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불멸하는 사랑을 말하다
글 입력 2023.06.17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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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는 단어를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한 아이가 시인 진은영에게 질문한다. 그리고 시인답게 그녀는 질문에 각양각색의 단어들로, 구절들로, 시들로 대답하려 할 것이다. 결국 마지막에 다다라서는 대답하기를 멈추며 이렇게 말할 거다. “사실 사랑은 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겁니다.” 맞다. 사랑은 형체와 향기가 제각각이라 특정할 수 없다. 진은영의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에서는 특히 사랑의 그런 무한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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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은 무한함을 '윤회'라고 부른다

 

진은영이 시로 사랑을 형체와 경계를 없앨 수 있었던 건 왜일까? 그 이유는 사랑이 ‘윤회’한 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책의 뒷 표지에는 작가가 믿는 윤회사상이 철학자 엠페도클레스의 말 을 통해 전해진다. 다른 철학자들의 주장과 달리, 엠페도클레스는 네 가지 원소들이 동등한 위치에서 원초, 궁극적인 역할을 하며 새로 생성되거나 소멸하지 않고 변화하지도 않는다고 봤다. 윤회라는 단어가 가진 뜻도 그렇다. 시집 뒷커버에 적힌 말을 빌려보자면, 우린 과거에 소년이었으며 소녀였고, 덤불이었고 새였으며 바다에서 뛰어오르는 말 못 하는 물고기였을 거다. 

 

 

시 '올랜도'에서의 윤회

 

이렇게 철학처럼 시공간을 뛰어넘는 윤회가 직접적으로 잘 드러난 시가 있다. 바로 '올랜도'다. 미소년 주인공 올랜도가 17세기 후반 대사로 파견된 콘스탄티노플에서 여자로 변한 후, 집시들과 생활하다 18, 19세기를 거쳐 20세기 초에 아이를 낳고 시집을 출간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올랜도의 자유로운 전기로부터 영감을 얻었을까, 진은영의 시 <올랜도>에서도 윤회가 고스란히 나타난다.

 

 

오래된 비밀 하나 말해줄까, 나는 사포였다 / 다시 태어나는 조건으로 나의 뮤즈, 내 자 매들을 신에게 헌납했다 / 그러나 욕망은 악착같은 것 / 모든 재능이 사라진 후에도 남아있다 / 쓰지 않는 손이 줄 끊어지는 순간의 악기처럼 떨린다

 

나는 잿빛 고수머리, 칼날을 쥔 유디트였다 / 다시 태어나기 위해 모든 용기의 목을 잘라 삶에게 가져갔다 / 그래도 희망은 여인 곁에 누워 있다 / 이 빠진 노파의 쭈그러든 젖을 빨며 울다 잠든 아기처럼 

 

나는 햄릿이 사랑한 요릭 / 다시 태어나려고 익살을 전부 팔았다 / 질문은 핵심을 빗겨 간다, 안와에서 빠져나간 눈알처럼 / 껍질을 부수지 않고 노른자를 맛보려는 왕들은 어 찌 가르쳐야 하나요 / 죽음의 간을 맞추려고 마지막 풍자까지 써버렸는데 

 

나는 해운사에 취직한 이스마엘 / 배를 탔다, 하늘은 붉고 시간은 흰 돛과 함께 물 밑으 로 사라졌다 / 나의 하느님, 전당포에 앉아 계신 인색한 하느님 / 얼마나 값을 쳐주시려고 / 이 많은 영혼을 당신 속주머니에 챙겨 넣으셨나요? / 겨우 고관대작을 위한 은그릇 몇 개 내주실 작정이면서 

 

올랜도, 나 올랜도는 모든 사람을 상실한 후에 태어났다 / 내게 남겨진 것이라고는 나 자신의 현존 / 모든 상실을 보기 위한 두 눈과 / 본 것을 말해야 할 작고 흰 입술을 가 지고서 올랜도, 우리가 모든 슬픔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다

 

<올랜도>, 진은영

 

 

시에서는 ‘나’라는 시적 화자가 사포, 유디트, 요릭, 이스마엘 등 다양한 사물로 비유된다. 그러면서 마지막엔 시적 화자가 올랜도 자신이었다고 말하며 올랜도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마지막 두 연에서 특히 ‘윤회’가 잘 드러난다.

 

먼저, 모든 사람을 상실한 후에 태어났다는 구절이다.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덩그러니 남겨진 올랜도가 그려지지 않는가? 올랜도의 윤회는 가장 마지막에 남겨졌다는 점에서 궁극적이지만 그 마지막이 언제가 될지 모른다는 점에서 끝과 경계가 없다. 버지니아 울프의 동명 소설 속 올랜도는 시인이 되길 원했다. 다채로운 비유로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옛 소설의 주인공이지만, 올랜도는 다양한 시어로 진은영의 시에 비유로 등장해 스스로 시가 됐다. 진은영은 시 '올랜도'를 통해 상실의 흔적을 포착하고 슬픔을 전달하는 조용한 눈, 그리고 입술을 강조한다.

 

 

윤회를 가만히 바라보다 : 시의 역할

 

그 외에 시집에 수록된 다양한 시에서는 시인이 화자를 빌려 말하고자 하는 바를 드러내고 있다. 시 '올랜도'에서 살펴본 것처럼, 시인은 윤회를 가만히 바라보는 눈과 그것을 단어로 말하는 입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것은 '시'의 본질적인 역할이기도 하다. 수록된 시 한 구절을 소개할까 한다.

 

 

폴란드에 사는 카산드라 / 결코 틀리지 않을 미래를 예언한다 / -- 너는 죽을 거야 / -- 사랑이든 이별이든 모두 끝나지

 

<한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中 3, 진은영

 

 

카산드라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예언자다. 그녀는 트로이의 마지막 왕인 프리아모 스 왕과 헤카베 사이의 딸로 태어나, 트로이의 영웅 헥토르와 남매다. 아폴론에게 예언의 능 력을 받았지만, 그의 사랑을 거절한 대가로 설득력을 뺏겼다. 그녀의 입 대신 사람들의 귀를 막은 셈이다. 트로이의 목마를 성안으로 들여놓아서는 안 된다는 절규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트로이는 결국 멸망하고 만다. 진은영은 결코 틀리지 않을 예언으로 ‘너는 죽을 것’이며 ‘사랑이든 이별이든 모두 끝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설득력 없는 예언을 듣는 사람은 없다. 즉, 예언은 틀렸다. 

 

진은영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아무래도 텍스트 자체와는 반대의 뜻 같다. 죽을 거라고 예언했지만 사실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는 것을, 사랑과 이별에 끝이 있다고 하지만 사실 끝이라는 것은 없음을. 이 구절에서도 그녀가 시에 담고자 했던 가치가 담겨있다. 윤회하는 사랑. 그것은 끝없이 비유로 재탄생하는 시어이며, 곧 상실을 목격하는 윤회의 눈이 시에 있다는 것이다. 바로 다음 구절 ‘남는 것은 / 모래밭의 낙서처럼 / 지워지는 / 시 몇 줄’에서 알 수 있다. 이 구절에서는 ‘남다’라는 단어와 ‘지워진다’는 대립적 단어를 동시에 사용했다. 파도에 휩쓸려 사라지겠지만, 그럼에도 다시 윤회해 어딘가에 남아있을 거라는 믿음이 반영되어 있다. 주어진 예언을 신뢰하지 않고 시를 써 내려가겠다는, 그렇게 형태 없이 여러 시적 표현으로 시는, 화자는, 진은영은 윤회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에 ‘사랑’ 이라는 이름을 붙여 정의한다.


끊임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현재에 머무르며 미래를 과거로 보내고 있다. 그리고 순간마다 행복하고 기쁜 순간을, 때론 쓰라리고 아픈 순간을 보내기도 한다. ‘순간’에는 정해진 운명이 없다. 상처에 꽃잎이 덮이기도 하고, 또 그 위로 세찬 비가 내리기도 하니까. 알 수도, 바꿀 수도 없기에 과거와 미래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대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현재의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진은영 시인의 말을 빌린다면, 현재에 존재함을 느끼고 목격한 것을 유심히 바라보는 것. 그렇게 현재를 사랑한다면, 우리가 보낸 무수한 것들이 기존과는 전혀 다른 모양, 향기, 맛으로 윤회해 미래에서 기다리지 않을까? 올랜도가 다양한 시어로 윤회한 것처럼, 자유롭게 말이다.

 

 

[박정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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