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그녀가 내게로 와 빛이 되었다 - 정:지 연출가전 페스티벌 [공연]

글 입력 2023.06.21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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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매일 상상하던 여인을 만났습니다. 모두가 내 곁을 떠나 외롭게 남겨두었다는 생각이 들 때 그녀가 제 삶에 찾아왔습니다. 우연처럼 만난 그녀와 함께한 시간은 큰 기쁨이었습니다. 나는 그녀의 눈물과 웃음을 모두 보았습니다. 무엇이 그녀를 그리 슬피 울게 했을까요? 무엇이 크게 웃게 했을까요?


나는 몽상가입니다. 환히 빛나던 그녀의 아름다움이 나의 밤을 밝게 비추었습니다. 저는 그날의 기억들이 또렷이 떠오릅니다. 네 번의 밤과 마지막 아침. 인간에게 사랑이 얼마나 빛을 되는지, 삶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지 모릅니다. 저의 이야기를 들어보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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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정:지 연출가전 페스티벌의 세 번째 순서 <하얀 밤, 그리고... 까만 아침>은 몽상가 한 사람이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네 번의 밤에 만난 여성과의 대화를 통해 그의 삶과 그녀의 삶이 드러나고 둘의 관계가 타인에서 친구에 가깝게 변화한다. 도스토옙스키의 <백야>를 연출의 생각과 색깔로 극본/각색한 작품이다.


연극을 보기로 결정했을 때도, 보는 날의 아침까지도 원작 <백야>를 전혀 알지 못한 상태였다. 소개에 쓰여있는 시놉시스를 읽어봐도 내용이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았다. '군중을 떠돌며 고독을 느끼는 한 남자가 위험에 처한 한 여자를 마주하게 되고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4번의 백야가 지나갈 동안 그들은 4번의 만남을 하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 놓는데...'


사랑 이야기라는 사실만 안 채로 본 연극은 방에 누워있는 주인공 '나'로 시작되었다. 연극은 '나'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친애하는 독자를 부르며 자신의 이야기를 쉼 없이 이어나가는 '나'는 연극이 끝날 때까지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연극이 끝날 즈음에는 나와 닮아 있는 '나'를 발견하는 듯했다. 사랑은 모두에게 어렵고 사랑으로 인해 환하게 빛나는 시간이 있고 창백하게 야윈 시간도 있기 때문이다.


홀로 등장해서 홀로 퇴장하는 주인공이 있는 무대를 바라보며 그가 겪는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함께 타는 관객이지만, 한편으로는 주인공이 사랑하는 대상 '나스텐카'의 마음을 생각하는 시간을 갖기도 한다. 그녀는 1년 전에 만나 사랑에 빠진 세입자와 1년 후 그에 대한 이야기를 솔직하게 나누며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 ‘나’를 모두 사랑하게 된다.


두 사람을 사랑하고 두 사람의 사랑을 받는 나스텐카를 보며 나라면 그녀의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했을까 생각했다. 1년 전 할머니 곁을 떠나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신에게 먼저 친절을 베풀고, 그 상황에서 벗어나게 만들어줄지도 모르는 세입자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가운데 홀로 불안해하고 있던 마음을 꺼내 말할 수 있는 ‘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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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자면 연극을 본 뒤 친구와 대화를 나누며 내가 나스텐카의 상황이라면 그 순간에는 두 사람 모두 선택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세입자와 나스텐카의 관계가 어떠한지는 오직 나스텐카를 통해 한 번 전해지는데, 두 사람의 마지막 대화가 나스텐카와 '나'의 대화처럼 편안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스텐카의 적극적인 모습에 세입자가 생각할 시간을 원했던 것이라고 느껴지기도 했다.


'나'와의 관계에서 첫 만남에 눈물을 흘리는 감정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이어진 4일 밤의 대화들을 통해 서로에게 솔직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는 주요한 전제가 있다. '나'가 나스텐카를 사랑하지 않는 조건에서 이어갈 수 있는 관계인 것이다. 느껴서는 안되는 감정의 존재는 오히려 그 감정을 부각시키는 모순적인 역할을 한다. 사랑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그럴수록 그녀를 기다리는 시간이 괴롭다.


 

당신이 흐느끼는 소리를 듣고도 모르는 척 그냥 지나칠 수가 없더군요...... 심장이 죄어드는 것 같아서...... 오, 세상에! 내가 정말 당신을 걱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을까요? 정말 당신에게 형제 같은 연민을 느낀 것이 죄가 되는 일일까요......?


우리가 만나는 데는 조건이 하나 있어요. 첫째 저를 사랑하시면 안 돼요......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그건 절대 안 돼요. 대신 친구는 얼마든지 좋아요. 사랑만은 안 돼, 부탁이에요!

 

 

몽상가인 '나'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그의 집에서 일하고 있는 '마트료나'를 제외하고는 누구와도 인간관계를 맺지 않은 '나'는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나스텐카의 생각으로 가득하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기쁨이 가득하지만 그 사랑이 오직 줄 수밖에 없는 사랑이라면 메말라 버릴 것 같은 불행을 경험하기도 한다. 게다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끝을 잡은 사람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나'는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사랑을 자신이 고백하면 그녀와 더 이상 만나지 못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용기 내어 마음을 전한다. 처음 만남 때는 지난 세입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만남의 조건을 걸었지만, 1년이 지나고 정작 그가 약속한 시간에 등장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나스텐카의 마음속 세입자와의 약속도 흐릿해졌다. 그것이 '나'의 고백에 긍정적으로 반응한 이유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나'를 선택하지 않았고 두 사람의 만남은 강렬하게 빛나는 네 번의 밤으로만 남았다. 우리는 매일 24시간의 시간을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지만 지금 보내는 시간이 이후에 만나게 될 상황에 직접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나'와 나스텐카의 삶이 네 번의 밤에 겹쳐지며 강한 기억으로 남겠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이후 이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불꽃처럼 의미 있게 존재했지만 이제는 시간이 지나 힘이 없는 흐릿한 시간이 되어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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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을 보면서 영화가 떠올랐다. 세입자를 사랑한 나스텐카와 약속된 시간에 나타나지 않은 세입자의 관계는 <가재가 노래하는 곳>을 생각나게 했다. 연극처럼 책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에 등장하는 '테이트'는 나스텐카를 떠올리게 하는 주인공 '카야'와의 약속을 어기고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연극에서처럼 테이트는 약속된 시간보다는 늦지만 다시 오겠다는 말을 지키지만 카야는 그에게 매몰차게 대응한다.


물론 구체적인 관계의 차이는 존재한다. 나스텐카가 들려준 두 사람의 관계는 나스텐카가 더 세입자를 좋아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둘 사이에 정서적 교감이 적었던 반면, 카야와 테이트는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연인과 같은 사이였다. 자신을 잠시 떠난 상대를 기다리는 마음은 같았을지 몰라도 카야는 관계가 깊었던 만큼 더 돌아올 상대에 대한 기대가 높았다. 나스텐카는 기대보다는 바람에 가까웠을 것이다.


기대가 꺾였을 때와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그 중에 무엇이 더 괴롭다고 비교할 수 없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상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다렸기 때문에 사랑의 아픔을 경험했을 것이다. 관객은 세입자가 어떤 사람인지 오직 나스텐카의 말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은 좋은 모습이 더 부각되어 보이는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극 속에서 그려진 세입자가 나에게는 따뜻한 사람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나스텐카와 카야는 결국 상대를 받아들이는 결정을 내렸다. 카야는 테이트의 진심 어린 사과와 대화를 통해 그의 잘못을 용서했고, 나스텐카는 '나'를 사랑한다고 고백했다가 말을 거둔 상황에 편지로 사과하며 세입자를 받아들였다. 나스텐카와 세입자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고 갔는지 '나'에게 전한 편지에 적혀있지 않았지만, 그가 약속을 저버린 것을 용서한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은 곧 결혼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대의 하늘이 맑게 개기를, 그대의 사랑스러운 미소가 언제까지나 밝고 평화롭기를, 기쁨과 행복의 순간에 그대 위에 축복이 넘치기를! 그대는 감사함으로 가득 찬 어떤 이의 외로운 가슴에 기쁨과 행복의 순간을 안겨주었으므로.

 

연극 <하얀 밤, 그리고... 까만 아침>을 본 뒤 원작을 찾아보면서 책을 원작으로 한 다른 작품, 이탈리아의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의 1957년 <백야>를 알게 되었다. 당시에 베니스 영화제 은 사자상을 수상했으며, 이탈리아의 국민 배우라 평가받는 전설적인 배우 마르첼로 마스트로야니가 출연한 작품이다. '나'와 나스텐카의 만남과 두 사람의 대화가 주를 이루는 것은 원작을 따르지만 몇몇 차이점을 보였다.

 

먼저 영화에서는 '나'에게 이름을 붙여주었다. 영화 속에서 '나'는 '마리오'이다. 이름이 있으면 관객들이 영화의 감상을 말하고, 내용을 정리하기 편하다. 이야기를 들은 주체와 이야기 속 주인공이 다른 사람으로 받아들이기 쉽기 때문이다. 타인인 그의 행동의 이유를 분명하게 알 수 없어서 나의 시선으로 제한하여 말할 수 있다. 연극은 단순히 '나'의 이름을 붙이지 않는 장치를 통해 관객이 그 인물에 이입하게 만들었다.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은 <백야>의 결말을 바꾸었다. 아직 영화를 직접 보지 못해서 최종 결말을 알지 못하지만, 영화를 검색했을 때 나오는 기본 정보에 따르면 '나'가 나스텐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인해 원작과 다른 선택을 내리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것이 두 사람 관계에 어떤 영향을 줄지 궁금하다. 

 

이야기의 끝을 바꾸는 것은 원작을 각색하는 묘미가 되기도 한다. 모든 독자가 작가의 뜻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변화를 주고 싶어 하는 독자들도 존재한다. 내가 원작 <백야>를 영화로 연출한다면 나스텐카가 두 사람 누구도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결말을 만들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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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상가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나의 글도 몽상으로 가득해졌다. 2인극을 보는 게 처음이 아니지만 두 몽상가의 만남은 내 머릿속에 찬찬히 정리되지 않고 생각이 꼬리를 무는 것의 연속이었다. 연극이 끝나고 함께 본 친구와 감상을 나누면서도 정리되지 않은 채 우선 생각나는 순서대로 발화됨을 느꼈다. 말은 일정한 흐름 없이 이어져도 이전의 내용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어색함을 덜 느끼지만 글은 다르다.


원작 <백야>의 이야기를 그대로 따라가는 이번 연극의 감상을 나름대로 정리해서 전달하고자 빈 문서에 생각을 가득 적어내려가기도 하고, 손으로 노트에 핵심 내용으로 정리하기도 했으나 새로운 생각들이 등장할 뿐 가지런히 정돈되지 않음을 느꼈다. 리뷰를 마무리하면서 글로 감상을 정리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내 글의 부족함인 동시에 <백야> 이야기가 지닌 본연의 특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몽상가라고 소개하는 사람이 이야기에 끝에 다다라서는 특별함보다는 평범함을 지닌 존재로, 나와 닮은 존재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그를 통해 나의 모습을 다시 바로 보게 되었다. 그의 몽상이 어떤 마음에서 비롯되었는지 파악되기도 한다. 또 이야기가 중점적으로 다루는 사랑의 소재는 모든 관객과 독자가 자신의 경험을 비추어 볼 수 있는 가장 대중적이고 자신에게 솔직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정리한다는 것은 어쩌면 평생을 걸쳐 이루어지는 나라는 사람이 느끼는 감정과 생각을 정리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 어떤 현명한 사람도 사랑 앞에서는 어리석은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나'와 나스텐카의 모습 중에 의아함을 느꼈던 것들은 사랑의 강력한 힘을 떠올리며 이해할 수 있는 모습이다. 사랑은 논리적이고 일관적이지 않지만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사랑을 하며 나의 이해되지 않는 행동들을 발견할 때 다시 이 연극을 떠올릴 것 같다. 언젠가 나스텐카의 선택을 이해하는 날이 올지 기대된다. 고전은 시간이 지나도록 꾸준히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작품이니 그날이 분명 올 것이라고 믿는다. 마지막으로 '나'의 까만 아침이 길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다. 처음 아픈 사랑을 했으니 다음은 더 밝은 날들이 지속되길 그대 위에 축복이 넘치기를! 


 

[정서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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