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퀴어 여성이 무대 위에서 죽거나 사라지지 않았으면 했어요.” - ‘이것은 사랑이야기가 아니다’ 도은 작가

글 입력 2023.07.19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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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사랑이야기가 아니다 포스터.jpg

 

 

어떤 이야기가 연극이 될 수 있을까. 여성 퀴어가 등장하는 이야기는 확실히 연극이 될 법하다. 자신의 성 지향성을 깨닫고 내적, 외적 갈등을 겪은 끝에 마침내 사랑을 ‘쟁취’하거나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 인물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하지만 실제 삶은 극적인 순간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퀴어 여성의 삶도 마찬가지다. 존재 자체가 이야깃거리이던 시절을 지나, 지금 우리는 조금 다른 이야기도 상상해볼 수 있지 않을까. 반려자를 만나 아이를 기르고, 울고 웃는 ‘보통날’을 지나며 나이 들어가는 퀴어 여성의 이야기를.


오는 21일까지 국립정동극장세실에서 공연되는 연극 <이것은 사랑이야기가 아니다>는 2000년생 퀴어 여성인 재은과 윤경의 100년을 담았다. 친구로 만나 연인이 되고 결혼해서 딸 재윤을 입양하고, 다시 각자의 길을 걷기까지. 한 세기에 걸친 삶의 장면들은 너무 평범해서 오히려 새롭게 다가온다. 제목에서는 사랑이야기가 아니라고 했지만 끝까지 보고 나면 이것이 사랑이야기가 아닐 리 없다고 확신하게 된다. 도은 작가를 만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았다.

 

 

 

죽거나 사라지지 않는 여성 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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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이것은 사랑이야기가 아니다>가 한창 공연 중입니다. 2022년 낭독공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면 감회가 새로울 것 같아요.


대본을 여러 번 수정했어요. 낭독공연 때는 낭독공연의 매력을 보여줄 수 있는 방향으로 수정했다면, 이번에는 실제 무대에서 펼쳐질 공연에 맞게 다시 수정하는 과정을 거쳤죠. 낭독공연 때 창작자로서 제가 느낀 아쉬움과 관객분들이 아쉬웠다고 말씀해주신 부분을 최대한 반영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수정되었는지 들어볼 수 있을까요?


여러 시간대를 오가는 방식으로 진행되다 보니 공백이 생기는 지점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인물이 단편적으로 보이는 부분도 있었고요. 그런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고민하다가 재윤을 입양하기 전 재은과 윤경의 모습을 보여주는 ‘2038년’ 장면을 추가했어요. 함께하는 두 사람의 외로움과 고민을 보여줌으로써 인물들이 무조건 행복하고 밝게만 그려지지 않도록 신경 썼습니다.

 

 

제목 이야기도 하지 않을 수 없죠. ‘이것은 사랑이야기가 아니다’라는 제목은 이것이 ‘사랑이야기’임을 오히려 강조하는 느낌이었는데요, 영화나 드라마 속 퀴어 인물의 사랑을 사랑이 아닌 다른 것으로 해석하는 이들에게 건네는 말 같기도 했고요.


제목은 마그리트의 그림 '이미지의 반역' 속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장에서 영감을 받았어요. 말씀하신 대로 이야기 속 퀴어 인물들의 사랑을 자꾸 우정으로 치환하려는 어떤 시도에 약간 지친 감이 있었어요. 사랑이라 불리지 못하는 사랑에 대해서도 생각했고요. 

 

‘이것은 사랑이야기가 아니다’라고 했을 때 오히려 ‘사랑이야기’에 이목이 집중된다고 생각해요, 사랑이야기가 아니면 무슨 이야기일까, 사랑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볼 수 있을 거고요. 그렇게 고민하는 지점이 좋더라고요. 실제로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보니 제 의도대로 제목을 봐주신 분이 많았어요.

 

 

작품을 쓰기로 마음먹은 계기가 있었나요? 이 이야기가 시작된 지점을 들어보고 싶어요.


2021년 봄에 초고를 썼어요. 그 무렵 영화나 공연을 볼 때 퀴어 여성이 나오면 긴장할 때가 많았어요. 저 인물이 죽지 않을까, 또는 ‘역경과 고난을 딛고 세기의 사랑을 끝끝내 쟁취한다!’ 같은 결론으로 달려가지 않을까 하고요. 물론 그것도 좋지만 약간 씁쓸했어요. 퀴어 여성이 재현되는 방식에 대한 고민에서 이번 작품이 시작되었죠. 흔한 방식은 피하고 싶었어요. 퀴어 여성이 무대 위에서 죽거나 사라지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뚜렷했고, 그 마음으로 작업을 이어갔습니다.

 

 

연극에서는 2007년부터 2099년까지 한 세기에 가까운 시간이 비선형적으로 펼쳐지는데요, 이런 전개 방식을 택한 이유가 있을까요?


원래 초고는 시간 순서대로 진행되는, 더 긴 분량의 이야기였어요. 퀴어 여성이 너무 비장하게 나오거나 반대로 과하게 낭만화되지 않길 바랐기에 누구나 경험하는 만남과 헤어짐의 순간, 행복하고 불행한 나날을 교차해서 보여주려 했어요. 재은과 윤경이 나이 들어가는 모습이 지금보다 더 상세하게 담겨 있었죠. 


하지만 피디님, 연출님과 회의를 하다 보니 시간 순서대로만 진행될 때 이야기의 동력이 약해질 수도 있겠더라고요. 수정이 필요하겠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어요. 그래서 지금처럼 비선형적인 전개 방식으로 바뀌었습니다.

 

 

 

지금 우리 삶과 가까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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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아의 ‘아틀란티스 소녀’, 엄정화의 ‘엔딩크레딧’ 등 음악 역시 이 작품의 중요한 요소인데요, 음악은 어떻게 선정하셨는지 궁금합니다.


한 인물을 만들고 나면 그 사람이 어떤 플레이리스트를 가지고 있을지 늘 고민하는 편이에요. 재은의 플레이리스트도 그렇게 자연스레 생각해봤어요. 왠지 한국 여자 솔로 가수의 음악을 좋아할 것 같았고, 그게 재은이라는 인물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해 적극적으로 음악을 활용했습니다. 

 

 

정말 그 시기 유행했던 한국음악이 흘러나오니까 더 현실감이 있었어요.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이야기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초반에 구체적인 거 없이 여성 퀴어가 나오는 이야기를 써야겠다는 것만 있을 때는 아예 SF 분위기가 강한 작품을 기획하기도 했어요. 만들어갈수록 저와 관객들의 삶과 좀 더 가까운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고, 그러다 보니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1990년대생과 2000년대생의 경험을 녹여내려 했어요. 

 

 

운명처럼 만난 두 사람이 헤어지는 원인이 외부적 요인이 아니라 흔하디흔한 성격 차이 때문이라는 것도 신선하게 느껴졌어요. 재은과 윤경은 어떻게 만들어진 인물인지 더 들어보고 싶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재은과 윤경은 누구 한 명만의 잘못이나 결정적인 사건 때문이 아니라 서로 함께하다 보니 우리가 더 이상 함께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깨닫고 멀어지죠. 함께하고 싶지만 함께할 수 없는 사람들 간 발생할 수 있는 갈등이 무엇일까 고민하며 가치관이나 성격이 충돌하는 두 인물을 만들었습니다. 두 사람의 다른 점을 대화나 행동만이 아니라 직업에서도 보여주려 했어요. 재은은 스타트업 컨설팅 일을 하고 윤경은 보육교사 일을 하니까요. 한 명이 전문직이면 다른 한 명은 여성이 많은 직업군이면서 사회적으로 평가절하되는 직업군을 설정하려 했습니다.

 

 

만들기 어려웠던 인물이나 쓰기 어려웠던 장면이 있었는지도 궁금합니다.


재윤이 정말 어려웠어요. 분량이 적기도 하고, 윤경과 재은에 비해 어떤 고민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는 인물인지 많이 드러나지 않는 인물이라서요. 게다가 이 극을 보는 관객도, 창작자들도 만나본 적 없는 세대의 사람이죠. 이 인물에게 어떻게 다가갈 수 있을지 고민이 컸습니다. 

 

재은과 윤경이 함께 보내는 2022년도 크리스마스 장면도 쓰기 힘들었어요. 나는 혼자서 이걸 쓰고 있는데, 이 두 사람은 함께 즐겁구나 싶어서요. (웃음) 

 

 

공연을 보며, 작품 자체도 따뜻하지만 공연 시작 전 안내 멘트에서 옆에 앉은 사람과 인사를 나누라고 했던 게 기억에 남아요. 덕분에 좀 더 훈훈한 분위기로 공연을 보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연출님의 아이디어예요. 저희가 이 작품을 발전시키며 그런 얘기를 나눴어요. 극장에 오신 관객분들이 안전하다는 감각을 가지고 볼 수 있는 공연이면 좋겠다고요. 또 저희가 커튼콜 때 춤을 추는데, 그것도 객석의 관객분들에게 우리가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전달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준비했어요. 

 

 

 

우리가 함께 상상해보는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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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은 세 사람의 관계가 중심이 되기 때문에 미래가 어떤 모습인지 구체적으로 나오는 부분은 많지 않아요. 그래서 작가님은 어떤 미래를 생각하며 이야기를 만드셨는지도 궁금했습니다. 


이야기를 만들고 보니 꽤 낙관적인 미래를 그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어쨌든 인류가 2099년까지 살아남아 우주에도 가니까요. (웃음) 물론 미래를 배경으로 삼으면서 기후위기 같은 이야기를 아예 안 할 수는 없었어요. 전면에 다루진 않더라도 장마가 계속된다는 상황 제시를 하는 등 자연스럽게 녹여내려 했습니다. 연출님과 무대디자이너님의 아이디어로 중간중간 미래를 살아가는 인물들이 보안경을 쓰거나 방호복을 입고 등장하는 모습을 넣기도 했어요.

 

 

재은과 윤경은 2035년도에 결혼하기로 결심하는데, 그때도 동성혼이 법제화되지 않았다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그런 부분을 보면 확실히 디스토피아적인 미래 같다는 느낌이 들죠. 재은, 윤경 세대와 이들의 자식 세대인 재윤 세대의 차이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기도 해요. 재은과 윤경 세대에는 아직 동성혼 법제화가 안 되어 있지만 재윤 세대에는 이미 법제화가 된 건 물론이고 일상 속으로 들어와 있는 거죠. 

 

 

그렇게 보니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재윤의 선택은 꽤 전통적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말씀대로 재윤이 선택하는 삶의 방향은 2035년생의 삶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여전히 전통적인 부분이 있죠. ‘결국 가족이 최고’ 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건 전혀 아니고요. (웃음) 우리가 아직 만나본 적 없는 세대의 삶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 고민했어요. 우리는 막연히 미래 세대가 우리보다 더 나은 선택을 할 거라고 믿곤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을 거예요. 이들의 삶을 섣불리 평가하거나 재단하지 않고 애정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걸 재윤의 삶과 그 삶을 지켜보는 재은, 윤경의 모습으로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실제로 작가님은 미래를 생각하실 때 낙관적인 편인가요?


매일 매일 달라요. 어떤 소식을 듣느냐에 따라서도 달라지고요. 그래도 어쨌든 낙관적인 시선으로 보려고 하는 것 같아요. 물론 우리가 생각하는 미래에 내가 있는지 없는지도 상상하기 어려운 시대이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좀 더 낙관적인 미래를 상상하려 노력하는 것 같습니다.

 

 

그럼 작가님의 미래 이야기도 들어보고 싶습니다. 앞으로 쓰고 싶은 여성 인물이나 이야기가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저는 이상한 여성들이 나오는 이야기를 좋아해요. 그 이상한 여자들이 대상화되지 않고 어떻게 무대에서 존재할 수 있을지 꾸준히 고민해요. 아직 초고도 완성되지 않았지만 지금 새로 쓰는 작품에는 정말 이해가 안 되는 이상한 여성 인물이 나올 예정이에요. 전체적으로 따뜻한 분위기의 <이것은 사랑이야기가 아니다>와는 또 다른 분위기일 것 같아요.


그리고 제가 극작가 동인 ‘괄호’라는 팀에 소속되어 있는데요, 거기서 12월 공연을 준비 중이에요. 여성 극작가들이 모여서 열심히 희곡 수정을 하고 있습니다. 부영이라는 여성이 주인공인 <다른 부영>이라는 작품으로, 부영이 자신의 수치심과 만나는 이야기입니다. 

 

 

지금까지 말씀 잘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사랑이야기가 아니다> 관객분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관객분들에게 힘을 많이 얻었어요. 사실 저는 관객분들 만나기 전에 긴장도 많이 하고 초조해하는 편인데요, 모두 열린 마음으로 이번 작품에 함께해주신 것 같아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극장에 와서 안전하다는 느낌, 이곳에서 내가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많이 경험하고 가시면 좋겠습니다.

 

 

*사진: 국립정동극장 제공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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