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마음속에 쌓인 장작을 어떻게 불태워야 하는가 [영화]

<큐어> 속 치유의 역설
글 입력 2023.05.31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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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서양을 개인주의, 동양을 집단주의라고들 한다. 확실히 의견을 표출하거나 권리를 주장하는 데 거침이 없다고 여겨지는 서구와는 달리,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 문화권에서는 날선 말을 참아내는 것을 성숙하다고 여긴다. 그래서 많은 경우에 우리는, 불편한 감정을 즉각 내뱉기보다는 일단 삼키키를 택한다. 그것이 이후에 어떤 방식으로 나에게 돌아올지는 일단 외면해둔 채로.

 

우리가 끝내 삼킨 감정들은, 우리 안에 켜켜이 쌓인다. 그렇게 삼켜진 감정들은 소화되지 않고 우리 속에 계속 쌓여만 가다가, 어느 순간 걷잡을 수 없이 매섭게 밖으로 터져나온다. 그때그때 할 말을 하는 사람의 분노보다, 매번 묵묵히 참아온 사람의 분노가 더 날카롭고 뜨겁게 느껴지는 건 그래서일 테다.

 

일본은 이런 ‘삼킴’의 미덕이 특히 두드러지는 나라 중 하나다. 겉으로 보여지는 자신인 ‘타테마에’와 진짜 마음인 ‘혼네’를 엄격하게 구분하도록 교육받을 정도니 말이다. 그래서 드라마 <성난 사람들>이 삼킴 끝에 이유 없는 분노에 휩싸이는 한국인들의 단상을 그려낸다면, 그와 비슷한 일본인들의 모습을 담아내는 건 영화 <큐어>다. 지독할 정도로 서늘한 시선으로 일본인, 혹은 그때그때의 감정을 삼키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관조하는 이 영화를 살펴본다.

 

 

 

나의 심연을 바라보기까지, 딱 한 걸음


 

주인공인 타카베는 도쿄에서 일어나는 연쇄 살인 사건을 조사 중인 형사다. 평범하게 살아가던 사람들이 마치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일제히 사람의 목을 X자로 그어 살해하는 기괴한 사건을 말이다. 살인에서 가장 중요한 건 언제나 동기일 텐데,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왜 그런 짓을 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이에 타카베는 이 모든 사건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의 소행은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그의 추측은 빗나가지 않았다. 범인은 라이터로 최면을 거는 최면술사 마미야였다. 이상한 자세로 걸어다니며 자신이 자신인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이 남자는, 자신의 이야기는 일체 하지 않은 채 타인에게 끝없이 질문을 던진다. 처음에 이 질문은 끝없이 돌고 도는 정신이상자의 넋두리처럼 들리지만, 가만히 듣다 보면 그 모든 질문들은 결국 하나로 귀결됨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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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누구야?”

 


이 질문에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직업과 이름을 이야기하지만, 마미야가 듣고 싶은 건 그게 아니었다. 계속해서 같은 질문을 듣다 정말 자신에게 직업과 이름을 빼면 무엇이 남나 고민하던 찰나, 마미야는 최면을 걸어 그들이 삼켜야만 했던 진짜 감정들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누군가를 향해 뾰족히 향하려다가 삼켜진 그 감정들은, 그렇게 불타올라 그 누군가를 찔러 죽여 버린다.

 

사실 영화가 ‘살인의 동기’랍시고 보여주는 건, 그들이 찰나의 불만 섞인 표정을 짓는 사소한 장면들뿐이었다. 상냥해 보이던 초등학교 교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주부인 아내에게, 파출소 직원이 ‘흡연은 안 된다’며 난감해한 동료에게, 여자 의사가 진료를 위해 바지에 손을 넣는 자신을 ‘대담하다’고 말하는 환자에게. 그러나 그 장면들을 넘어 그들의 삶 전체를 상상해 본다면, 그들의 그런 표정은 한두 번 나오고 끝날 얼굴들이 아니었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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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마미야가 최면을 위해 꺼내드는 불꽃은, 그들의 마음 속 장작을 불태울 마지막 한 발짝이었다. 나무나 기름은 평상시에는 전혀 위험한 물건이 아니지만, 작은 불꽃이라도 만나면 금세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다. 그들이 살인까지 저지르게 된 건, 결국 마음 속에 불타오를 장작이 너무도 많아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져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작중 타카베의 동료 의사인 사쿠마가 말하듯, 최면에 걸린다고 해서 사람의 기본적인 윤리관을 바꿀 수는 없었다. 그 말인즉슨, 그들의 내면 한 켠에 쌓여 있던 건 정말 다른 누군가를 죽이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는 마음들이었다는 뜻이다. 어쩌면 선과 악의 결정적인 차이는, 생각의 다름이라기보다 그 생각을 현실로 만들어낼 마지막 하나의 불꽃인지도 모르겠다.

 

 

 

속을 비워내는 치유에 대하여


 

끔찍한 살인 사건을 다루는 이 영화의 제목은 <큐어>, 그러니까 치유다. 왜 이런 제목이 붙었는지를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다.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않기에 그만한 쾌락을 가져다준다고 생각되는 일탈처럼, 이 영화 속의 살인은 그들을 짓눌러 가던 상념을 한 번에 터뜨려 없애줄 수단이기 때문이다. 마미야가 타카베에게 ‘속을 비우고 새롭게 태어나라’고 계속해서 종용하는 건 그래서다.

 

어쩌면 관객들은 그런 마미야의 논조에 전혀 공감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사실 이미 대부분의 관객들은 마미야가 원하던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타카베가 시종일관 자만에 찬 모습을 보이는 마미야를 몇 번이고 쏴 죽일 때, 지금껏 그의 만행을 봐온 우리가 느꼈을 감정은 ‘후련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카베가 형사로서의 직무에 충실했으려면, 그를 쏴 죽여서는 안 됐다. 결국 타카베는 마미야를 죽여 내면의 치유를 얻어 버렸고, 그런 그를 이해하는 우리 역시 마미야에게 어느 정도는 동화되어 버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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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카베는 그 길로, 마미야처럼 타인에게 최면을 걸어 치유를 위한 살인을 하도록 만드는 범죄자가 되어 버린다. 그는 그 이후로 행복하게 살았을까? 모르긴 해도, 그에게 그다지 희망찬 나날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남의 치유를 돕느라 정작 자신도 텅 비어 버린 마미야처럼, 타카베 역시 속에 남은 게 없는 껍데기처럼 살아가야 할 테니까. 살인이라는 방식으로 속을 완전히 비워내는 치유란 그 당시에는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종국에는 외려 그 비워진 마음으로 인해 끝없는 공허함만을 남길 테다.

 

 

 

‘전율’보다는 ‘소름’이 이는 냉랭한 시선


 

봉준호 감독이 극찬한 영화답게, <큐어>에서 가장 흥미를 돋우는 건 연출이다. 분명 스릴러 장르를 표방하고 있음에도, 이 영화에서 관객들을 깜짝 놀래키는 점프 스케어 연출이나 긴박함을 조성하는 배경음악은 사용되지 않는다. 심지어 그 흔한 줌인조차 거의 사용하지 않으며, 대부분의 중요한 장면은 컷 전환이 거의 없이 매우 긴 롱테이크로 담겨 있다.

 

그러나 그 점이 오히려 작품의 서늘함을 극대화시킨다. 이 영화는 작중 인물들의 살인을 엄청나게 먼 곳에서 미동도 없이 관조함으로써, 마치 그 비현실적인 일이 우리 일상에서도 일어날 수도 있다는 걸 말하려는 듯하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비현실적인 장면을 애써 납득시키기 위해 극적인 연출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 외려 비현실적이라는 느낌은 사실 우리가 인간의 윤리관을 너무 과신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오지는 않았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특히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타카베의 동료 의사인 사쿠마가 최면에 빠져들었음을 연출하는 방식이었다. 영화는 서서히 최면에 빠져가는 사쿠마가 자신의 방에 들어가는 모습을 천천히 비추다가, 그가 방의 불을 켠 순간 앵글의 가장자리에 벽에 그려진 X자가 비춰지도록 한다. 처음에 그 X자는 잘 보이지도 않다가, 소름 끼치는 정적 끝에야 관객들의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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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을 통해, X자는 영화가 그려내고자 했던 현대인들의 내면과 정확히 같은 특성을 가지게 된다. X자는 살인자들이 영화 내내 사용하는 표식이지만, 그것이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X자는 불을 켜기 전부터 방에 이미 그려져 있었지만, 불을 켜는 순간에야 우리의 앞에 나타나 우리를 잠식한다. 명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누군가에 대한 증오, 나도 모르게 내 안에서 똬리를 틀고 있던 그 증오야말로 이 영화가 들춰내고자 했던 현대인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마음속에 무엇을 채워넣을 것인가


 

결국 이 영화가 가장 중요하게 바라보는 건, 우리가 들여다보지 않으면 쉽게 알기 어려운 인간의 내면이다. 우리가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가는 소시민이 될지, 아니면 세상을 증오하는 괴물이 될지는 그 내면에 우리도 모르던 무언가가 얼마나 차 있는지에 따라 달라질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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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장작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쌓여 내 마음을 통째로 불태워 버리기 전에, 때로 우리는 스스로 그 장작들을 불태워낼 줄도 아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결국 <큐어> 속 모든 문제는, 그들이 곪아가고 있던 마음속을 애써 외면해둔 채 항상 웃는 표정만을 지으려 노력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마음에 방이 있다면, 우리는 그 방의 불을 종종 켜 보며 혹여나 X자가 그려져 있지는 않은지를 확인해보고, 무언가 쌓여 있다면 그것이 너무 커지기 전에 태워 없앨 수도 있는 입주민이 되어야 할 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마음속에 무엇이 채워질지는 온전히 우리의 선택임을 기억하자. 타인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을 애써 삼킬지 또는 뱉어낼지를 차치하고서라도, 마음의 방에 들어갈 수 있는 건 비단 남을 죽일 불꽃으로 타오를 장작뿐만은 아니다. 불꽃으로 태워낼 마음 속의 무언가는 누군가에 대한 증오로 뻗어갈 장작일 수도 있지만, 무언가에 대한 열정으로 피어날 장작일 수도 있으니까. 결국 내면의 단단함을 만들어내는 건, 하루하루 마주할 수많은 갈림길 위에서 마음속에 채울 장작을 선택할 줄 아는 주체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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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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