이크까지. 여러모로 새롭고 인상 깊은 연출이었다.

 

 

 

선수를 집어삼키는 것들


 

연극 내내 궁금했던 것은 바로 “고곽대는 도망치고 싶어 하는가?”였다. 고곽대는 자신이 최고작이라고, 실패의 경험 따위 없는 2학년 후배라고 주장한다. 그는 검은 새를 피해 검은 비닐봉지를 뒤집어서 쓰기도 하고, ‘고곽대 선배’라는 제3의 인물을 등장시켜 자신과 자신이 함께 있었다고 증언하기도 한다. 고곽대는 자신을 부정하고 싶은 것인가? 그 부정으로 그가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고곽대는 경기장, 즉 코트를 ‘나를 집어삼키는 짐승’이라고 칭한다. 핸드볼은 공격수와 수비수가 나뉘지 않는 스포츠다. 사전부터 정해지는 공격수, 수비수는 없다. 경기장에 들어선 순간, 경기가 시작하는 그 순간에 그 경기의 ‘내’가 정해지는 것이다. 규칙으로 분리되기 이전, 수비수도 공격수도 아닌 태초의 ‘나’는 어디로 가는가? 코트가 집어삼켜 사라지는가? 본연의 자아를 잃고 방황하는 듯한 고곽대는 결승전이 있던 그날의 코트에 먹힌 것만 같다.

 

그의 가장 큰 두려움은 코트다. 코트 안에 처음 들어설 때부터 고곽대는 안 되는 것부터 배운다.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된다. 그렇게 한참 규칙을 배우다 보면 되는 것이 온다. 그다음으로 되는 것, 다음, 그다음. 끊임없이 다음으로 향하는 것이 선수의 삶이다. 그러나 고곽대는 그것이 두렵다.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는 것.’ 코트, 규칙, 선. 고곽대를 고곽대로부터 분리하는 것들이 그를 집어삼킨다. 검은 새의 탄생은 코트에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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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집단 상상두목 제공 / ⓒ황호규

 

 

 

우리를 집어삼키는 것들


 

스포츠물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이 바로 이런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코트 위에서 흔들리는 선수의 마음은 사실 인생의 풍파 속에서 흔들리는 우리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는 것. 코트가 상징하는 무형 무취의 ‘보이지 않는 것’들은 우리 또한 무서워하는 것들이다. 검은 새는 우리 안에도 있다.

 

우리는 교실 안에, 학교 안에, 직장, 사회, 어쩌면 사람들 속에 갇혀 있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규칙이 우리를 조여오고, 되는 것보다 안 되는 것이 많은 곳. 들어선 이상 그때그때 주어지는 역할에 맞추어 뛰어야 한다. 실패가 나를 덮쳐오고, 일상적인 좌절이 삶을 지배한다.

 

고곽대가 경기 시작 전의 자신을 잃을까 봐 두려워했던 것처럼, 우리는 이 모든 것이 일어나기 이전의 나를 잃을까 봐 두려워한다. 자아를 찾고 싶다고 부르짖는다. 고곽대가 최고작을 가장한 것처럼, 무너진 자신을 부정하고 원래의 ‘나’는 이렇지 않았다고 회상한다. 코트에서, 실패한 자신에게서 도망치려 한다.

 

 

 

다른 여름으로 가자


 

그러나 검은 새는 그런 고곽대를, 그리고 우리를 지적한다. 오줌싸개 찌질이 실패자 고곽대 선배도, 네가 두려워하여 비닐봉지를 쓰고 피해 다닌 검은 새도 전부 ‘너’라고 선언한다. 자신을 받아들여야만 ‘다른 여름’으로 갈 수 있다며 손을 내민다.

 

그렇기에 <다른 여름>은 결국 내가 나의 손을 붙잡는 이야기이다.

 

언제까지고 비닐봉지를 뒤집어쓴 채 나의 실패를 외면할 수는 없다. 좌절하지 않았던 과거의 나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실패한 나도, 좌절한 나도 전부 인정하고 포용해야만 그다음의 여름으로 나아갈 수 있다. 나는 이 연극의 제목인 ‘다른 여름’이 성장한 내가 맞이할 다음 해의 여름이라고 해석했다. 주저앉은 채로 멈춰 있던 고곽대의 여름이, 검은 새와 마주하며 째깍 지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연극은 고곽대가 마침내 7미터 드로우 라인에서 공을 던지며 끝난다. 이로써 그의 시간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연극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혹시 나에게도 ‘다른 여름’이 필요한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나도 무언가에서 도망치고 있을까? 다행히도 바로 생각나는 ‘코트’는 없었다. 그러나 언젠가 나에게 이 세상이 코트처럼 다가올 때, 고곽대를 기억하며 ‘다른 여름’으로 향하고 싶다.

 

 

 

[컬쳐리스트] 박주은.jpg

 

 

[박주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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