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80년대를 가볍게 복기하는 방식 [영화]

<써니>와 <품행제로> 그리고 ‘철가방’
글 입력 2023.07.05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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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숙과 쾌락의 이중주


 

엄숙함의 측면에서, 1980년대를 규정케 한 사건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이었다. 신군부가 자행한 학살이 폭로된 이후 각계각층에서 발생한 저항들이 한 시대를 선명하게 특징지었기 때문이다. 현장의 참상을 담은 NHK의 다큐멘터리 비디오는 투쟁의 기폭제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항은 특히 대학에서 맹렬하게 일어났다. 대학생이 민중과 연대하여 혁명을 수행해야 한다는 이른바 전투적 총학생회론이 학생자치의 대세가 되었다. 대학이 일종의 진지가 된 것이다. 엄혹한 분위기가 캠퍼스를 지배했다. 개인의 자유와 욕망을 표출하는 것은 죄가 되었다. 교정에는 예의 통기타 반주나 팝송 대신 싸움을 선동하는 민중가요가 울려 퍼졌다.

   

["한강변에 나가 강물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도 죄스러운 시절이었다. (중략) 왜냐하면 그 물결에 스며들었을 민중들의 한과 땀과 눈물을 헤아려본다면 그것은 결코 아름다울 수만은 없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스물 한두 살의 나이에 강가에 나가서 강물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에조차 죄책감을 가졌던 세대가 또 있을까? 강물이 그런데 하물며 사랑이야."] - 공지영, 『고등어』에서

   

한편 1980년대는 여흥의 시대이기도 했다. 3저호황으로 주머니가 두둑해진 사람들은 먹고살기 급급했던 과거를 잊고 놀거리를 찾아 나섰다. 이러한 분위기는 정권이 추진한 이른바 ‘3S’(Screen, Sports, Sex) 정책과도 맞닿아 있었다. 자국민에 대한 학살을 통해 집권한 전두환은 정당성의 부재를 대중에게 쾌락을 제공함으로써 상쇄했다. 1982년, 대통령의 시구는 프로야구의 성대한 출범을 알렸다. 완화된 검열은 숱한 성인 영화와 포르노 테이프가 창작되는 토양이 되었다. 통금이 해제되자 전국 곳곳에서 성 산업이 번창했다. 이 무렵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컬러TV는 칙칙했던 흑백의 옛 시대와 작별을 고하고 풍요의 새 시대를 맞이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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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5월, 전두환 정권은 통금 조치를 해제한다.

   

 

 

격랑 속의 우스움


 

이 시절 실제 민중들은 운동권 학생들이 생각하는 민중과는 달랐다. 민중은 정권과 싸우기도 했지만, 동시에 술도 마시고 사랑도 했으며 야구도 봤다. 1980년대를 다룬 세 영화 <써니>, <품행제로>, <강철대오 : 구국의 철가방>은 그러한 운동권의 진지한 렌즈가 포착하지 못했던 가벼운 일상 세계를 관객에게 생생하게 현시한다. <써니>와 <품행제로>는 교복 자율화 세대의 청소년을, <구국의 철가방>은 중국집 배달부를 주인공으로 삼는다.

 

물론 시대가 시대인 만큼 작품 속에는 민주화운동의 풍경이 녹아들어 있다. 그러나 그 풍경이 인물들의 시시한 일상을 압도하지는 않는다. <써니>에서 운동권은 대체로 희화화의 대상이 된다. 서울 도심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집회에서 주인공 ‘나미’와 친구들은 다른 여학생 무리와 패싸움을 한다. 이때 서로 욕을 주고받고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기는 유치한 싸움은 학생과 전경의 전투와 시각적으로 착종한다. 민주와 통일이라는 거창한 구호를 내건 학생들의 영웅적 결단은 순식간에 불량 학생들의 세력 다툼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이러한 운동권에 대한 감독의 시선은 나미의 오빠에 대한 묘사에서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오빠는 나미가 나이키 운동화를 사달라고 부모님에게 투정을 부리자 여공들은 신발 하나 사 신기 위해 잔업을 얼마나 해야 하는지 아냐며 일갈한다. 이때 지식과 당위로 동생의 기를 죽이는 오빠를 아빠는 현실 논리로 제압한다.

 

[“그 잘난 등록금, 허구언날 쳐먹는 네 술값은 어디서 나오는데? 노동운동이니 복근운동이니 네 돈으로 하고, 등록금 내 줄 때는 학교나 조용히 댕겨!”]

 

집을 나오며 동생에게 독재정권과 부르주아 사상에 물들지 말라고 당부하던 오빠는 훗날 외국인 노동자의 임금을 체불하는 악덕 사장이 된다. 감독은 시종일관 진지하다가 결국 자신이 그렇게 비판하던 부르주아가 된 운동권 출신 386세대를 비꼬며 엄숙주의를 파괴한다. 그리고 그 폐허 위에는 시대를 살아냈던 보통 사람들의 일상과 유머와 가벼움이 자라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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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가출하기 직전 우연히 동생을 만난 오빠.

 

 

<구국의 철가방>의 경우 아예 85년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사건’을 배경으로 제시한다. 배달 간 기숙사에 사는 여대생 '예린'(유다인)을 짝사랑하게 된 중국집 배달부 ‘강대오’(김인권)는 그녀가 친구를 통해 건넨 천원 짜리 지폐에서 ‘생일파티’가 열릴 장소와 시간의 메모를 본다. 예린을 꼬셔보고자 파티에 참석한 대오는 의도치 않게 거대한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국가기관의 단속을 피하기 위한 은어였던 생일파티는 사실 학생시위였던 것이다. 진지한 구호가 오고 가는 현장에서도 대오의 우스운 일상은 지속된다. 대오는 숱한 전단지를 뿌리면서 단련된 손재주로 예린에게 접근해 유인물 뿌리는 법을 알려주며 은근슬쩍 그녀의 몸을 만진다. 강대오가 학생들의 영웅으로 거듭나는 과정 속에서도 그의 머리 속은 여대생에게 잘 보이고 싶은 생각 뿐이다. 대오의 이러한 감정적인 면모는 대학생으로 표상되는 이성과의 대비를 자아내면서 결과적으로 웃음을 유발한다. 자질구레한 일상이 우연과 필연의 결합을 통해 굉장히 지사적인 외양으로 나타나며 간극을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먹통이 된 TV를 고치기 위해 손으로 TV를 두들기는 학생들의 실루엣을 토론하는 모습으로 짐작하는 미국인들의 대사도 그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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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린에게 유인물 뿌리는 법을 가르쳐주는 대오.

 

 

 

양아치


 

<써니>와 <품행제로> 속 학생들은 공부와는 거리가 멀다. <품행제로>의 주인공이자 문덕고의 싸움짱 박중필은 ‘양아치 연기’의 대가인 류승범이 연기했다. 그는 친구 수동(봉태규)과 함께 ‘삥’을 뜯는다. 당시 유행했던 롤러스케이트장의 풍경은 수업 시간에 집중하지 않고 졸던 학생들이 방과후에 갔을 법한 장소를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수동이 포르노를 구매하기 위해 세운상가에 들렀다가 금지곡 LP판을 구하러 온 민희(임은경)와 조우하는 장면은 당대 분출하고 있었던 대중의 성적 욕망을 드러냄과 동시에 독재정권의 문화 통제를 비판하는 대목이다. 이처럼 희화화와 풍자는 지식인의 진지한 비판보다 더 강렬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판소리가 그러했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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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에서 ‘양아치들’인 ‘칠공주파’의 멤버들은 상당히 긍정적으로 그려진다. 그들은 공부와는 담을 쌓았지만 의리 있으며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도울 줄 아는 존재들이다. 이 칠공주파와 대립하는 악역으로 등장한 이상미(천우희)는 직설을 통해 체제에 대한 비판을 수행한다. 본드에 취해 있는 그녀는 해병대 시절을 복기하며 체벌을 정당화하는 교사를 향해 “그럼 X발 군대에서 말뚝이나 박지 왜 학교에 와서 깝을치냐”며 소리친다. 감독은 ‘제 정신이 아닌 어린 여성’의 목소리를 빌려 폭력적이고 위계적인 한국의 군사 문화를 꼬집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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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에서 본드 중독자를 연기한 천우희.

 

 

 

중앙대와 중화루


 

<구국의 철가방>은 ‘60년대에 태어나 80년대에 젊었지만 386은 아닌’ 청년들을 조명한다. 현재는 ‘586’으로도 불리는 ‘386’ 세대는 ‘60년대에 출생한 80년대 학번’에 속하는 이들을 통칭한다. 이 용어가 처음 등장한 1990년대 중반 이들이 30대의 나이였기에 앞에 ‘3’이 붙었다. 그런데 1980년대 4년제 대학에 진학하는 수험생의 비율은 20퍼센트가 채 안 되었으므로 386은 당대 청년 속의 상대적 특권층이었다.

 

대오가 여대생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그의 직장 동료 황비홍(박철민)은 ‘철가방’이 ‘여대생’을 노리는 것은 떠돌이 무사가 대감집 규수를 원하는 것과 같다며, 배달부는 ‘미용사’와 사귀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청년 내부의 계급적 차이를 강조하는 대사이다. 4년제 대학의 진학 여부로 갈리었던 80년대 청춘의 계급 분단선은 사랑의 감정마저도 갈라 버린 것이다.

 

문 부근에 바리게이트를 친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는 회랑에서 대오는 소속을 묻는 서울대생에게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어물거린다. 서울대생은 그가 다니는 대학을 궁금해하는 것이었지만, 대학에 가지 못한 대오는 자신이 일하는 가게인 ‘중화루’라고 대답하려 한다. 대오가 ‘중’으로 천천히 입을 열자 서울대생은 말을 끊고 “중앙대?”라고 물으며 그를 중대생이라고 생각한다. 대오는 자신의 단골인 쉐인(로버트 할리)이 중앙대 영문과 교수인 것을 떠올리며 대학생 코스프레를 한다. ‘중앙대’와 ‘중화루’라는, 발음의 유사성을 이용한 언어 유희는 인텔리와 노동자의 차이를 무겁지 않게 표현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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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은 배운 사람들의 관념성과 나약함을 우스꽝스럽게 풍자한다. 학생들이 자기소개를 하는 자리에서 소속을 밝힌 학생들은 하나 같이 민중가요를 부른다. 그러나 정작 '진짜 민중'인 대오는 민중가요를 알지 못한다. 그는 어색하지만 당당하게 김완선의 '오늘밤'을 부르며 간단한 율동을 춘다. 이때 주위는 정적에 휩싸인다.

 

대오는 전투적인 구호가 무색하게 공부만 해서 각목 하나 제대로 못 다루는 학생들에게 각목 휘두르는 법을 손수 가르쳐주기도 한다. 강성 운동권 학생인 봉수(김기방)은 온갖 철학, 사회과학 용어를 늘어놓으며 지식 자랑을 하지만, 정작 어떠한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 오히려 난관에 봉착한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는 쪽은 대오다.

 

시위대는 남한이 미국의 신식민지라는 구절을 대자보에 삽입할지 논쟁할 때 보다 중화루 사람들의 배달로 짜장면과 짬뽕을 먹게 되었을 때 더 큰 힘을 얻는다. 영화 말미에 황비홍은 ‘짜장면’과 ‘자장면’의 어감 차이를 이야기하며 표준어인 자장면은 맛이 없다고 언급한다. 그는 방송국 놈들이 뭘 아느나며, 중국 음식은 철가방 말이 표준말이라고 역설한다.

 

이를 통해 감독은 대학생과 언론인들의 다듬어진 언술로 인해 가려졌던 중국집 배달부들의 투박하고도 맛깔 나는 언어를 복원해낸다.

 

 

 

그럼에도 일상은 존재했다


 

이렇듯 <써니>, <품행제로>, <강철대오: 구국의 철가방>은 엄혹한 시대상황 속에서도 분명하게 실존했던 보통 사람들의 우스꽝스러운 일상을 명료하게 드러낸다. 그러면서도 각 작품은 독재정권과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비판을 놓아버리지 않는다.

 

이를 통해 사회와 개인, 역사와 일상이라는 어색한 대립적 도식은 해체된다. 거대한 역사적 사건 속에서도 무수히 많은, 어떤 하나의 이미지로 환원되지 않는 이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감독들은 작위적인 이데올로기에 입각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자연스레 1980년대의 입체적인 인간군상들을 조명해냈다. 이는 어느덧 사회의 주류가 된 386들이 타자들을 향해 보여야 할 태도이기도 하다.

 

 

[최정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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