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신예슬 - 음악의 사물들 [도서/문학]

음악의 사물들을 통해서 바라본 '음악'
글 입력 2023.07.13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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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에 진심으로 빠지게 된 후 처음 실황 공연을 본 날의 감정을 생생히 기억한다. 난생 처음으로 본 클래식 공연은 아니었지만 클래식을 듣는 맛이 뭔지, 어떻게 감상하면 되는지를 익히게 된 이후로는 첫 관람이었다. 예습도 열심히 해 갔고,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피아니스트의 공연이었기 때문에 잔뜩 기대했었다. 한껏 즐기겠다는 마음으로, 단 한음도 빠트리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갔다.


공연이 시작되고, 꿈같이 황홀한 시간이 지나갔다. 90여 분의 공연 시간이 9분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공연이 끝나고 나를 휘감은 감정은 감동보다는 허무함이었다. 지나간 음악을 붙잡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공연 중에도 한 번씩 유난히 아름다운 부분이 들릴 때마다 비디오 재생을 멈추듯이 그 순간을 붙들고 싶었다. 예기치 못한 변주가 들려올 때는 잠시 음악을 멈추고 메모장에 적어두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속으로 감탄할 시간도 주지 않고 음악은 야속하게 계속 흘러갔다. 공연 후에 기억에 남는 것은 나의 감정밖에 없었다. 아니, 내가 느꼈다고 생각하는 감정의 기억마저도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날 나는 음악이 왜 ‘순간의 예술’, 혹은 ‘시간의 예술’이라고 불리는지 뼈저리게 체감했다. 공연 후에도 음반으로 같은 곡을 들을 수는 있지만, 그때의 실황 연주는 이미 지나간 음악이라 다시는 들을 수가 없다. 마음 같아선 순간을 붙들고 싶다고는 했지만, 실제로 시간을 멈추면 존재할 수도 없는 것이 음악이다. 시간이 흘러가야만 존재할 수 있고, 연주되는 동시에 사라지는 것이 음악의 운명이다. 실체 없는 음악의 허무함 앞에서 나는 한없이 무력해졌다.


그리고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들었던 건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도대체 음악이란 뭘까? 


그런 질문으로 가득했을 때, 신예슬의 <음악의 사물들>이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한 손에 들어오는 작고 귀여운 사이즈이지만 다소 난해한 그림이 그려져 있어서 예사롭지 않은 책이라는 인상이었다. 책의 서문부터 나의 의문을 관통하는 주제들로 가득했는데, 특히 나를 단번에 사로잡은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었다:

 

 

음악은 언제나 사물에 크고 작은 흔적을 남기고 있었고, 사람들은 언제나 악보나 악기 같은 사물을 손에 쥐고 음악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 자체가 음악은 아니지만 그것 없이는 음악도 없었다. 유물을 발굴해 과거의 삶과 문화를 엿보듯, 손에 쥐고 관찰할 수 있는 이 사물들을 유심히 살펴본다면 매번 흔적 없이 사라지는 음악의 실체에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10p

 


<음악의 사물들>은 ‘음악’을 물성으로 대변할 수 있을 만한 3가지 사물들인 악보, 자동 악기, 그리고 음반에 대해 다룬다. 각 사물의 탄생과 발전, 혁신의 역사를 되짚어가며 그에 대한 대중의 반응과 흥망성쇠를 통해 무엇이 음악이라 할 수 있는지 묻고 또 묻는다. 이 책이 정말 흥미로운 것은 단순히 사물의 역사를 읊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객관적 사실을 기반으로 논리적인 사고 실험을 통해 결국 가장 근원적인 질문인 ‘그래서 음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아 나선다는 것이다. 저자 신예슬이 들여다본 3개의 ‘음악의 사물들’을 하나씩 파헤쳐 보자.

 

 

 

악보 - 음악 ‘작품’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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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음악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악보에 대해 생각해 보자.


저자는 우리 귀에 들어오는 음악이 탄생하는 과정을 돌이켜보며 악보의 탄생과 그 악보가 연주되기까지의 시제와 시선의 차이를 짚어낸다. 일반적으로 음악은 작곡가의 악상 → 악보 → 연주 순의 과정을 통해 탄생한다. 우선 작곡가의 머릿속에 있는 악상이 지면에 음표와 음악 기호로 적혀지기까지 시제 차이가 발생한다. 우리가 결코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작곡가의 악상과 그가 기록한 악보가 불일치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설사 작곡가의 악상과 그가 기보한 악보의 음악이 동일하다고 해도, 혹은 악보가 음악의 진정한 기원이라 정의한다 해도, 연주자에 의해 연주되기까지의 과정에서 악보와 연주자 간에는 시제와 시선의 차이가 또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악보에 얼마나 자세하게 음표와 기호를 기재했는지는 시대마다, 작곡가마다 상이하다. 하지만 아무리 작곡가가 상세히 기보하려 했다고 하더라도 악보에는 언제나 연주자마다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있기 마련이다.


클래식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매력 중 하나는 바로 같은 곡을 연주해도 연주자마다, 연주회마다 제각기 다른 음악이 탄생한다는 점일 것이다. 매번 음악을 다르게 표현하며 즉흥의 요소를 넣는 것은 프로 연주자에게 요구되는 역량 중 하나이기도 하며, 연주자들이 제각기 다른 해석을 하는 것은 클래식이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고 오랫동안 계속해서 살아있을 수 있는 핵심 요소이기도 하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 때문에 악보와 연주는 영원히 일치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음악 ‘작품’이라 부르는 것은 악보인가, 연주인가? 우리 귀에 들어오는 음악이란 연주되는 음악일텐데, 악보만으로는 음악이 될 수 없는 것일까? 악보는 수많은 음악의 가능성을 내재한 단서일 뿐인가? 하지만 악보를 기반으로 연주가 탄생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음악이라는 실체 없는 것의 ‘원전’이라 일컫는 것이 악보가 아니라면 음악은 원래 무엇이었던 걸까? 음악에도 ‘원전’이라는 것이 있을까?

 

 

좁혀지지 않는 한 끗 차이, 음악의 근본적인 번역 불가능성, 지면에 결코 포섭될 수 없는 것들, 음악에서 무엇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우리가 음악에서 앞으로도 계속 귀 기울여 듣게 될, 형용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은 악보가 영원히 기록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29p

 

 

 

자동 악기 - 연주에서 인간이 기대하던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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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 피아노의 역사는 사람 없이 악보만으로 스스로 연주하는 악기의 탄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본디 고전 음악에서 연주자는 창작자라기보다는 악보의 ‘수행자’ 혹은 ‘매개자’에 가깝게 여겨져 왔는데, 이 수행자의 역할을 인간이 아닌 기계가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초기 발명 단계에서 자동 피아노는 가까스로 악보의 음들을 기계적으로 소리 내는 정도에만 그쳤기에 실제 인간의 연주와는 거리감이 있었지만, 점차 발전하면서 특정 연주자의 실제 연주를 그대로 재현할 수 있기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음반보다도 먼저 음악의 시공간적 제한을 없앤 시도인 셈이다.


이처럼 ‘사람 같이’ 연주할 수 있게 된 자동 피아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사람이 할 수 없는’ 연주의 영역까지 시도하게 된다. 인간의 두 손과 열 손가락으로 연주할 수 없는 음들을 연주하게 된 것이다. 이제 자동 피아노는 ‘얼마나 사람 같은지’를 뛰어넘어, 연주자 자체로서 기능하며 ‘사물의 음악’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계속된 발전에도 불구하고, 자동 피아노는 이제 더 이상 콘서트홀에 연주자로서 등장하지 않는다. 현재 대부분의 사람에게 단어 자체가 생소해졌을 만큼 연주자로서 자동 피아노의 존재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자동 피아노의 ‘탈 인간’적인 음악은 끝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던 것이다. 


자동 피아노의 역사는 결국 인간이 음악에서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자동) 피아노의 음악들은 우리가 여태껏 들어왔던 피아니스트의 음악들과는 사뭇 다르며, 때로는 부자연스럽거나 음악적이지 않은 것처럼 들린다. 이는 적어도 ‘연주’라는 관습이 주요하게 여겨지는 장르에서는 그 음악이 인간의 행동을 넘어서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연주에서 그저 음악이 아니라 언제나 ‘인간의 음악’을 듣고 있었다.

 

-133p

 

 

 

음반 - 시공간적 제한에서 해방된 음악은 음악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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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실황이 아니고서라도 우리 귀에 음악이 들어오게 하는 또 다른 사물, 음반에 대해 생각해 보자.


녹음기와 음반의 탄생은 정해진 공연 시간에 콘서트홀에 가야만 하는 시공간적 제한에서 음악을 해방했다. 음악은 더 이상 일회성 경험으로 한정되지 않고, 누구나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공간에서 무한 반복하며 들을 수 있는 경험이 되었다. 이에 따라 음반의 역사 또한 음악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되묻게 만들기도 했다. 콘서트홀에서 연주 실황을 듣는 총체적인 ‘시청각적 체험’인지, 아니면 그저 소리만을 ‘듣는 것’인지.


처음에는 음반이 얼마나 더 실황 연주를 그대로 구현하느냐에 초점이 맞춰졌지만, 점차 실황에서 우리가 ‘음악이라 기대하지 않았던’ 노이즈들, 즉 관객석에서 나는 소음이나 피아니스트가 움직이면서 나는 소음과 같은 것들까지 제거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무엇이 음악적이고 무엇이 음악적이지 않은 소리인지를 끊임없이 세세하게 걸러내는 가치 판단(150p)”이 이루어졌다.


결국 음반은 “실황의 사본이 아니라 누군가 녹음으로서 이상적이라고 여긴 가상의 음악(150p)”이 되면서, 음반과 실황 연주가 들려주는 음악에는 괴리가 생겼다. 더 나아가 나중에는 ‘음반 같은 연주’가 훌륭하다는 인식이 생기면서 본래 원본이라 인식되었던 실황 연주가 음반의 사본처럼 여겨지는 반전 현상까지 일어났다.


실황의 시청각적 경험이 배제되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한번 지나가면 되돌릴 수 없는 일회성이라는 음악의 특수성을 지워버렸을 때, 음악은 여전히 음악일 수 있을까? 무한히 반복될 수 있고, 심지어 임의로 ‘음악적이지 않은’ 노이즈들이 전부 제거된 그런 음악도 음악이라 할 수 있을까?

 

 

음반이 들려주는 것이 가장 생생하고 실황다운 소리가 아니라면, 음반에는 대체 무엇이 있는가. 거기엔 우리가 결코 현실에서 들어 보지 못했기 때문에 듣기를 소망해 왔던 상상 속의 소리가 있는 것은 아닌가.

 

-153p

 

 

*


이 밖에도 역사적으로 각 사물의 획기적인 시도들이 어떤 식으로 음악을, 음악의 사물들을 해체하고 재정의했는지 살펴본다. 들리는 것보다 보는 것에 더 초점을 맞춘 회화 작품에 가까운 악보, 최소한의 악상만을 그려 넣어 연주자가 사실상 다시금 음악을 창작하는 수준으로 연주해야만 하는 악보, 일부러 노이즈를 극대화한 음반, 기존의 음원을 재구성해서 다른 음악으로 재탄생한 음반 등과 같은 음악적 실험들이 그것이다. 이런 실험을 하나씩 살펴보면서 ‘음악은 물성이 아닌 추상적인 것이다’ 혹은 ‘음악은 청각적인 경험이다’ 등, 우리가 믿어온 음악에 대한 진리를 다시금 되묻는다. 우리 인간이 ‘음악’이라고 인지하는 혹은 받아들이는 영역이 어디까지인지, 음악에 잠재된 원칙들을 파헤친다.

 

이 책은 그 어떤 물음에도 명확한 답을 내리지 않는다. 저자가 제시한 사고 실험 안에서 음악이 될 수 없는 이유와 될 수도 있는 이유 양측 입장을 공평하게 설명해 주고, 오히려 질문을 더 던져줄 뿐이다. 우리가 이 책을 통해 명확히 알 수 있는 것은 그저 음악의 역사 속에서 수많은 기술의 발명과 쇠퇴 혹은 부흥을 거쳐 음악에 대한 인간의 정의는 끊임없이 붕괴되고, 재정립되어 왔다는 것이다.

 

저자가 던지는 흥미로운 사고 실험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덧 내가 음악에서 느낀 커다란 허무함마저도 음악의 한 특성이자 매력으로 받아들이는 나를 발견했다. 음악의 정의가 이렇게나 다양한 시도로 변화해 왔다는 점에서 ‘음악’이라는 존재가 가진 가변성과 추상성이 더욱 사랑스러웠다. 여전히 음악의 실체가 무엇인지는 명확하게 답을 할 수가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 같지만, 그것이 무엇일지 탐험하는 여정이 무척 즐겁고 흥미로우리라는 확신이 생겼다.

 

앞으로는 음악이 가져다주는 다양한 감정을 있는 그대로 기꺼이 받아들이고 맘껏 음미하리라. 허무함과 아쉬움이 몰려올지라도, 그건 결국 음악이 그토록 아름다웠다는 방증이기도 하니까.

 

<음악의 사물들>을 읽는 것은 지적으로 충만한 경험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그토록 궁금해했던 음악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같이 고민해 준 책이라는 점에서 더없이 값진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었다.

 

가끔 그런 책들이 있다. 지금 내 삶에 필요한 것을 운명처럼 가져다주는 책들. 내 삶을 관통하는 책들. 이 책은 그런 책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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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연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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