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좋아함을 삶에 애써 들이면 열리는 - 외국어를 배워요, 영어는 아니고요

글 입력 2023.07.10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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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어를 배워요, 영어는 아니고요.


제목에서부터 여러 가지 기억이 떠오른다. 영어 아닌 외국어들에 관심 가졌던 사람으로서 경험했을 법한 몇 가지 장면들. 혹은 취업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활동을 하고 싶다고 했을 때 돌아온 반응들. 이를테면 진로 찾기 프로그램에서 각자 ‘하고 싶은 일’ 항목에 대해 발표할 때 프랑스어를 배우고 싶다고 했다가 들은 말 같은 것이다. “그거 꼭 지금 해야 해요?” 아니면 일상생활이 우울에 발 묶여 있었을 때 그나마 하고 싶은 것으로 글쓰기가 떠올랐는데 이런 말을 들었을 때. “그걸 또 언제 하고 있어요….”

 

그런 반응과 마주했을 때마다 느꼈던 무안함을 기억한다. 순식간에 절박함 모르는 철부지가 된 느낌. 나쁜 일을 바란 것도 아닌데 나는 이 정도도 욕심 내면 안 되나 싶어 푹 꺼지는 마음까지.

 

영화학도로서 프랑스에 유학을 가고, 그것을 계기로 프랑스를 삶의 터전으로 삼게 된 곽미성 작가의 이탈리아어 배움 에세이를 읽고 있자니 그때의 기억들, 감정들이 겹겹이 되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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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 거주하며 일하고 있는 곽미성 작가는 이미 최소 2개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그는 또 하나의 언어를 배우고 싶어 하는데, 그의 마음속에 한국과 프랑스 외에 또 하나의 나라가 굳건히 자리하기 때문이다. 바로 여행 중의 특별한 환대로 기억 속에 고이고이 남은 이탈리아다. 휴가지를 이탈리아로 잡아 놓은 해면 일 년의 반을 행복 속에 보낸다는 작가는 팬데믹의 여파 안에서 마침내 이탈리아어를 배워 보기로 결심한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게 된 세태에 하고 싶은 일을 미룰 수 없겠다는 위기감이 든 것이다.

 

이탈리아어는 당장 작가의 업무 현장에서 요구되는 언어도 아니고, 직장인으로서 금 같은 주말 시간을 들여 배운다고 해도 프랑스에 사는 작가의 일상 속에서 바로 활용할 수 있는 언어도 아니다. 들이는 공과 시간 대비 생산성을 따지게 되는 성과 위주의 사고방식은 참 벗기가 힘들다. 작가 역시 힘들게 이탈리아 문화원에서 열리는 이탈리아어 수업에 등록해 놓고 괜한 짓을 벌이는 게 아닐까 생각하며 자신을 괴롭히는데 이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분명 이 책은 이탈리아어를 배우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프랑스어를 배울 때의 일보다 글쓰기를 내 삶에 진지하게 들이기 시작했을 때의 기억들, 감정들이 더 많이 떠올랐다. 단순히 외국어 학습의 노하우나 고충을 담은 책이 아니라, 사랑하는 새로운 것을 삶에 애써 들이는 모든 과정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책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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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 좋아하는 무언가 혹은 누군가를 향해 다가갈 때 자연히 긴장하게 된다. 곁에 있기를 거부당할까 봐, 혹은 내가 예상한 것보다 그 대상에게 더 많이 영향을 받게 될까 봐. 너무 좋지만 내 일상이 어디까지 휘둘리게 될지를 알 수 없으니까. 이 두려움은 상대에게 서로의 면면을 드러낼 줄 알고 그것에 익숙해지기 전까지 참으로 유효하다.

  

외국어 공부란 배우고자 하는 이를 물리적으로 거부할 수는 없지만 이미 머리 굵어진 성인이 외국어를 익히는 과정에서 다시 경험하는 걸음마 같은 느릿한 속도감에 사람을 지치게 만들 수는 있다. 작가는 외국어 배우는 일을 시지프스의 형벌에 비유한다.

 

 

외국어를 배우는 일에 완성이 어디 있는가. 나는 프랑스어의 세계에서 20여 년을 살고 있지만 여전히 완성됐다고 말할 수 없고, 그런 날은 절대로 오지 않으리란 걸 안다. 외국어란 산 정상 위에 머무르지 않는 바위와 같이 완전한 단계가 없다. 그러나 외국어 공부의 진짜 고통은 그 끝없음의 허무와 싸우는 데 있다. p. 100

  

 

형벌을 받는 시지프스와 달리 자처해 시작한 일이지만 험난하고도 지난한 이 '외국어 배우기'를 계속 하려면 배움 자체를 즐기는 수밖에 없다. 의심이나 조급함은 몸 밖으로 요령껏 밀어내고.(다시 생겨나겠지만 그때마다 마인드 컨트롤이 중요하다)

 

 

알아 가는 희열을 그 무엇에도 비교할 수 없다. 정말 좋아하는 사람과 드디어 단둘이 남겨진 기분이랄까. p. 219

 

  

이탈리아어 수업을 빼먹지 않고 수강하고 자투리 시간을 내어 이탈리아어 동사 변화 등을 열심히 외운 작가는 자신이 시간을 유용하는 데서 만족을 느끼는 사람임을 깨닫게 되었다. 수업에서 여러 사람을 만나며 학습 태도는 물론이고 삶에 대한 태도를 다시 보는 눈을 갖게 되기도 한다. 새 학기에 만난 수강생 중에는 이탈리아로 어학연수를 다녀온 청년이 있었고, 작가는 그의 추천에 직접 이탈리아 어학연수를 갈 꿈을 키우게 된다.

 

어학연수 준비는 이탈리아어 수업을 수강신청할 때보다 더 많은 고민을 안겨준다. 홈스테이 가족으로 이상한 사람들을 만나지는 않을지, 낯선 도시에 혼자 가는 게 안전할지 등등 피부로 와닿는 현실적인 고민들이다. 그러나 작가는 몸으로 부딪히는 자만이 볼 수 있는 아름다움을 출국 비행기 안에서 직감하게 되고, 일주일간의 볼로냐 어학연수를 알차게 마치게 된다.

 

좋아하는 대상에 파고들 때 나의 어디까지 무슨 영향을 어떻게 얼마나 받을지 경험하기 전에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몸으로 부딪혀 확인하는 수밖에. 위험을 내포하지만 그렇게 해야 비행기 창문 너머의 아름다운 석양과 현지의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니까.

 

이탈리아 문화원의 어학 수업에서 시작하여 일상 틈틈이 스며든 이탈리아어 공부와 문화 탐구, 마침내 이뤄진 볼로냐 어학연수와 추가로 진행한 피렌체 여행까지. 업무나 일상생활을 뒷받침하기 위함이 아닌 순수하게 좋아하고 궁금해하는 마음으로 시작된 곽미성 작가의 내밀한 이탈리아어 여행은 그를 상상도 못 할 멀고 눈부신 곳에 데려다주었다.

 

 

이탈리아어를 배우기 전에는 상상조차 못 했던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고 있다. 외국어는 결국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더디고 고생스러웠던 과정은 금세 잊히고 몰랐던 세계가 놀랍게 펼쳐진다. 나의 사적인 외국어 공부가 나를 여기까지 데려다 놓았다. 나는 작고 보잘것없지만, 나의 세계는 계속 커지고 있다. pp. 286-287

  

 

성에 차지 않는 속도, 생산성의 자로 잴 수 없는 실력, 이것을 왜 시작했는지 의심하며 드는 자괴감까지. 살다 보면 좋아하는 것을 그만두게 유혹하는 사유들은 너무 많지만 ‘그럼에도’ 좋아하는 것을 지켜나갈 필요가 있다.

  

 

매일 회사와 집만 오가며 작은 일에 분노하고 걱정하는 게 습관이 되면 어느새 잊게 된다. 내 앞의 선택지는 길고 다양하게 이어질 수 있으며, 삶은 얼마든지 다르게 펼쳐질 수 있다는 사실을. 서른 살 이후로 이렇게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난 것 같은 기분이 든 적이 있었던가. 제도권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 나를 깎아 내는 기분이 든 적은 많았어도,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이토록 자유롭게 밖으로 나와 살아 숨 쉬는 기분을 느껴 본 적은 없었다. 좁아지지 말자, 한발 뒤에서 더 넓게, 더 멀리 보고 가자, 이 한 주의 기분을 잊지 말자. 길을 걷는 내내, 간절하게 되뇌었다. pp. 252-253

  


좋아하는 것을 삶에 들여놓고 진심으로 대하다 보면 결국 자신을 더 잘 알게 되고 더 보듬게 된다. 내게는 글쓰기가 그런 역할을 해줬다. 잘 살고 싶은 마음, 오래 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해줬다. 여러분에게도 이미 마음속에 더 알고 싶고 더 하고 싶은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 뛰어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현실이 녹록지 않다면 시작은 조금 미뤄두어도 좋아하는 것을 영영 포기하지는 말자.

 

사는 것 자체가 허무와 싸우는 일인데 내가 뭔가를 좋아하고 아낌으로써 더 잘 살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그것으로 그 가치는 다 하는 것이다. 그러니 최소한 남 눈치 보느라 좋아하는 마음을 꺾어버리지는 말자. 우리 한 치 앞도 모를 무용함을 걱정하지는 말자. 좋아하는 것을 해보겠다고, 그 말을 세상에 꺼내놓기까지 우리는 이미 자신을 수도 없이 검열하지 않았는가. 그저 좋아함을 우리 삶에 들여놓자. 그리고 부단히 움직이며 온몸으로 그것을 감각해 보자. 그것이 몸과 마음에 편안히 스며들 때까지. 우리는 누구나 그럴 자격이 있다.

 

 

[신성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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