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취하거나 죽이거나, 1920년대 미국 그 자체였던 죄인들 - 뮤지컬 시카고 오리지널 내한 공연

글 입력 2023.06.11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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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미국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시카고>, <쓰릴미>, <위대한 개츠비>, <바빌론>…. 이 작품들의 공통점은 뭘까? 바로 1920년대 미국이 배경이라는 것이다. 2023년 6월 3일, 블루스퀘어 신한카드홀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뮤지컬 <시카고>의 내한 공연을 즐기던 나는 192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이 직접적으로 묘사되는 것을 보고 이런 의문이 들었다.

 

‘대체 1920년대 미국은 무슨 세상이었던 거지?’

 

<쓰릴미>는 1924년 미국 전역을 들썩이게 했던 레오폴드-로엡 사건을 모티프로 한 뮤지컬로, 네이슨 레오폴드와 리차드 로엡이라는 두 청년이 아이를 유괴하고 살인한 내용을 다뤘다. <위대한 개츠비>는 성공 지향적인 남자 개츠비의 허무한 일생을 다룬 소설이고, <바빌론>은 무성영화가 사라지고 유성영화가 등장하는 과도기에 영화가 인생의 전부였던 이들을 다룬 영화다. 그리고 <시카고>는 저마다의 이유로 살인을 저지르고 쿡 카운티 교도소에 수감된 여자들이 무죄 판결을 받기 위해 사투하는 과정을 다룬 뮤지컬이다.

 

대략적인 줄거리만 놓고 보면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작품들을 고작 시대 배경이 같다는 이유로 묶는 건 억지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단순히 시대만 같았다면 내가 이렇게까지 장황하게 여러 작품을 열거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유독 ‘1920년대 미국’이라는 배경에 예민하게 반응했던 이유는 공교롭게도 내가 인상적으로 본 1920년대 미국 배경의 작품들이 ‘향락’과 ‘살인’, 둘 중 한 가지 테마는 꼭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쓰릴미>는 처음부터 유명한 실제 살인 사건을 모티프로 삼고 있고,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는 성대한 파티의 호스트로 유명하다. <바빌론>의 영화인들은 매일 영화 촬영을 마치면 밤새 선정적인 파티를 즐긴다. 그리고 <시카고>는 ‘향락’과 ‘살인’. 두 가지 테마를 동시에 그리며 살인도 엔터테인먼트 요소로 치부되는 극단적인 시대상을 보여준다.

 

내가 본 그들은 난잡한 파티에 취하거나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죽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대체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극단적으로 만든 걸까? 어쩌면 그들 개인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특별히 별났기 때문에 이야기로 창작된 것이고, 대다수는 평범한 일상을 영위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피도 눈물도 없는 <시카고>의 세계관은 계속해서 1920년대 미국이 얼마나 기이했는지 생각하게 한다. 대체 그 시대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유럽은 완전히 초토화되었다. 독일, 오스트리아와 같은 패전국은 말할 것도 없고 영국, 프랑스와 같은 승전국들 역시 국가를 재건하는 데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 경제에 큰 타격을 입었다. 이렇게 유럽 국가들이 신음하는 사이 본토에 타격을 입지 않은 미국은 부지런히 경제를 발전시켰고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비약적인 성장에 따라 미국은 전례 없는 경제 호황을 누렸는데, 그 결과로 영화와 라디오, 패션 등 문화산업 전반이 화려하게 발전했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반드시 그림자도 따르는 법. 시장의 자유는 강화되었지만, 금주법이 시행되고 밀주 사업으로 돈을 버는 마피아들이 성행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인종차별과 외국인 혐오가 심해졌고, 백인우월주의 집단 KKK단이 활동하기도 했다. 눈부신 경제 성장 뒤에는 빈부격차, 생산의 자동화로 인한 실업 문제, 수요를 넘어서는 과잉 생산 등이 잇따랐다. 반짝 빛났던 1920년대는 대공황이라는 최악의 경기 침체를 맞으며 막을 내렸다.

 

1920년대 미국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위태로움’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유럽 국가들이 몰락한 사이 급격하게 성장했으니 그 기반이 결코 단단할 리가 없다. 당시 미국은 장기적인 계획 대신 순간의 기쁨에 도취했다. 갑작스러운 번영에 흥분한 사람들은 광란의 파티를 열고, 각종 사회문제의 등장은 사람들의 윤리 의식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예술은 우리가 현실에서 볼 수 없는 사람과 세상을 보여준다. 취하거나 죽이거나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극단적인 인물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 내가 위에서 열거한 작품들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 중 하나다.


 

 

화려해서 더 차가운 <시카고>의 세계


 

2023 뮤지컬 시카고 오리지널 내한 공연_포스터.jpg

 

 

서론이 길었다. 내가 이 글에서 본격적으로 다룰 작품은 단연 뮤지컬 <시카고>다. 애초에 ‘1920년대 미국’이라는 주제 자체에 흥미를 느낀 이유가 며칠 전 이뤄진 <시카고> 관람이었으니 말이다.

 

내가 처음 본 <시카고>는 2003년에 개봉한 르네 젤위거와 캐서린 제타 존스 주연의 영화였다. 영화를 보고 화려하면서도 냉소적인 분위기에 매료된 나는 오랫동안 <시카고>를 ‘제일 좋아하는 뮤지컬 영화’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2021년에는 두 눈으로 직접 정식 한국판 공연을 보았고, 이번에 드디어 오리지널 내한 공연을 보았다. 어쩌다 보니 쿡 카운티 교도소의 못 말리는 죄수들을 영화, 한국어 공연, 원어 공연 총 세 가지 버전으로 접한 것이다.

 

<시카고>의 주요 인물은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벨마 켈리와 록시 하트, 세 치 혀로 그들이 무죄 선고를 받게 도와주는 변호사 빌리 플린이다. <시카고>는 첫 장면부터 ‘살인도 엔터테인먼트’라는 주제에 충실하다. 매혹적인 음색으로 ‘All That Jazz’를 부르는 벨마와 함께 록시가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모습이 교차해 묘사되는데, 이때 관객들은 누군가가 살인을 저지르는 모습을 흥겨운 재즈에 심취하면서 지켜보게 된다.

 

<위대한 개츠비>에서는 개츠비의 파티가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그의 내면이 얼마나 공허한지가 드러난다. 그와 마찬가지로 <시카고>에서는 그들의 춤과 노래가 신나면 신날수록 당대 사회상에 대한 신랄한 풍자가 느껴진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카고>의 넘버는 단연 여자 죄수들이 자신들의 살인을 합리화하는 내용의 ‘Cell Block Tango’다. 영화로 처음 이 넘버를 접하고 완전히 매료되어 몇 달 동안 같은 영상을 돌려본 기억이 난다. 그들이 밝히는 살인 동기는 당연히 면죄부가 되지 못한다. 어떤 이유는 납득되기도 하지만, 어떤 이유는 터무니없게 들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들이 후렴구마다 내뱉는 ‘He had it comin’(죽어도 싸지)’이라는 말은 묘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분명 살인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임이 분명한데도 무대를 즐기다 보면 그러한 죄의식도 ‘Cell Block Tango’의 흥겨운 리듬을 타고 사라진다.

 

‘살인도 엔터테인먼트인 시대’라는 말에 걸맞게 <시카고>는 유독 관객들에게 ‘이것은 쇼다.’라는 인식을 꾸준히 심어준다. 넘버가 시작될 때마다 ‘이제부터 ○○의 쇼를 보여줍니다.’라는 사회자의 소개가 삽입되는 방식으로 무대와 관객 사이의 제4의 벽을 넘나든다. 제4의 벽이 허물면 관객은 오히려 무대에서 벌어지는 일에 덜 이입하고, 더욱 거리감을 느끼게 된다. <시카고>가 살인을 소재로 다룸에도 불구하고 누구든 재밌는 오락으로 즐길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반복해 관람하다 보니 또 새로운 포인트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의상이었다. 주연 배우들은 물론 앙상블까지 역할 대부분이 검은색의 화려한 노출이 돋보이는 의상을 입는다. 그나마 록시의 남편 아모스와 변호사 빌리만이 점잖은 의상을 입을 뿐이다. 그 외에는 쿡 카운티 교도소의 죄수들은 물론이고 간수 마마, 판사, 기자, 의사 등 직업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선정적인 옷을 입고 있다.

 

처음에는 극의 화려한 볼거리 중 한 가지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의상과 직업 사이의 괴리감이 이 작품의 냉소적인 주제 의식을 상징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업과 상관없이 화려한 무대의상을 입은 그들이 직업윤리는 저버리고 세속적인 욕망에 휘둘리는 인간상을 나타내는 듯했다.

 

교도소를 배경으로 한 다른 작품들을 떠올려 보면 보통 죄수복은 몸매가 전혀 드러나지 않도록 제작되었다. 그러나 <시카고>의 죄수복은 몸매가 드러나는 것은 물론 저마다 디자인도 다르다. <시카고>의 죄수들이 다른 작품의 죄수와 다른 점은 무엇일까? 다른 죄수들은 그들이 저지른 죄로 평가받지만, <시카고>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당길 만큼 얼마나 자극적인 사연을 가졌는지에 따라 평가된다. 쿡 카운티 교도소의 세계관에선 재판은 죄수들이 펼치는 퍼포먼스에 불과하다. 배심원과 판사는 죄질이 아닌 퍼포먼스의 완성도를 기준으로 판단한다.

 

선(善)은 권장하고 악(惡)은 벌하는 ‘권선징악’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큰 사랑을 받아왔다. 그러나 현실에서 권선징악의 원리는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 선악만을 기준으로 운명이 결정되기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훨씬 복잡하고 냉정하다. <시카고>는 그러한 현실을 화려한 쇼를 통해 신랄하게 풍자하며 화려할수록 더욱 차가운 세계를 구축했다. 어쩌면 1920년대 미국은 그 자체로 거대한 쇼였을지도 모르겠다.

 

 

 

25주년 기념 내한 공연의 특별한 점


 

외국어로 진행되는 공연을 몇 번 보다 보니 외국어 공연은 뭐니 뭐니해도 자막이 제일 중요하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아무리 스토리가 재미있고 배우들이 열연을 펼쳐도 자막이 이를 효과적으로 전달하지 않으면 관객은 혼란스럽기만 할 뿐이다. 이번 <시카고> 내한 공연의 자막은 관람에 방해되지 않는 것을 넘어 극에 재미를 불어넣기까지 했다.

 

몇 번의 경험 덕분에 자막을 보며 공연을 관람하는 게 익숙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시선이 분산되어 조금 불편한 것도 사실이다. 처음에는 그저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막을 확인했지만, 점점 자막도 공연의 수많은 볼거리 중 하나로 인식하게 되었다. 대사나 노래 가사에서 특별히 강조하는 단어나 비속어가 나오면 글씨체를 다르게 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말은 글보다 생생하다. 공연이든 영화든 모국어가 아닌 언어의 작품을 접하면 관객은 번역가에 의해 정제된 글로 작품을 이해해야 한다. <시카고>는 단어마다 그에 어울리는 글씨체를 적용함으로써 글의 한계를 넘어 자막을 읽는데도 실제 배우의 말을 듣는 듯한 생동감을 부여한다.

 

 

[2023시카고내한]All That Jazz_벨마 켈리(로건 플로이드), 앙상블_컬러 (1).jpg

사진제공: 신시컴퍼니

 

 

또 인상적이었던 점은 벨마 켈리 역을 맡은 로건 플로이드 배우의 캐릭터 소화 능력이었다. <시카고>에서 벨마 캐릭터를 가장 좋아하기 때문에 더욱 중점적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개인적으로 ‘Cell Block Tango’ 다음으로 극의 포문을 여는 ‘All That Jazz’ 넘버를 아주 좋아하는데, 공연이 시작되고 ‘Come on babe, Why don’t we paint the town?’이라는 첫 소절이 들리는 순간 안정적인 목소리와 능수능란한 무대 장악력을 확인하고 이번 공연은 믿고 즐겨도 되겠다는 신뢰가 형성되었다.

 

극 내내 벨마와 대립하는 록시 하트 역의 케이트 프리든의 사랑스러운 연기 역시 아주 만족스러웠다. 록시 하트의 핵심 매력을 ‘백치미’라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냉정한 판단력은 전혀 없고, 유명해지고 싶다는 욕망에만 충실한 모습이 록시 그 자체로 느껴졌다. 오로지 돈만 중요시하는 기회주의자 변호사 빌리 플린 역의 제프 브룩스도 냉소적인 연기 톤으로 빌리 캐릭터의 이기적인 면모를 성공적으로 보여주었다. 다만 빌리의 핵심 넘버인 ‘We Both Reach For The Gun’에서 많은 이가 기대하는 복화술을 선보이지 않은 점이 의아했다. 그는 인터뷰를 통해 빌리 플린이 복화술을 쓰지 않고도 록시를 조종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연기했다고 밝혔는데, 그 의도가 효과적으로 전달되었는지는 관객들의 판단에 맡기도록 하겠다.

 

<시카고>의 공연 시간은 인터미션 시간을 포함해 무려 150분이다. 아무리 재미있는 극이라도 끝까지 처음의 집중력을 유지하며 보기에는 힘든 시간인데, <시카고>는 오히려 극이 후반부에 다다를수록 극에 더욱 몰입하며 볼 수 있었다. 이야기 자체가 계속해서 사건이 터지기도 하지만, 주연 배우들의 에너지가 끝까지 식지 않았다는 것이 결정적이었다. 1부에서는 쇼 비즈니스의 화려한 면이 두드러졌다면, 2부에서는 인물 개개인의 욕망이 더욱 입체적으로 묘사되었다.

 

 

[2023시카고내한]Roxie_록시 하트(케이티 프리덴)_컬러.jpg

사진제공: 신시컴퍼니

 

 

2년 만에 <시카고> 뮤지컬을 보고, 그와 관련된 글까지 쓰고 나니 내가 생각보다 <시카고>의 이야기를 (영화와 뮤지컬에 상관없이) 무척 좋아한다는 점을 느꼈다. <시카고>의 매력은 혼돈의 1920년대 미국을 미화하지 않는 것은 물론 패배주의에 젖어 감상적으로 다루지도 않으며 당대 사회의 특징인 ‘향락’과 ‘타락한 윤리 의식’을 결합해 독자적인 세계관을 완성했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1920년대 미국은 단순히 혼란스러운 것을 넘어 새로운 생활 양식이 탄생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위험하면서도 매력적인 당대 시대상을 간접 체험하고 싶다면 쿡 카운티 교도소의 죄수들을 만나보길 적극적으로 추천한다.

 

 

[진금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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