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배회하는 바람 - 라울 뒤피 展

내 작품에서는 배회하는 느낌이 드러난다
글 입력 2023.06.04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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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현대서울_퐁피두_뒤피_포스터1.jpg

 


5월의 마지막 일요일은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전 날 다른 에디터들과 늦도록 수다를 떤 바람에, 사몽 似夢을 헤매이는 나의 머리맡으로는 비가 내렸다. 눈을 뜨지 않은 채로, 다물어 지긋이 내리 깔은 미간 사이로 흐르는 빗소리를 들었다. 오늘은 전시회 일정이 있는 날, 나는 우천과 일정이 겹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버스를 2번 잡아타면 친절하게 '더 현대 서울' 바로 앞에 도착할 수 있다. 2가지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소란스럽지는 않지만 얄궂은 빗무리에 부대낀다. 사선으로 빗기친 까닭이다. 바짓단이 촉촉하니 젖은 채로 백화점 처마께로 들어섰다. 그건 아무래도, 어딘가 좀스러운 기분을 자아내는데 코너를 돌자마자 보이는 곳으로는 차들이 즐비했고, 발렛-보이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의 흰 셔츠 위를 가로 지나는 멜빵이 어딘가 인상 깊었다. 그들의 바쁜 몸짓 너머 가까스로 흡연구역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처마가 없었다. 여러모로 촉촉한 하루가 시작됐다. 


더 현대 서울은 4층에 꾸며 둔 정원 탓에 다시 와보고 싶은 곳이었다, 쇼핑하러 올 리야 만무하지마는. 에스컬레이터가 4층을 지나는 때부터 드러나기 시작하는 공중 정원이란 얼마든지 머물어보고 싶게 한다. 전시회는 6층, 테라스 아래의 정원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로 전시관으로 걸었다. 일전 '테레사 프레이타스 특별전'으로 구면이 된 장소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


전시 리뷰를 쓸 때마다 강조하는 내용이지만, 나는 미술에 문외한인 사람이다. 그렇다고 관람 사전에 미리 학습하지도 않는 편이다. 게으르거든. 대신하여 관람을 절실(?)하게 하는 편이다. 전시관을 2번 정도 맴돌며, 글로 쓸 영감을 찾는 데 열심인 편이다. 초대받은 입장으로서는 어떠한 형식으로든 의미를 발견해야만 하기에, 그래야 충실한 리뷰를 돌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그 과정이 관람을 더욱 유의미한 경험으로 만들어주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다. 


미술은 독립된 작품만으로는 서사적 체험에 제한이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이 작품이 어떤 배경에서 탄생했고, 무슨 사조이며, 그 사조는 어떠한 특징을 가지고, 그때 작가가 어땠고, 다른 작품과의 관계가 어떻고… 서사적인 이해는 전부 다 작품 외적인 내용들에 관계한다. 그러므로 미술 사적으로나 기법과 사조의 관점으로 접근하지 않는 한, 내게 미술은 한없이 열려있는 공간이다.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 아아- 이게 인상주의인가 뭔가 하는 그것이로군, 나이스한 붓 터치야,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이런 식으로 그림을 감상하기보다는, 공간을 경험하는 방식과 같이 그 안의 제재를 하나하나 뜯어먹어 보는 편이다. 


하나의 액자, 하나의 프레임은 각각 한 가지 공간으로 인식된다. 그것이 작품 외적으로도 공간이며, 작품 내적으로도 공간이라는 것, 공간이란 어떠한 제재가 놓여있는 실재의 단위이다. 초입, 인상주의 섹션에는 여러 점 點의 노르망디 해안이 하늘거리며 녹아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선 나는, 여러 점의 노르망디를 단일시 하기보다는, 각각 독립적인 공간처럼 간주하며 바라보고, 심상 속에 재구현한다. 그리고 개중 가장 사랑스러운 노르망디 해안만을 마음속에 담고서 발을 떼는 방식으로 전시관을 전전한다. 



La plage de Sainte-Adresse, 1904.jpg

La plage de Sainte-Adresse, 1904, Raoul Dufy

 

 

언젠가 다른 리뷰에 쓴 구절이긴 하지만, 미술은 시각적 추체험이다. 그리고 가장 사랑스러운 이미지를 발견하고서는 그로부터 나의 취향을 확인하고 적립하게 되는 과정으로, 지금은 간주하고 있다. 사조는 그 체험에 색을 입히는 하나의 경향일 테고 말이다. 인상주의에 대해서는 자주 바람의 공감각을 대입하는 편이다. 뭉개지는 색감과 모호한 경계면이 피사체들로 하여금 바람에 흔들리는 듯한 감각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해변의 사진들 앞에 서노라면, 얼굴 없이 앉아있는 사람들의 실루엣은 선선한 해풍을 맞으며 시시각각 변모하는, 흔들리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뚜렷한 테두리와 날카로운 모서리 없이 그려져 있는 피사체들의 보드라운 질감, 파스텔 색감에 더불어 뭉클한 촉감을 상기시킨다. 보드라니 따순듯 한편, 하늘과 바람, 그리고 군데군데 사람들 사이에 끼워놓은 블루는 북해로부터 불어오는 쌀쌀한 바람의 온도까지 형상화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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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tacade à Sainte-Adresse, 1902, Raoul Dufy

 

 

인상주의에 대해 지엽적으로 아는바, 이 사조는 시간과 절기에 따른 햇빛의 다름, 그로 말미암은 동일 사물의 여러 면모를 포착하는 데에 착안한 것으로 알고 있다. 위의 그림 속에는 똑같은 노르망디 해안, 일전 사람들이 서 있는 난간이 자리한 것으로 보아, 이젤을 놓아둔 장소만 조금 바뀌었을 뿐 여전히 같은 위치에서 해안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전반적인 질감이 강해진 탓에 매우 다른 풍경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윤곽이 분명해지자, 노르망디라는 공간이 또 다른 낯을 틔운다. 영국해협을 바라보고 있는 방향으로는 멀리, 바다의 서늘함과 백사장의 쨍한 빛이 대조되는 것이 인상에 남는다. 


한편, 뒤피 展에는 여러 사조가 등장한다. 인상주의, 야수파, 입체파, 뿐 아니라 도자기나 섬유와 같은 장식예술도 각각의 섹션으로 구성되어 있어 전체적인 테마의 수가 많다. 허나 앞서 말했듯, 가장 사랑스러운 이미지를 찾아 나서는 나의 여정은 모든 섹션으로부터 최소 한가지씩을 찾아내고자 강박하지는 않는다. 야수파와 입체파에서는 나를 끌어당기는 이미지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Port de Martigues, 1903.jpg

Port de Martigues, 1903, Raoul Dufy

 

 

바람과 인상주의라는 주제만으로는 본 전시회를 입체적으로 표현할 수 없을 터이고, 뒤피라는 화가에 대해 어설프게나마 전반적으로 다루어볼 수 없겠지마는, 나는 금번 전시회를 바람이라는 주제에 국한하여 관람키로 했다. 까닭인즉, 그것이 가장 내 마음속으로 다가왔기 때문도 있지만, 바람의 흩날리는 듯한 이미지가 빈번하게 등장했기 때문이다.


잘 정돈된 풍경화들이 놓여 있는 인상주의 섹션을 지나고서부터는 그의 그림에서 혼란스러움이 엿보이기 시작한다. 질서정연함, 정돈됨, 메인 테마와 뚜렷한 주제, 전하고자 하는 바의 명료함 등과 같은 것을 대신하여 카오스, 무질서함, 난립하는 주제와 상징, 불명확함으로 이루어진 그림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이것들이 습작은 아니었을지 잠깐 의심케 할 정도로, 그림에는 선과 미완성 스케치, 그리고 배경 공간과 조화로이 맞물리지 않고 표류하는 상징과 패턴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어느 섹션의 초입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예술 작품은 늘 잘 짜여진 계획에 따라 탄생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작품을 구성하는 데에 필요한 논리 정연함에 대한 열망, 

그리고 모든 예술가들에게 잠재하는 무질서와 혼란에 대한 이끌림, 

그 둘 사이의 투쟁으로부터 탄생한다고 볼 수 있다.

 


Les Cavaliers sous bois (La Famille Kessler), vers 1931–1932.jpg

Les Cavaliers sous bois (La Famille Kessler), vers 1931–1932, Raoul Dufy

 

 

작가의 일생을 따라 시간순으로 배치된 전시관을 따라 걷노라면, 그의 그림에 내재되어 있는 카오스와 투쟁의 흔적들이 어떻게 변모되어가는지 살펴보는 재미가 좋다. 그리고 위 그림에 이르러 카오스는 마침내 하나의 양식으로 완성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내 키보다 높고 양 팔 너비보다 넓은 이 그림 앞을 온전히 독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대단한 행운이 아니었을까 싶다. 


말타는 가족의 초상, 중심부에 있는 마의 주홍색을 기점으로 그림이 중심을 잡고 그 배경에서는 모든 것이 모호하게 중첩되어 있다. 말발굽이 딛고 있는 곳인 아래편 수풀로부터 출발해 위로 갈수록 바다를 연상하는 색채를 배치하고 그 위에 패턴을 혼재해 알 수 없는 혼란상태를 야기한다. 즐거운 모호함. 그림의 상단부 좌우측으로 미루어보건대 실질적인 공간 배경은 푸른 초지의 뒤편으로 바다와 지평이 자리한 것처럼 보이는데, 인물들의 머리 위를 드리운 저기 잎사귀가 머금은 색채란, 푸른 하늘인지 마땅히 가리어두었어야 할 바다인지 분명히 할 수 없다. 


주요한 오브제인 말과 인물들을 낱낱이 뜯어보노라면 윤곽선이 무작위적으로 부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맞닿은 채 뚜렷하게 구획되지 않은 여느 구성물들은, 서로 상호간섭하는 듯, 마치 고체가 녹아 액체로 용융되어 찬찬히 뒤섞이는 듯이 모호해지는가 싶다가도 구분된다. 윤곽이 흐릿하고 색채가 마구 혼재되어 있으나 표현하려는 바가 명확히 드러난다는 것은 놀랍다.

 

놀라운 시각적 체험. 앞서 인상주의 섹션에서 보고 느낀 바와 같이, 얼굴과 경계가 흐릿한 사람들의 실루엣이란 바람에 흩날리는 것처럼 위태로우면서도, 신비로운 느낌을 준다. 그리고 스케치와 윤곽이 아닌 색채가 각각의 구성물, 존재의 고유함, 즉 개성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즈음에는 이 그림에 대단한 사랑에 빠져 있었다. 해당 섹션에 허우적거리기를 한참, 빠져나온 곳으로는 다음과 같이 적히어 있다.

 

 

산책하고 탐구하면서 나는 내 그림의 본질을 찾았다. 

그래서 내 작품에서는 배회의 느낌이 드러나기도 한다. 

배회한다는 것은 비판받을 수 있는 요소이기도 하지만,

나는 형식의 정립과 적용보다는 연구와 분석을 더 선호해 왔다. 

이러한 탐구의 즐거움을 내 주변의 이들과 나누고 싶었다

 

 

배회. 그것은 바람의 속성이다. 그것은 유체의 형태를 띠는 기체가 기압을 따라 이리저리 쏘아나가는 것과 비유를 같이 한다. 배회, 그것은 계속해서 움직이는 속성을 뜻하고, 즉 정처하거나 확정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 마치 내가 사랑하는 뒤피의 그림들과 같이. 비단 이번 전시회 때문이 아니라, 평소의 나는 확정된 의미를 좋아라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운동하고 변모하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우리가 포착해 담지하는 진실이란 얼마간 착각의 소산이거나, 그러한 상태에 놓여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되 영영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그의 그림 중에서도 유독 배회하는 뉘앙스, 불확정 상태에로 마음이 쏟긴 연유가 이와 같지 않은가, 앞서 말하였듯, 전시 체험이 나의 취향을 발견하는 하나의 과정이라면, 내가 사랑하는 그의 그림 속에 이러한 일관된 연관성이 놓여있었던 것도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마지막 글귀를 뒤로하며 이러한 생각 속에 젖는다. 전시회의 하이라이트인 '전기요정'을 스윽 훔치고는 미련없이 발을 떼며, 그러한 생각이 더욱 굳어진다. 거기에는 배회보다는 상징과 의미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지. 

 

 

La Fée Electricité (partie gauche), 1937(1).jpg

La Fée Electricité (partie gauche), 1937(1), Raoul Dufy

 

 

비록 야수파와 입체파, 그 외 다른 많은 테마들은 리뷰에도, 이 두 눈에도 담아내지 못했지만, 배회하는 바람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 이번 전시는 즐거운 체험이 돼주었다. 배회, 나는 배회가 좋다. 그것은 나의 지금 일상이자 삶이요, 내 지나간 기억들에도 잔뜩 서려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 날은 비가 와, 나는 글 쓸만한 영감을 찾아 정처 없이 배회하기 어려웠지만, 다시 해가 뜨고 바람이 불고, 써내야 할 무언가 영감이 모호한 바람처럼 내 안에 이지러지는 때 나는 그래 왔듯 산책할 것이다. 그리고 여로의 어느 중간지점을 기하여서는, 마치 은근한 뒤피의 색채들이 그러했듯이, 경계도 없이 시나브로 젖어들 테지. 그 멋진 노르망디와 숲과 말 타는 가족의 초상과 뭉클함과 흔들림 같은 것들로. 

 

 

[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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