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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기 참 특이한 여자가 한 명 있다. 뒷골목에서나 볼법한 덩치가 산만한 남성을 수족으로 부리고, 대학원에서 온갖 학문을 섭렵하고 취미로 후원하는 상담소 안에서 일을 한다. 그녀의 하루 일과는 여자들의 고통을 듣는 일이다.
“남편이 술만 먹으면 나를 때려요.”
“아이들과 주변 시선 때문에 이혼을 못하겠어요.”
그녀가 매일 듣는 수많은 여자들의 호소는 위의 두 문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는 복수를 준비한다. 호소자의 남편을 죽여주는 것은 아니다. 매일 가정 폭력을 당한다는 여자의 복수도 아니다. 그녀는, 세상 전체를 향해 복수를 준비한다.
낯선 특성의 여성 주인공 - 강민주
양귀자의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는 스스로를 범인凡人 그 이상의 인물이라고 설명하는 강민주의 대담하고 위험한 납치 계획을 다룬 장편소설이다. 강민주는 ‘신의 아이’인 자신은 보통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선 너머의 것을 볼 수 있으며, 세상 돌아가는 방식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다고 말한다. 뚱딴지같은 소리지만 책을 읽는 독자는 낯선 그녀의 뜬금없는 자신감에 점점 동의할 수밖에 없다. 그도 그럴게, 강민주는 정말로 범상치 않기 때문이다. 보통의 인간이 가지는 연민과 감정, 감수성은 그녀에게 부재하는 것만 같다. 비워진 자리는 자신의 목표를 향해 온 힘을 다해 돌진하는 태도가 채웠다. 자신이 활용할 수 있는 모든 걸 활용하며, 자신 외의 인간에게는 그 어떠한 곁도 내주지 않는 냉혈한의 모습은 읽는 내내 신기할 정도로 낯선 인물상이다.
민주의 계획은 대한민국의 대배우 ‘백승하’를 납치하는 것이다. 백승하의 죄목은 다음과 같다. 여성들에게 이상적인 남성상을 제시했기 때문에.
나는 여자들이 그렇게나 많이 남자들에게 당했으면서도 여전히 남자에게 환상을 품는 것에 정말이지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내가 선택한 이 운명 말고, 다른 운명의 남자가 어딘가 꼭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여자들의 우매함은 정말 질색이다. 남자는 한 종이다. 전혀 다른 남자란 종족은 이 지구상에 없다. (46p)
백승하는 한국의 모든 여성들이 사랑하는 배우이다. 그는 완벽히 다정한 모습으로, 완벽한 가장의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다. 강민주가 범행을 계획한 계기는 바로 이 부분이다. 그가 완벽한 모습으로 여성들에게 착각을 주기 때문에. 여자들이 세상 어딘가에는 완벽한 남자가 존재하는데, 자신이 그것을 못 찾은 잘못으로 고통받는다고 착각하게 만들기 때문에. 강민주는 완벽한 남자로 대변되는 백승하의 치부를 낱낱이 파헤치고 고발하여 이 세상 전체를 뒤엎고자 한다.
사람은 무엇으로 변하는가
모든 것은 철저한 강민주의 계획대로 진행되고, 그녀 스스로는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자부한다. 물론 웬만한 것들은 정말로 그녀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서 그녀가 마주하게 되는 장애물은 다름 아닌 그녀 스스로의 마음이다.
허공에 떠 있는 나의 흰 손 위에 이윽고 백승하의 오른손이 포개졌다. 그를 나의 포로로 삼은 이후 처음으로, 나는 아무 의도나 목적 없이 그의 따뜻한 손에 내 손을 맡겼다. (206p)
한 사람에 대해 알게 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마음속 자리 일부를 내어준다는 것이다. 강민주는 27년의 인생동안 타인을 이해하지 않은 채로 살아왔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스스로의 치밀한 작전(백승하를 납치하는) 내부에서 처음으로 타인을 염려하는 경험을 체험한다. 강민주가 백승하를 감금한 몇 개월 동안 둘은 ‘티타임’을 가진다. 분명 강민주가 티타임을 설정한 의도는 백승하에 대한 지배를 견고히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점차 대화가 쌓이고 백승하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하며, 강민주의 마음 속에서 백승하는 ‘포로 백승하’가 아니라 ‘인간 백승하’가 되어버린다.
넓은 시선을 취해본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선과 악, 옳고 그름의 영역은 분명히 존재하며 마치 그어진 선을 기준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실상 인간은 그렇지 않다. 착하기만 한 사람은 없고 나쁘기만 한 사람도 없다. 모순적일지언정 단순하지는 않은 것이 바로 사람이다. 강민주는 ‘남성’ 백승하 이전의 ‘사람’ 백승하를 알아버렸고, 이것은 분명한 가치 판단에 의해 움직이던 사람 강민주를 바꿔놓았다. 강민주가 변한 것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부분은 그녀가 평소 잔혹하게 대하던 심복 '남기'의 눈물을 마주한 순간이다.
생각할 것도 없이 격양된 분노가 터져 나와야 정상이 아니던가.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남자들의 눈물은, 남자들의 절망은, 아니, 남자들의 젖은 날개조차 내 가슴을 미어지게 한다. 모든 젖어있는 것들은, 그것이 여자의 얼굴이건 남자의 얼굴이건 관계없이 나를 슬프게 한다는 것을 나는, 이제, 서서히 깨닫는다. 모든 젖어있는 것에 나는 태연할 수 없다. 젖은 얼굴의 비애 앞에서 나는 꼼짝도 하지 못한다. (301p)
작가는 작가의 말을 통해 조화로운 삶에 대해 생각해보길 바란다고 밝혔다. 작가의 의도는 범죄의 완전성을 추구하는 것 같던 소설이 결말에 가까워질수록 강민주와 백승하, 그리고 강민주의 심복 ‘남기’의 내면적인 변화에 집중하는 것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강민주는 백승하의 기쁨을 위해 그의 아들을 납치하는 무모한 도전을 벌이기도 하고, 백승하는 아들로 인해 강민주가 세상에 발각될까봐 아들의 눈을 가린다. 강민주를 사랑하는 그녀의 충실한 심복 남기는 난생처음 그녀에게 불복종한다.
결국 사람을 변하게 하는 것에 이름을 붙이자면 사랑이다. 강민주와 백승하가 서로 품은 감정을 연인 간의 감정이라 정의내릴 필요는 없으나 그들은 분명 서로를 사랑했다. 사랑은 사람의 눈을 가리고 목적을 잃게 만드는 위협이다. 그 끝이 파멸일지 평화일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마는 것이 사람의 사랑이다. 양귀자는 그 무엇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여자 강민주를 통해 그 무엇도 이겨버리는 사람의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냉혈한의 사람이라도, 우리에게 그 사람이 인간임을 증명하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 사람을 ‘신의 아이’가 아닌 사람으로 만드는 것일까?
강민주의 삶을 토대로 대답해보자면, 그것은 아마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