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검은 억압 속 초록빛 갈망 - 베르나르다 알바 [공연]

"초록 드레스 입고 세상 저 밖으로 나가 춤출래"
글 입력 2023.07.25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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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이익-

 

대문이 열린다. 베르나르다 알바가 걸어 들어와 우뚝 선다.

딸들과 하녀들이 숨죽인다.

베르나르다가 천천히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른다.

모두 따라서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른다.

발을 구르는 듯한 선율이 흘러나오며 넘버가 시작한다.

 


2023 베르나르다 알바 보도용 (1).jpg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는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희곡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을 원작으로 한다. 배경이 되는 안달루시아 지방 플라멩코의 정열이 손뼉과 탭 댄스로 전해지며, 주인공들의 특성이 담겨 있고 구음을 길게 뽑는 넘버에서 베르나르다 집 안 통제의 기류가 느껴진다.

 

 

 

우린 행복 행복한 가족 ?


 

2023 베르나르다 알바 보도용 (2).jpg

 

 

1930년대 초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한 마을, 베르나르다 알바는 그의 두 번째 남편 안토니오의 8년 상을 치르는 동안 다섯 딸들에게 극도로 절제된 삶을 강요하며 그들을 통제한다. 집 안으로 바람 한 조각 들어올 수 없게 창문까지 걸어 잠그는 그의 억압은 숨 막히는 더위로 형상화된다. 그는 집안의 언어를 만드는 사람이고, 딸들과 집사 폰시아, 하녀들은 그녀의 말에 복종해야만 한다. 베르나르다는 여성이지만 남성중심적 여성관을 내재화한, 가부장적 질서를 강제하는 인물이다. 


베르나르다는 자신의 보호 아래 모두가 무사하다고 여기며, 그의 집 내에서 질서는 고요히 유지됐다. 첫째 딸 앙구스티아스의 약혼자 ‘빼빼’가 집안에 들어서려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앙구스티아스는 열 살도 넘게 어린, 동네에서 가장 멋진 ‘빼빼’와 약혼한다. 그러나 자매들은 빼빼가 그녀에게 청혼한 것이 사랑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첫째 아버지와 안토니오로부터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 때문이라 말한다. 앙구스티아스는 “나는 행복해야만 하는데”라며 노래하지만, 어쩐지 그의 목소리는 먼지구름에 묻혀 사라진 듯 들리지 않는다. 그는 새벽 한 시 정도까지 빼빼와 창문에서 이야기를 나눴지만, 빼빼의 인기척은 새벽 4시에도 들렸다. 앙구스티아스는 베르나르다에게 빼빼가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다며 호소하지만, 베르나르다는 “여자는 그런 거 묻는 거 아니야”라며 되려 앙구스티아스를 질책해 단속한다.

 

 

 

추녀와 미녀, 창녀와 성녀


 

“남자들이 모두 싫어”한다는 넷째 딸 마르띠리오와 “가장 어리고 예쁜” 막내딸 아델라는 빼빼에게 호감을 느낀다. 전형적인 대립 구도이며, 전형적으로 빼빼는 마르띠리오가 아닌 아델라와 은밀한 만남을 이어온다. 마르띠리오와 집사 폰시아는 이 사실을 알고 구슬리기도 하고 경고도 하지만 아델라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언니처럼 난 안 살아” “욕망을 따를래” “그이와 함께 초록 드레스 입고 세상 저 밖으로 나가 춤출래” 노래하고 화려한 초록색 부채를 나풀거리며 춤춘다. 검은색으로 가득 찬 공간에서 유일하게 눈에 띄는 초록빛은 아델라의 돋아나는 생기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쩐지 위태롭다. 과거에 초록을 만드는 염료에 독성이 있어 초록색이 ‘죽음’의 색으로 금기시되었다는 사실이 연상되며 아델라의 운명이 겹친다.


둘째 딸 막달레나의 곡소리에 가까운 노래, “내 고통은 배고픔이 아니야. 내 고난은 사랑의 아픔”은 아델라의 이야기일까,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 안에 있는 여성들을 모두 대변하는 것일까? 사랑과 열정을 위해 초록빛 문을 열어젖힌 아델라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넓은 세상이 아니었다. 그녀와 비슷한 길을 갔던, 그리고 비명을 지르고 있는 여성의 이야기가 들려오고 가족들은 그녀가 대가를 치러야 한다며 비난한다.

 

결혼하지 않은 채 출산해 자식을 죽인 여성. 아델라는 그녀를 도망가게 놔두라며 부르짖지만 ‘창녀’에게 응당 내려지는 벌은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집안의 가부장적 권위자, 베르나르다는 처녀-창녀 이분법을 자신에게도 적용하며 내재화한 인물이기에 아델라의 운명 또한 짐작 가능하다.

 

 

 

발정난 수말과 억압 아래 터져 나오는 갈증


 

<베르나르다 알바>에는 남성이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안토니오도 존재로만 암시되며, 그 역할 또한 여성 배우가 맡는다. 대신, 남성들을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것은 ‘수말’이다. 우리에 갇힌 수말들은 암말을 찾기 위해 발길질을 해두고, 베르나르다는 ‘수말들은 풀어주고 암말들을 가두라’고 명령한다. 암말에 대한 수말의 집착은 공허함 속에서 무언갈 갈구하는 갈증이며, 끝이 보이지 않는 더위는 억제된 욕망이다. 그리고 어느 날, 암말들이 도망친다. 그리고 욕정을 격정적으로 풀어내는 ‘종마’ 씬이 이어진다.

 

 

2023 베르나르다 알바 보도용 (3).jpg

 

 

아델라는 흰 속치마를 입고 무대에 다시 나타난다. 무대에서 유일하게 흰색을 입는 사람들은 아델라와 베르나르다 알바가 가둬놓은 노모 ‘마리아 호세파’다. ‘초록 드레스 입고 사랑하는 이와 춤추겠다’는 아델라와 ‘해변으로 가 즐기며 살겠다’는 마리아 호세파는 자유에 대한 갈망을 표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인지 아델라가 빼빼를 만나기 위해 나설 때 마리아 호세파와 마주친다.

 

아델라는 빼빼를 만나고 온 것을 마르띠리오에게 걸리고, 마르띠리오는 소리를 질러 베르나르다를 부른다. 격분한 베르나르다는 총으로 빼빼를 쏘고, 마르띠리오는 빼빼가 죽었다고 전한다. 아델라는 한참을 절규하고, 홀린 듯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마르띠리오가 빼빼 로마노가 암말을 타고 도망쳤다고 전하자, 막달레나는 왜 거짓말을 했냐고 격노한다. 이때, 마리아 호세파가 의자를 넘어뜨린다. 이는 아델라 방에서 들려온 소리와 동일시된다.

 

한참 방문을 두드리다 열어젖힌다. 폰시아가 손을 목에 가져다 댄다. 딸들은 비명을 지른다. 베르나르다는 슬픔을 억누른 채, 아델라를 “처녀로 단장해”라고 명령한다.

 

“아델라, 베르나르다 알바의 막내딸은 처녀로 죽었다.”

 

욕망을 쥔 아델라가 마지막에 입고 있던 옷은 순결을 상징하는 흰색 속치마였다.

 

 

 

그 무엇도 해소되지 않은 채, 다시 닫혀버리는 베르나르다의 대문


 

2023 베르나르다 알바 보도용 (4).jpg

 

 

커튼콜이 이어진다. 배우들이 한 명씩 인사한 후 대문 안으로 들어간다. 베르나르다 알바는 끝까지 자리를 지키다 마지막으로 대문을 닫고 들어간다.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으로 모두 다시 들어가는 것이다.

 

극 중에서 폰시아는 베르나르다에게 칼을 갈았다. 딸들이 가진 내면의 폭풍들을 알아채며 그에게 경고를 날리기도 했지만, 그의 자리에 침을 뱉으며 경멸을 표했던 것에 비하면 베르나르다를 직접 해하지는 않았다. 막달레나도 베르나르다에게 “그냥 좀 내버려 두시면 안 돼요?”라 말하고 아델라의 입장을 헤아렸지만, 직접적으로 저항하지는 않았다. 나머지 딸들과 하녀들도 모두 마찬가지다. 그 누구도 베르나르다에게 칼을 뽑지 않아 그 무엇도 해소되지 않았다. 그리고 베르나르다의 대문은 다시 닫혀 버렸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이 내면화한 억압과 통제는 곧 베르나르다 알바로 형상화된다. 그리고 이는 ‘보호’라는 명분 아래 딸들에게도 적용된다. 베르나르다의 언어를 해체하고자 저항한 아델라는 자유를 쥐고 죽음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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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델라의 죽음은 굳건히 닫힌 대문에 작은 균열이라도 낼 수 있을까.

 

 

[정은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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