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중요한 건 좋아하는 것을 계속하는 마음 – 외국어를 배워요, 영어는 아니고요

글 입력 2023.07.05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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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수많은 언어가 존재하고,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모국어를 사용하며 살아간다. 그렇게 자신과 같은 언어를 쓰는 이들과 소통하고, 그들만의 문화를 형성한다. 당연하게도 같은 언어문화를 공유하는 이들의 유대는 아주 견고하다. 언어로 쌓인 울타리는 함부로 넘기 힘들다. <창세기>에서는 하늘에 닿기 위해 바벨탑을 쌓았던 인간들에게 분노한 야훼가 인류의 문명 발전을 방해하기 위해 형벌로 인간의 말을 제각각으로 만들고 온 땅으로 흩어버렸다고 전해진다. 오늘날까지 야훼의 형벌이 무시무시하게 느껴지는 건 그만큼 언어의 장벽이 누구에게나 높고 험난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일은 단순히 모르는 단어나 문법을 외운다고 다가 아니라 익숙한 나의 세상을 허물고 완전히 새로운 문화에 나 자신을 던져야 하는 일이다. 성실한 우리 한국인들은 이렇게 힘겨운 외국어 공부를 시험에 통과하기 위해, 유학을 준비하기 위해, 이민을 떠나기 위해 고통을 꾹 참고 성실히 수행해 왔다. 우리에게 외국어는 언제나 특별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이렇게 효율이 중요한 세상에 단순히 재미 삼아 시도하기엔 시간도, 돈도, 에너지도 너무 많이 소모되는 일이니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 생뚱맞은 이유로 외국어 공부에 뛰어든 사람이 있다. 스무 살에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고 20년 동안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프랑스어와 씨름했던 저자 곽미성은 가정과 직장 모두 자리를 잡은 상태에서 그저 이탈리아 문화가 좋다는 이유만으로 이탈리아어를 배우기 시작하며 자기 자신을 외국어의 형벌에 내던진다. 안 그래도 힘든 외국 생활인데, 간신히 관문을 통과하고 안정적으로 일상을 영위하면 될 차례에 새로운 도전을 감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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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어를 배워요, 영어는 아니고요>라는 책 제목을 처음 봤을 땐 정말 단순하게 제2외국어 공부에 관한 유용한 조언이 들어 있기를 기대했다. 20년을 프랑스에서 살고, 그곳에서 또 다른 언어를 공부하는 저자라면 특별한 조언을 전해주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한 기대감으로 책을 읽기 시작한 나는 의외의 감상을 얻었다. 이 책은 현실적인 목적의 제2외국어 학습서가 아니었다. 더는 도전이 필요하지 않은 시기에 굳이 도전을 감행한 자의 치열한 성장 일지였다.

 

 

 

남의 시선은 내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자유분방한 해외 생활은 동경의 대상이 되기 쉽지만, 현실은 마냥 낭만적이지만은 않다. 쉽고 빠른 행정 절차, 새벽까지 운영하는 가게 등 한국에선 당연했던 것들이 전혀 당연하지 않은 세상에 당도하고 나면 그동안 내가 얼마나 많은 편의 속에서 살아왔는가 실감하게 된다. 거기에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있던 지인들이 바다 너머 저 멀리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나면 멋있어 보이기만 했던 해외는 무방비 상태로 떨어진 전쟁터로만 느껴진다. 언어는 이 험난한 전쟁터에서 나를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무기다.

 

20년 넘게 ‘살기 위해’ 외국어를 익혔던 저자 곽미성은 프랑스어와의 전쟁이 끝나자마자 이탈리아어와의 새로운 전쟁을 시작한다. 외국어 공부가 낭만적인 취미가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상황에서, 그 어떤 필요에 의해서도 아닌, 순전히 본인이 하고 싶어서 말이다.

 

매분 매초 생산적으로 살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뒤처질 것만 같은 한국 사회에 적응하다 보니 하고 싶은 활동이 있어도 그 활동이 결과적으로 내 인생에 도움이 될지 계산하게 되었다. 최근에 나는 독일어와 프랑스어 모두 배우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그러나 이미 머리가 어느 정도 굳은 성인인 내가, 영어도 자유자재로 구사하지 못하는 내가, 둘 중 어느 언어도 당장 배워야 할 필요도 없는 내가 감히 이런 욕심을 품다니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시작도 하기 전에 지레 포기부터 한 것이다.

 

이 책을 읽고 저자의 좌충우돌 이탈리아어 공부를 응원하면서 섣부르게 한계를 정한 내가 부끄러워졌다. 저자 역시 가벼운 마음으로 공부를 시작한 게 아니었다. 한국인 지인은 물론 프랑스에서 만난 외국인 지인들도 저자에게 왜 굳이 이탈리아어를 배우느냐고 물었고, 합리적인 이유를 들어야 납득했다. 그 부분을 읽으며 시도조차 해보지 않고 포기한 나도 저자에게 의심의 질문을 던진 사람과 다르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으면서 또 흥미로웠던 건 모르는 분야를 배우는 다른 나라 사람들의 태도였다. 무언가를 배울 때면 가르치는 사람으로부터 ‘모르면 꼭 질문하세요. 그래야 늘어요.’라는 말을 항상 듣곤 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경우 나를 포함한 수강생들의 입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제대로 된 질문을 해야 한다는 강박과 섣부른 질문으로 수업 진도에 영향을 줘 남에게 손해를 끼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저자 역시 처음에는 나와 비슷한 태도로 수업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 남들보다 부족한 실력을 숨기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자신과 비슷한 실력의 다른 학생이 주저하지 않고 질문을 던지는 모습에 큰 용기를 얻는다. 그 대목에서 나는 부족한 실력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태도가 특히 인상 깊었다. 그동안 나는 나의 부족함을 남에게 미안해하며 살아왔다. 실력이 부족하면 앞으로 발전시키면 될 뿐, 남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데 말이다.

 

저자와 함께 이탈리아어를 배우는 사람들의 태도는 기본적으로 명랑했다. 책의 후반부에는 볼로냐에서의 어학연수 경험이 집중적으로 묘사되는데, 그곳에서 저자가 만난 사람 중 의욕적으로 은퇴 이후 삶을 준비하는 호주 할아버지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지만, 그렇다고 괜히 조급해지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인생은 생각보다 길다는 사실을, 평생 배우며 성장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도 나보다 잘난 동년배들을 보면 자연스럽게 부끄러움이 일곤 했다. 내가 살아온 시간보다 몇 배가 되는 시간을 더 살고, 온몸에 성치 않은 구석이 적지 않을 텐데도 명랑하게 인생 2막을 시작하는 모습을 보며 이 책을 읽는 나는 지금 얼마나 충만한 가능성을 끌어안고 있나 돌아보게 되었다.

 

불필요하다는 판단, 부족한 실력, 늦은 나이…. 나를 망설이게 했던 이유는 모두 남의 시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누군가 합리적인 이유를 들먹여 나를 말려도 내가 하고 싶다면 아무 소용 없다. 어찌 보면 뻔한 교훈이라 가끔 이런 말이 공허하게 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저자의 진솔한 공부 과정을 천천히 지켜보면서 어떤 교훈이 진부한 이유는 그만큼 그게 삶의 진리와 가깝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지금 내가 무엇을 원하느냐다.

 

 

 

중요한 건 꺾였는데도 그냥 하는 마음


 

무엇이든 배움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초라한 나 자신을 견디는 마음이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법이다. 요행을 바라지 않고 묵묵히 자기 자신을 단련해야만 원하는 경지에 오를 수 있다. 이 진실은 외국어 공부에 더욱 냉정하게 적용돼서 저자는 수시로 밀려드는 자괴감과 싸우며 공부를 지속했다.

 

작년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국가대표 선수들이 16강 진출이 확정되고 내건 구호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 큰 화제를 모았다. 나에게도 많은 힘을 준 문구였는데, 이후 방송인 박명수가 줄임말인 ‘중꺾마’의 뜻을 ‘중요한 건 꺾였는데도 그냥 하는 마음’이라고 재해석한 것을 보고 더 큰 감명을 받았다.

 

인간의 마음은 그렇게 강하지 않다. 사소한 요소에도 쉽게 흔들리고 좌절하는 게 우리네 인생이다. 중요한 건 그렇게 연약한 마음이 흔들리고 꺾일 때 바로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그 마음을 추스르고 그냥 해내는 것이다.

 

 

그 시간을 거슬러 내가 다시 이곳에 서 있다는 사실, 그 시절의 내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모습이 됐다는 사실에 삶의 경이가 느껴졌다. 오지 않을 것 같았던, 너무 까마득해서 짐작조차 되지 않았던 그 미래가 지금의 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흘렀고, 나는 어떻게든 살아온 것이다. 그러니 나는 앞으로도 어떻게든 살아갈 것이다.

 

- p. 108

 

 

한국에서 성장하고, 20년 동안 프랑스에서 생활하고, 직장을 다니며 이탈리아어를 배우기까지 저자의 마음이 꺾이는 순간은 수없이 많았을 것이다. 외국어를 공부하며 맞닥뜨리는 좌절의 순간에서 저자는 무력하게 포기하지 않았고, 이런 시련쯤은 바로 이겨내야 한다며 자신을 몰아세우지도 않았다. 그저 부족한 자신을 견디며 그냥 계속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흘렀고, 나는 어떻게든 살아온 것이다.’라는 문장을 읽고 순간적으로 울컥했다. 세상은 너무나 빨리 변하고 혼란스러운데, 그런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나는 너무 나약해서 하루하루 잘 버틸 수 있을지 수시로 불안해하곤 했다. 특정 시기에만 불안한 건 줄 알았는데 그냥 나란 사람의 성향이 그런 거였다. 그런 나에게 저 문장은 이미 변화무쌍한 시간을 모두 견뎌냈으니 앞으로도 잘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지금까지 살아온 것만으로도 나의 삶은 충분히 경이롭다고 말하는 것 같아 큰 위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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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이탈리아어 공부를 시작하고 얻은 건 이탈리아어 지식만이 아니었다. 다양한 사람들의 각기 다른 삶의 형태를 엿보았고, 외면하고 싶었던 과거와 화해했고, 결정적으로 저자 자신을 조금 더 좋아하게 되었다. 이것은 저자가 수시로 흔들리고 꺾이는 자신의 마음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끌어안으며 하루하루 살아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나와 다른 인생을 간접 체험하게 하고, 내가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에세이를 좋아한다. <외국어를 배워요, 영어는 아니고요>는 내가 에세이를 좋아하는 이유를 그대로 느낄 수 있었던 책이었다. 해외 생활을 동경했던 나는 이 책을 통해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간접적으로 알게 되었고, 고향에서 벗어나 낯선 환경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던 나는 이 책을 통해 나의 다사다난했던 지난날을 포용할 수 있었다.


책장을 덮고 읽기 전 이 독서에서 기대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었다는 사실에 뿌듯한 감정이 쏟아졌다. 저자가 이탈리아어 공부를 지속하는 자신을 더 좋아하게 된 것처럼 나 역시 이 책을 끝까지 다 읽은 나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나를 좋아하는 마음을 키우며 하루하루 살아가야겠다는 용기도 함께 획득했다. 저자에게 이탈리아어가 그러했듯, 나에게 이 책이 그러했듯 인생은 우리에게 기대 밖의 선물을 가져다 준다. 

 

 

[진금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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