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나의 자랑스러운 영수증

이 일기는 런던에서부터 시작되어..
글 입력 2023.06.14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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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12. 오후 5시 26분

 

오늘은 눈이 잘 쌓이지 않는 런던에서, 하얀 눈이 펑펑 내리던 날이다. 오래된 보일러는 하필 오늘! 수명을 다했고, 며칠 동안 물을 끓여서 씻어야 했다. 추위에 오들오들 떨면서도 ‘그래, 물이라도 나와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며 자연스럽게 모든 냄비를 가져다가 물을 끓이는 내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가끔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겨도 큰 호들갑을 떨지 않게 되는 순간, 어쩌면 어떤 성장의 포인트들은 나도 모르는 새 스쳐 간다는 걸, 쌓이는 눈처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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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 문단은 첫 자취를 시작하며, 나에게 쓴 글이다. 성장의 포인트는 흐릿해 보이는 듯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나름 풍부한 경험치가 되는 듯싶다. 특히 혼자가 즐거워질 때, 나를 잘 알아갈 수 있을 때, 타인의 마음도 헤아릴 수 있는 여유가 생기니 말이다. 누군가 외로움이라고 부르는 감정은 나에게 힘이라고, 이젠 답해줄 수 있을 듯하다. 읽는 재미가 생겨 과거 나를 이룬 습관을 돌아보려 다시 일기를 더 읽어봤다.

 

*

 

2022. 12. 14.

 

방 안에서도 두툼한 양말과 슬리퍼를 신고, 아침엔 달콤한 초콜릿 잼이 안에 들어있는 시리얼을 우유와 함께 거의 마시다시피 먹는다. 겨울엔 4시만 지나도 지는 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루를 일찍 시작하는 것에 익숙해지며, 비가 올 걸 알아도 우산은 구태여 챙기지 않는다.

 

이 모든 습관이 형성된 곳은 런던이다. 마치 머피의 법칙처럼 비가 퍼붓듯이 오더라도 우산을 사면 바로 그치던 장난 같던 순간이나 거리에서 파는 우산을 샀다가 바람에 꺾여 그저 일회용 우산이 되었다는 에피소드들이 모여, 나만의 허술한 법칙이 세워지게 된다. 더 많은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적어도 이주에 한 번씩 장을 보고, 한 주에 한 번은 화장실 청소를 한다. 가끔 감기 기운이 있으면 알약보다 ‘Lemsip’을 물에 타 먹는다. 식당에 가는 건 좋지만,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 주로 요리해 먹는다. 가끔은 냉장고의 재료가 상하기 전에 새로운 요리를 고안해 보기도 하는, 배보다 배꼽이 더 큰 법칙도 있다.


자취를 하며 다이어리 방식도 이전과 바뀌었다. 그저 중요한 일정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쓰는 게 다였던 것에서, 이제는 때로 적기 싫은 게으름까지 기록한다. 몇 시에 잤는지, 무슨 꿈을 꾸었는지, 숙면 시간은 얼마나 되는지, 그날의 식단까지 목록마다 한 줄씩 적다 보면, 어느새 저녁엔 한 페이지가 빼곡히 채워진다. 할 일과 더불어 날 것의 감정과 생각을, 내가 나의 관찰자가 되어 기록한다. 이렇게 한 달이 지나면 어느새 서른 페이지가 가득 차고, 노트엔 손때가 묻어 빳빳함이 사라진다. 


종종 새로운 환기가 필요할 땐, 애착 중고 서점을 찾는 것도 나의 법칙 중 하나이다. 중고 책들은 새 책과 다르게 누군가 이미 읽은 사랑스러운 흠들이 있다. 펼칠 때 굳이 힘을 들이지 않아도 쉬이 잘 펴지고, 종이의 색은 전부 노랗게 바랜 것들이 그 흔적들이다. 특히 누군가 메모를 남긴 쪽지를 발견할 땐 새 책을 읽을 때보다 훨씬 큰 애정을 느끼게 된다. 


‘Any Amount of Books’ - 큰 도시 런던에서 아주 오래되고 작은 서점의 이름이다. 마치 마트의 시식코너처럼 서점 문 앞엔 저렴한 가격에 책을 구매할 수 있도록 해놓아서, 그저 지나칠 수만은 없다. ‘아직 배는 안 고프지만, 맛만 보자...’라는 심정으로 들어갔다가, 한 권씩 쥐고 나오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 이 서점에서 신중히 고른 책은 저녁에 마실 티와 함께 맛보거나 오고 가는 기차에서 읽는다.

 

사실 이런 법칙들을 처음부터 예정하고 뚝딱 미리 만들 수는 없다. MBTI 검사를 하면 높은 확률로 늘 J가 나오는 내게, 언제나 ‘계획’은 미리 정해지는 항목이었다. 하지만 삶의 계획이나 법칙은 데이터베이스가 충분할 때 형성될 수 있다는 걸 곱씹는다. 따분하게 읽힐 수 있는 이 글에도 나의 작은 법칙들을 몇 자 적어 보는 것은 자꾸만 모서리로 가려는 나를 중심으로 가져오기 위함이다.


모서리의 작은 나를 다독여 주며, 조금씩 성장하며 삶을 즐기는 것,

 

종종 읽게 될 이 글을 비빌 언덕 삼아 편지처럼 부쳐본다. -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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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위에 쓴 글자들을 키보드 위에서 옮기다 보니, 생각보다 든든한 마음이 들었다.

 

아래는 김지수 작가의 “고난은 어떻게 탁월함의 친구가 되었나”라는 기사 중 일부로, 나의 비빌 언덕엔 마땅한 근거를 제시해 주고 있다.


 

「내가 도리스 메르틴 박사에게 재확인하듯 ‘탁월함은 재능인가? 성실인가?’를 물었을 때 그의 대답은 명쾌했다. “탁월함의 시작은 호기심, 과정은 성실이다. 성실을 시스템화한 것이 좋은 습관이다. 우리의 일상을 잘라보면, 삶에서 이루는 것은 많은 소소한 습관들의 영수증이다. 당신이 반복하는 행동이 바로 당신 자신이다.”」

 

출처 : 김지수 작가, [전문기자 칼럼] "고난은 어떻게 탁월함의 친구가 되었나"

조선비즈, 2022.04.20. 07:00

 

 

습관이 나를 이룬다는 이야기, 그것이 탁월함을 향해간다는 사실은 현재 분산된 마음을 다시 모아주며 정교하게 만들어 준다. 나아갈 수 있다는 것에 일상의 감사함을 느끼며, 다시 나를 나답게 유지해 주는 습관을 가다듬어 본다.



* 인용 기사

김지수 작가, [전문기자 칼럼] "고난은 어떻게 탁월함의 친구가 되었나", 조선비즈, 2022.04.2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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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은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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