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대단한 무언가가 아니어도 좋아 - 연극 보존과학자

보존은 있는 그대로를 남기는 것
글 입력 2023.06.11 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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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존과학자>는 ‘보존’이라는 큰 주제 속에 여러 인물의 이야기가 액자처럼 걸려 있는 연극이다. 나는 이렇게 여러 이야기가 뒤섞인 극들을 유독 어려워한다. 한 인물의 이야기가 나를 사로잡은 순간 다른 이야기들의 흐름을 따라가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이 극은 한 점으로 수렴한다. ‘끝’으로. <보존과학자>는 이야기의 끝에 관한 연극이다.

 

 

[국립극단]보존과학자_포스터s.jpg

    

 

 

보존될 자격


 

보존과학자 1은 끊임없이 질문받는다. “수많은 예술작품 중에서 당신이 복구하여 보존하고자 하는 이 오래된 기계가 한정된 자원을 쓸 만큼의 가치를 지니는가?”

 

자원 전문가들의 물음은 날카롭고도 냉정하다. 언뜻 합리적이기까지 하다. 심적 궁지에 몰린 보존과학자 1은 어떻게든 오래된 기계, 텔레비전을 복구하여 자기 행동에 가치가 있음을 증명하려 애쓴다.

 

냉정한 물음은 우리도 품을 수 있다. 왜 텔레비전인가? 다른 위대한 예술품일 수는 없었나? 보존과학자 1이 선보일 기획 전시의 메인이 굳이 ‘미디어 아트’일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이렇듯 보존은 언제나 선별의 과정이다. 비단 유물 보존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기록과 감정, 즉 우리가 지나온 모든 것들이 언제나 선별의 과정을 거쳐 남겨져 왔다. 끊임없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 것들만이 살아남아 보존됐다. "무엇을 보존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사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의 문제이다.

 

백남준의 작품을, 나아가 작가 ‘백남준’을 복원함으로써 선택의 가치와 정당성을 증명하려는 보존과학자 1의 모습은 어떻게든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으려 스스로 불타오르는 현대인의 모습과 많이 닮았다.

 

내 선택의 효용이 그 기회비용보다 크다는 것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사회. 우리가 인정받고 증명되어 보존되려 애쓰는 건 사실 매 순간 소멸의 두려움에 떠는 것과 다름이 없다.

 

 

[국립극단]보존과학자_홍보사진03.jpg

    

 

 

보존이 뭔데?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하지 않겠어?’ ‘그 활동이 너에게 도움이 되니?’ ‘왜 쓸데없는 일에 네 시간을 투자하는 거야?’ 나를 향해 쏟아지는 냉정한 질문들 틈새로, 바보스러운 의문을 하나 가져보았다.

 

보존이 뭔데?

 

연극을 보고 온 후, 잠시 줄거리를 곱씹고 난 후부터 계속해서 보존에 관해 생각했다. 보존이라는 건 나를 남기는 행위인가, 나의 가치를 남기는 행위인가? 나를 남김으로써 나의 가치 또한 남길 수 있나? 나는 누구를 위해 보존되는가? 우리는 왜 보존하는가? 보존함으로써 우리가 얻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보존하는 이유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답을 내렸다. 우리는 흔적을 찾는 것이다. *어딘가, 무언가, 누군가 있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 흔적 속에서 자신의 미래를 들여다볼 수 있도록 말이다. 삶 속에서는 종종 나 자신에게 확신을 줄 무언가가 필요한데, 우리는 무언갈 보존함으로써 그걸 얻는 것 같다. 누군가 남겨놓은 흔적을 보고 내게 필요한 가치를 찾아가는 것이다.

 

*프로그램 북 뒤표지에 적힌 “어딘가, 무언가, 누군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의 패러프레이징

 

 

[국립극단]보존과학자_홍보사진05.jpg

 

 

 

대단한 무언가가 아닌


 

그러나 아직 내가 보존되어야 하는 이유는 잘 모르겠다. 조금 더 나은 존재로서 이 세상에 남아야 한다는 건 어렵고도 어이없는 일이다. 어차피 모든 것은 소멸하고, 어떠한 형태로든 부활하지 않는가? 혁명으로 사라진 신분제가 재산에 따른 계급으로 부활하고 중세 시대에 끝났던 ‘내’가 르네상스로 부활한 것처럼, 일견 사라진 듯 보이는 무언가도 언젠가는 또 다른 형태로 다시 나타날 것이다.

 

나와 비슷한 사람은 천 년 전에도, 백 년 전에도, 심지어 십 년 전에도 있었을 것이다. 아마 앞으로 십 년, 백 년, 천 년, 아니 만 년 후에도 나와 비슷한 사람은 존재하겠지. 그렇게 과거의 누군가와 비슷한 사람들로 가득 찬 것이 지금의 세상일 테다.

 

그러므로 나는 우리가 반드시 대단한 무언가가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세 자매처럼, 보존과학자 1처럼 무언가를 이루려 발버둥 치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한 자락의 이야기가 되면 된다. 문을 넘지 못한 이야기여도 좋다. ‘보존할 가치가 없다’라는 소리를 들어도 기죽을 필요 없다.

 

이제야 연극이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인지 조금 알 것 같다.

 

 

[국립극단]보존과학자_홍보사진10.jpg

   

 

 

나 자신을 보존하기


 

극의 끝맺음이 생각났다. 세 자매의 아버지는 백남준이 아니었다. 세 자매가 남긴 것은 예술품의 일부인 텔레비전이 아니라, 그들의 아버지였다. 그리고, 그래도 괜찮았다. 왜냐하면 애당초 보존은 ‘더 나은 형태로 남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것을 남겨두어 계속되게 하는 것이니까.

 

내가 해야 하는 것은 복원이 아니다. 이미 있는 현재의 나를 ‘원형에 가깝게,’ 내가 생각하는 이상에 가깝게 덧댈 필요가 없다. 연극 속 둘째가 아버지의 텔레비전을 보존할 때, 기계가 아닌 ‘아버지’를 보존한다 생각하지 않았으리라 믿는다. 그는 아버지를 복원하려 하지 않는다.

 

보존은 **잘 보호하고 감수하여 남기는 것이지, 의미를 더하여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 연극의 제목은 <보존과학자>이지 <복원과학자>가 아니다. <보존과학자>는 우리의 시작이 아닌 끝을 바라본다. **출처: 표준국어대사전

 

그러므로 나 또한 있는 그대로의 끝을 상상한다. 나 자신을 보존하는 상상을 한다. 훗날 남겨질 누군가에게 아주 작디작은 확신이 될, 있는 그대로의 나를.

 

 

[국립극단]보존과학자_홍보사진06.jpg

 

 

[박주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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