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삶에 소품을 두는 일 [문화 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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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수'라고 다들 아실지 모르겠다.
2010년대 초반, 내가 중학교를 열심히 다니던 그때쯤엔 웹툰을 보지 않는 친구를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때 봤던 작품들 중에, 네이버에서 연재되던 '치즈 인 더 트랩'이라는 웹툰은 나와 나의 친구들이 가장 먼저 챙겨 보는 '최애'였다.
그리고, 그 안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 내가 가장 싫어했던 인물이 바로 '손민수'다. 외향적이고 활발한 주인공의 옷과 머리 스타일을 따라 하는 것을 넘어, 그의 습관이나 친구들까지도 뺏으려 시도하는 음침함을 선보이는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이 인물의 캐릭터성은 대중적인 스토리 라인에 자주 등장하진 않는 독특함과 개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현실 속에 간간이 존재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닮아 있어서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누군가가 나의 옷 스타일이나 머리 스타일을 따라 하며 내가 되길 원하는 걸 상상하면 소름 끼치지만, 우리도 생각해 보면 연예인의 화장법, 누가 입어서 유명해진 옷 스타일을 따라 하며 시류에 발을 맞춰가지 않나.
그러나, 단순히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누군가를 따라 한다고 말하기엔 무리가 있다. 유행에 따라가거나 내가 좋아하는 누군가의 스타일을 흉내 내는 것이 마냥 기껍지 않다면, 사람들은 그 행위를 진즉에 그만두었을 것이다. 흉내 낸 결과물로 탄생하는 자신의 모습이 자기가 좋아하는 누군가를 닮아가는 것이 만족감을 주기 때문에 '모방'이라는 행위가 발생하고 지속되는 것이 아닐까.
각설하고, 대중들의 공감을 많이 산 이 캐릭터의 이름은, 지금까지 설명한 '모방 행위'의 별명이 되었다. 음침하고 재수 없게 만 느껴졌던 그 이름이 모방 행위에 붙으면서, 오히려 부담 없이 유명인의 옷을 따라 사고 그의 화장법을 따라 할 수 있게 되었다고나 할까. '손민수'라는 캐릭터가 가진 음침함이 팬들의 공감 속에서 희화화되었기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이 입었던 후드 티나 그가 착용했던 액세서리를 사며 '손민수 했다'라고 말하면 가볍고 유쾌하게 많은 이들과 '좋아함'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다.
말하다 보니, 손민수와 우리 사이의 공통점은 '모방'이라는 이름 뒤에 가려진 '선망'과 '선호'의 감정인 것 같다.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의 모든 것을 공유하고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손민수'와 통하는 것이다. 좋아하고 동경하기 때문에 모방하고, 당장 가지고 있는 나의 모습을 바꿔서라도 동화되고 싶은 마음. 누군가를 깊게 선호함으로 인해 나오는 힘은 지금껏 살아온 혹자의 인생을 바꿀 정도로 강하다.
과몰입하다.
몰입은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달리 말하면, 몰입할 줄 모른다면 제대로 된 삶을 영위할 수 없다.
자기 자신이 어떠한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파악하고 깊이 파고들어 실력을 길러내지 못한다면 그저 그런 잉여로 남게 될 수도 있다. 하다못해 책을 한 권 읽더라도, 그에 몰입하지 못하면 다 읽고 나서도 느낀 바가 없을 것이다. 그 행위는 그냥, 누군가에 의해 쓰인 여러 글자들을 훑어본 것 밖에 되지 않는다. 만약 책을 읽고 이렇다 할 감상이나 교훈을 얻고 싶다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줄거리는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 글을 읽으며 자동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몰입할 줄 알아야 한다.
몰입은 이렇듯 중요하지만, 과해진다면 어떨까?
자칫하면 현실에서의 자신과 몰입할 때의 자신이 분리되는 것 같은 느낌을 경험하게 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좋아하는 뮤지컬을, 애호하는 배우들의 캐스팅으로 관람한 뮤덕의 경우가 있다. 그들은, 공연이 끝나버렸을 때 문득, 꿈에서 깨어난 듯한 기분을 느낄 때가 있다고 말한다. 현실 속에서 격무에 시달리며 버티던 자신의 모습과 공연 속 배우들의 연기에 동화되어 함께 호흡하던 자신의 모습이 분리된 것 같이 느껴지는 것이다. 자아가 분열하는 듯한 감각은 그리 기껍지 않다. 누군가에게 동화될 정도로 완전한 이해와 몰입을 이루고, 그 현장의 분위기에 취해 온전한 행복감을 느끼던 것이 끝나버린. 앞으로 남은 며칠 간의 평일들을 견뎌야 하는 루틴이 기다리고 있는 느낌이라고 표현하면 될 듯하다.
그렇다면 과한 몰입, 즉 과몰입은 나쁜 걸까?
누가 나에게 이 질문을 한다면, '그럴 수도.'라고 대답할 것 같다. 만약 멘탈이 건강하고 본인의 인생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과몰입을 통해 느끼는 완벽한 고양감에 잠시 취했다가도 현실로 금방 복귀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자기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는, 또는 흥미가 없는 일을 하며 월급날만을 기다리는 삶을 살고 있다면 그 고양감에 대한 향수를 일상 속에서도 느끼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앞에서 예시로 들었던 공연으로 설명하자면, 공연이 끝나고 나면 다음에 볼 공연 날만을 기다리며 그때까지의 일상을 꾸역꾸역 버티듯 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과몰입은 건강하지 않은 취미가 된다. 뭐든 적당한 게 가장 좋다고 하지 않나. 일시적이고 감정의 동요를 급격하게 일으키는 취미는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과몰입이 완전히 나쁘다고 말하기엔, 건강한 방식으로 과몰입을 즐기고 현실과의 대비감을 극복하는 사람들이 많다. 처음에 언급했던 '손민수'가 그 극복 방법 중 가장 대표적인 하나이다. 좋아하는 공연의 굿즈를 사서 사무실 책상을 장식하거나, 애호하는 가수의 음반을 소장하는 것을 넘는 것이다. 좋아하는 뮤지션이 입었던 옷, 추천했던 가방을 따라 사는가 하면, 그가 주로 가는 장소에 가서 인증샷을 남기거나 그가 좋아한다고 말했던 음식을 만들어 먹어 보기도 하는 것이다. 과몰입하는 대상을 일상에 끌고 온달까. 일상과 과몰입 사이의 격차를 찬찬히 줄여나가는 그 아기자기한 따라함들은 시끌벅적하면서도 귀여운 삶을 만들어 가는 하나의 방식과 같다.
삶에 소품을 두는 일
때로는 몰입해서 처리해야 할 것들이 가득 쌓인 인생이 지루하고 재미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럴 때 자극적이고 격이 높으면서도 일상과는 동떨어진 것으로의 과몰입은 우리에게 작지만 큰 활력소일 수 있다. 모던함을 추구하다 보니 무미건조해진 사무실 벽에 분홍색 작은 키 링을 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짜 맞춘 듯 완고한 것들 사이 놓인 작은 귀여움은 보는 이로 하여금 피식하게 만들지 않나.
타인을 '손민수'하게 만들고, 지금껏 쌓아온 일상의 모습을 바꾸게 만드는 과몰입이 건강하지 않다거나, 미성숙하다고만 바라볼 필요는 없다. 애호의 시선을 타인도 볼 수 있게끔 드러낸다는 것은 미성숙함만으로는 행해질 수 없는, 거대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어떤 것을 사랑하는 마음은 지극히 사적인지라, 각 상황의 페르소나를 뒤집어쓰고 살아가는 현대인이 일상 속에서 드러내기 어렵다. 그럼에도 책상에 좋아하는 굿즈를 올려놓거나 누군가가 입었던 옷을 똑같이 입고 다닌다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본인의 평판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을 만큼 건강한 멘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의 반증이 된다.
나는 요즘 들어 가방끈에 애니메이션 속 등장하는 캐릭터의 키 링을 달아 놓거나, 친구들에게 새로 산 MD를 자랑하는 사람들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삶에 소품을 놓고 마냥 즐거워할 수 있는 용기를 그들에게서 엿볼 수 있어 유쾌하다. 조만간 나도 건강한 과몰입을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보고 싶어졌다.
[유서인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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