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가장이 되었다.

전기, 쓰레기, 빨래, 청소! 완료!
글 입력 2023.06.25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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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취직이요..?


 

취업 전선에 뛰어든지 약 반년, 끙끙대며 자소서를 쓰고 포트폴리오를 만들다 맥주를 따고 겨우 잡힌 면접에 늦을까 봐 맨발로 비상구를 뛰어 내려가고, 면접장에서 눈물을 죽죽 흘리는 등 다사다난했던 일들을 속에서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취직이 되어 있었다. 처음 전화가 왔을 때 믿을 수 없었다. 내가 취직? 어떻게? 왜 나를? 하지만 날 뽑았으니 낙장불입. 당장 뛰어갑니다. 그렇게 나는 평생을 살아왔던 고향을 떠나 타지로 왔다.

 

 

 

운명이었던 거예요!


 

연휴가 끝남과 동시에 출근을 시작해야 했다.

 

처음에는 적당히 짐을 꾸려 근처에 사는 사촌 언니 집에서 주말 동안 신세 지며 집을 구하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아버지가 태워주시겠단다. 자동차로 이동한다니! 계획을 전면 수정해서 우리 집에 있던 내 짐의 대부분을 실어 새벽부터 길을 나섰다.

 

이후로는 폭주 기관차와 다르지 않았다. 올라간 당일 여러 부동산을 전전하며 방을 보던 중 괜찮은 매물이 있었다. 오늘 딱 월세를 내렸단다. 이건... 운명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집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다른 방? 그 사이에 이 방 나가면 어쩔 것이냐.

 

바로 계약했다. 집 떠나서 계약까지 거린 시간 반나절. 그렇게 내 생의 처음인 나만의 방이자 집인 첫 자취방을 구했다.

 

 

 

나는야! 가장!


 

어머니가 본가로 내려가기 전 후다닥 서류처리를 했다. 은행도 다녀오고 행정복지센터도 다녀왔다. 회사까지 가는 길도 찾아서 가봤다. 주변 마트 회원 등록도 하고 주변에 병원도 찾아서 약도 타 두었다.

 

혼자였으면 실수 만발이었을 텐데, 어머니와 함께여서 든든했다. 임차인 계약도 야무지게 등록하고 회사에 제출하기 위해 등본을 뽑았는데, 대가족이어서 종이에 꽉꽉 들어차 있던 표가 텅텅 비어있었다. 이제 정말 1인 가정의 가장이 되었다. 가장도 나, 부양가족도 나. 어머니를 보내드린 후 다짐했다. 혼자서 야무지게 다 해 먹는 가정의 가장이 된 내가 내 자신을 누구보다 멋지게 먹여 살려야겠다고.


첫 출근을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밥을 해 먹고 찾아놓았던 출근길을 찾아 회사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도시락 문화가 있어서 도시락통도 주문했다. 회원 등록해 둔 마트에서 메일 보내주는 할인 전단지를 보며 매일 할인된 식재료를 사는 취미가 생겼으며, 본가에서 눈치 보면서 사지 못했던 식재료를 사보기도 했다.

 

첫날을 제외하면 매일 도시락을 싸고 퇴근하면서 장을 봐서 이때까지 해 먹어 보고 싶었던 음식들을 하나씩 독파하며 실력을 쌓았다. 아직 집에서 배달시켜 먹은 적이 없다. 매끼 직접 해 먹는 게 즐거웠고 양을 많이 해서 회사 사람들과 나눠 먹거나 친구를 초대해 먹였다.

 

먹고 나서 바로 설거지하는 버릇도 들이고 있고 빨래랑 쓰레기도 꽉 차기 전에 얼른 처리했다. 버리는 위치와 날짜도 잘 확인해서 버리고 욕실 청소도 수시로 하고 있다.

 

 

밥.jpg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고 밥도 세 끼 열심히 챙겨 먹고 규칙적으로 잘살고 있다. 먹고 싶은 걸 먹을 수 있었고 자고 싶을 때 잘 수 있었다. 갑자기 산책하러 가고 싶다면 훌쩍 가도 되고 친구 집에서 주말 내도록 자고 와도 된다. 내 행동에 책임만 질 수 있다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었다. 자유로웠다. 나름대로 규칙적이고 자유롭게 사는 삶. 아직은 제법 잘살고 있는 것 같다.

 

 

 

아! 맞다! 그거!


 

잘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잠시, 아직까지는 실수 만발이다. 쓰레기를 다 정리해서 내다 버린 것 같으면 꼭 하나씩 남아있다. 쓰레기만 그런가? 설거지를 다 해도 돌아보면 하나씩 남아있고 있다. 빨래를 해도 꼭 하나씩 잊어버리고 남겨둬서 빨래 두 번 돌리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회사에 가지고 가겠다고 텀블러를 씻어놓고는 책상 위에 두고 그냥 나가질 않나 도시락과 사원증을 잊지 않고 들고 다니는 게 신기할 정도다.


아직 손에 익지 않은 집안일은 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고 퇴근해서 하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잘 시간이 되어 있다. 많이도 아니고 어느 날은 청소기 밀기, 어느 날은 빨래 나눠서 조금씩 하는데 그거 조금 했다고 피곤해서 쓰러진다. 집에 와서 후다닥 모든 일을 해치워도 시간이 남던 엄마가 사실 초능력자가 아닐까, 고민하게 되었다. 나는 그거 조금 했다고 피곤해서 쓰러지는데, 역시 어머니는 위대하다.

 

평생을 주택에서 살았기에 얼마나 조용히 해야 하는지 몰랐다. 항상 왁자지껄했던 집을 떠나 소리에 조심해야 하는 집은 신기하기도 하고 신경 쓰이기도 했다. 옆집이나 아랫집에서 언제 찾아올지 몰라 항상 조심한다고는 하는데 아직 잘 모르겠다. 발소리도 조심하고 전화 소리도 조심하고 설거짓거리라도 떨어지면 그렇게 미안할 수가 없다. 씻는 시간도 빨래 돌리는 시간도 조절해서 사람이 없을 시간에 맞춰서, 밤늦게 시끄럽지 않게, 조심조심. 이것도 버릇이 되면 괜찮아지겠지.


그리고 끊임없이 필요하게 생겼다. 내가 꼭 하나씩 까먹고 지나가듯, 필요한 것이 돌아서면 생겼다. 이걸 사면 저게 필요했고 저걸 사면 그게 필요했다. 까먹은 건 챙기면 그만이지만 이건 좀 달랐다. 쓰임새가 같아도 형태라든가, 색깔이라든가 미묘하게 달랐다. 온오프라인 어디서 구매하는 게 좋을지, 온라인이라면 어느 사이트가 좋은지 선택지가 계속 생겼다. 하늘에 뜬 별들이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르듯, 끊임없이 찾아봐야 했고 선택해야 했다. 이렇게 많은 선택지가 주어지니 부담스러웠다. 그렇다고 내가 누릴 수 있었을 혜택을 놓치는 건 너무 속이 쓰리니 나름대로 비교해 보면서 사고 있다. 아직 정보가 부족해서 손해 보는 일도 많지만 말이다.

 

가장이 된 건 좋지만 역시 가족 구성원이었던 시절도 좋았던 것 같다. 내가 신경 써야 할 일도, 책임져야 할 일도 적었으니. 그렇지만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면 자취하지 않고 집에서 출퇴근할 수 있는 곳에 직장을 구할 거냐고 물어본다면, 글쎄? 다시 돌아가도 집을 나오지 않았을까? 다시 과거로 돌아가도 자유로운 생활을 동경하며 집을 떠났을 것 같다. 나는 나를 책임 질 멋진 어른으로 자랄 테니까! 아직 모든 게 서툰 초보 가장이지만 언제가 모든 일의 능숙한 가장이 될 수 있도록 오늘도 한 걸음 전진이다!

 

 

[빈민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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