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의식하지 않아 의식하게 하는 심청의 효심. 발레로 만나다 - 발레 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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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홍원삼을 입고 발레 동작을 취하고 있는 무용수. 발레 특유의 발끝으로 서는 자세. 우아하면서도 커다란 동작을 하여 드러난 발에는 토슈즈가 신겨져 있다. 한복과 토슈즈의 조합, 그리고 왕후의 예복에 우아하면서도 커다란 발레 동작의 조합. 언뜻 보면 이질적인 것들의 모임이지만 이 공연에서는 그것이 조화를 이루며 함께 녹아 있기가 가능하다. 유니버설 발레단의 대표적인 레파토리이자 창작 발레인 <심청>은 우리 고전 판소리 소설 심청전을 발레로 재해석하고 표현한 공연이다.
한복과 발레의 조화를 보기는 두 번째다. 첫 번째 감상 경험 역시 유니버설 발레단의 <춘향>으로부터였다. 발레 안무에 맞추 움직이기 용이하면서도 한국의 고전미를 살린 퓨전 한복 무대의상이 하늘거리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홍원삼을 입은 심청을 내세우는 <심청> 포스터에 홀린 나는 <심청>의 무대의상은 어느 정도의 변형을 거쳤는지, 아니면 의상의 전통미를 더 많이 보존하면서 발레라는 장르와 어떻게 조화를 이뤘는지가 매우 궁금해졌다.
공연 당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의 로비에 들어섰을 때, <심청>의 대형 포스터들과 포토존이 눈에 띄었다. 포토존에는 연꽃 모형이 마련되어 있었다. 간단한 모형이지만 이것이 앞으로 연꽃이 나타날 주요 장면들이 극에서 어떻게 표현될지를 상상해 보게 했다. 연꽃 장면들뿐만이 아니라 심청전 자체는 어떻게 재해석되었을까, 곧 펼쳐질 공연에서 어떤 새로운 표현들을 만날 수 있을까 기대감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유니버설발레단(단장 문훈숙, 예술감독 유병헌)의 창작발레 <심청>이 4년 만에 돌아온다. <심청>은 한국의 고전을 세계에 널리 알린 발레단의 대표적인 창작발레로 1986년 국립극장 초연 이후 프랑스 파리, 러시아 모스크바, 미국 뉴욕과 워싱턴 등 세계 15개국 40여개 도시에서 찬사를 받으며 K-발레의 위상을 보여준 작품이다.
최초의 글로벌 공동 창작 프로젝트인 <심청>의 안무는 유니버설발레단 초대 예술감독 애드리언 델라스(Adrienne Dellas), 대본에 故박용구 평론가, 음악에 작곡가 케빈 바버 픽카드(Kevin Barber Pickard)가 참여했으며 초연 이후 37년간 안무, 연출, 무대, 의상 등 끊임없는 수정 보완을 통해 작품의 완성도를 높여오고 있다.
(...) 이번 <심청>에서는 연출과 안무는 그대로 하되 무대 전환의 테크닉을 개선하여 기존 3막 4장(인터미션 2회)구성에서 총 2막 120분으로 러닝 타임을 단축해 또 한번 작품의 업그레이드를 시도한다.
1막은 심청의 탄생과 심 봉사가 승려에게 덜컥 공양미 삼백 석을 약속한 이야기, 그로 인해 심청이 인당수에 빠지게 되는 이야기와 용궁에 간 심청의 모습을 다룬다. 2막은 바다에서 죽을 줄만 알았던 심청이 다시 육지로 돌아오며 생기는 사건들을 다루며 이는 심청전의 결말에 해당한다.
창작발레 <심청>의 1막은 연출적으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막이 오르고 태어남과 거의 동시에 생모를 여읜 심청과 홀로 어린 딸을 키우게 된 아버지 심 봉사의 이야기가 다소 연극적으로, 그러나 압축적으로 표현된다. 1막 1장의 중후반부에서는 문제의 공양미 삼백 석 약속이 이뤄지는 과정과 아버지가 책임지지 못할 액수의 시주 약속을 대신 책임지기 위해 뱃사람들을 따라 자신을 제물로 바치기로 정하는 심청의 모습, 그리고 서로밖에 없었던 두 부녀의 가슴 아픈 이별까지를 그리고 있다.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1막 1장에서는 큰 긴장 없이 한복을 변형한 무대의상들을 눈으로 세세히 살펴보고 발레에 맞는 기장으로 바뀐 한복 치마가 어떻게 발레리나들의 몸에 휘감아지고 턴 동작에 따라 우아하게 펼쳐지는지를 유의하며 감상했다. 발레라는 장르에서 앞이 안 보이는 심 봉사를 어떻게 표현할까 걱정이 되기도 했는데, 이는 심 봉사 역의 발레리노가 취하는 팔 동작이나 허공을 더듬는 듯한 손동작, 지팡이 소품의 활용 등으로 시각화되었다. 그 외에 1장의 끝부분에서 마을 사람들-특히 아낙네들이 심 봉사와 딸을 떼어놓으려는 선원들을 다 같이 말리는 장면이 인상 깊었다. 홀로 남은 심 봉사는 마을 아낙들에게 젖동냥을 하며 심청을 키웠으니 그 어린것에게 젖을 물려주었던 마을 아낙들에게도 심청은 눈에 밟히는 마을 소녀였을 것이다. 심청전의 주 메시지는 물론 효이지만, 나는 이런 부분에서 옛 공동체의 정을 볼 수 있었고 그 덕에 마음 한구석이 먹먹해졌다.
1막의 2장은 선상에서 펼쳐진다. 인당수에 빠지기 전까지 심청의 슬픔과 고통, 그리고 거친 풍랑 위에서 생활하는 선원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몇몇 선원들은 심청을 희롱하려고도 들지만 대장 격의 선원이 그들을 제지한다. 심청을 위해서라기보단 곧 바다에 빠질 제물이 부정 타면 안 되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를 희생하여 바다가 잠잠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매한가지이지만 그 미신에 좀 더 골몰해 있는 사람이 잠시나마 다른 폭력으로부터 심청을 지키는 역할이 된 것이 다행은 다행이지만 어찌 보면 아이러니하다. (혹은 관리직이어서 잡음이 이는 게 싫었을 수도 있지만)
자신의 자유와 생사여탈권은 공양미 삼백 석을 마련할 돈 때문에 자기 것이 아니게 된 심청이다. 흔들리는 배 안에서 쪽잠을 자며 심청은 갈 곳 없는 그리움이 만들어낸 환상을 꿈꾼다. 심청의 어머니가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녀의 꿈에 찾아와 심청을 안아준다. 얼굴도 습관도 모를 어머니와 자신을 곤경에 처하게 한 아버지이지만 심청은 세 가족이 행복하게 함께하는 모습을 그린다. 물론 심청은 효녀고 보통 효심을 보인 게 아니기에 이렇게 오래도록 살아남은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 것이지만, 그래도 잘못된 판단으로 큰 빚을 진 셈인 아버지에 대한 원망 한 점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현대인으로서는 다소 놀랍기도 했다. 이미 심청전에서 심청의 효심을 다른 각도로 재해석한 작품들도 존재하지만 유니버설 발레단은 발레 <심청>에서 본래의 심청전 이야기와 의도에 충실하기로 했음도 다시 한번 알고 갈 수 있었다.
심청이 인당수에 몸을 던질 때가 다가올수록 선상에서의 남성 군무는 더욱 강렬해졌다. 발레리노들의 그랑 쥬떼는 과연 힘이 넘쳤다. 남성 군무는 본래 발레에서 흔치 않은 요소라고 하는데 유니버설 발레단의 <심청>에서는 이를 길게 볼 수 있었다.
발레 <심청>에서 또 참신했던 점은 심청이 인당수에 빠진 상태를 보여주는 vcr 영상이었다. 흑백 색감의 영상에서 물에 빠진 채 죽음을 기다리는 심청의 고독감이 무겁게 느껴졌다. 보통 심청전 이야기를 되새길 때면 심청이 인당수에 몸을 던진 후 바로 용궁 장면을 떠올리게 되는데, 이 공연에서는 심청이 가장 슬프고 외로웠을 그 순간을 자세하게 보게 되었다. 아무도 몰랐을, 물에 빠져 죽어가는 심청의 마음을 엿본 것 같아 이 표현 방식이 새로웠다. 개인적으로 영상과 영상을 삽입한 의도는 마음에 들었으나 극 전체로 보면 이 영상의 톤 앤 매너가 유독 이질적이기는 했다. 영상의 끝은 어떻게 처리될까 궁금해질 즈음 누군가의 손 하나가 정신을 잃어가는 심청의 손을 끌어당긴다.
심청이 눈을 뜬 그곳은 바다 아래 용궁으로, 갖가지 물고기가 의인화된 듯한 복장을 한 무용수들이 각자의 자리를 잡고 서 있다. 용궁 장면에서 신화적 요소 특유의 신묘한 전통미를 보여주리라 기대했던 것과 달리 발레 <심청>의 용궁은 한국풍이나 동양풍 이미지는 잘 느껴지지 않았다. 깊은 바다 저 아래 물고기들의 형상을 따 와서 새롭게 형성된 이세계 같았다고나 할까. 동해 용궁이나 남해 용궁이라 이름 붙이기에는 그런 느낌이 심히 약한 새로운 장소였다.
1막 3장에 해당하는 이 용궁 장면은 발레의 장르적 특징 중 하나인 디베르티스망을 보여주는 구간이기도 했다. 디베르티스망은 '기분전환'이라는 뜻을 가진 프랑스어 단어로, 발레에서는 줄거리 진행의 의무를 지지 않고 무용수들의 기교를 보여주며 극의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부분을 의미한다. 대사 없는 무용극인 발레에서 디베르티스망은 관객이 긴장을 풀고 무용과 무용하는 인체의 아름다움, 화려한 기교를 마음 놓고 즐길 수 있는 대목인 것이다.
학부 시절 무용의 이해라는 교양 과목을 들은 적이 있어 디베르티스망에 대한 기억이 났고, 전체 공연 시작 전 동행인에게 발레의 문법적 특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줄 수 있었다. 나 역시 디베르티스망 부분은 이완된 상태로 감상했다. 새삼 배운 것은 어디 안 간다는 생각도 들었다.
각각의 물고기로 분한 무용수들이 저마다의 춤 실력을 뽐낸 후 용왕과 심청의 파드 되(주로 남성 무용수와 여성 무용수가 쌍을 이뤄 추는 이인무)가 이어졌다. 파드 되 역시 발레에서 기억해둬야 할 요소 중 하나다.
음악이 고조되다 멎는 순간 용왕이 심청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으며 구애했다. 그러나 심청은 용왕의 구애를 거절한다. 그 이유는 앞 못 보는 아버지, 심 봉사이다. 어쩌면 인간 이상의 수명이나 상상 못했던 호화로운 삶을 줄지도 모르는 별세계의 초대에도 아버지를 떠올리며 육지로 올라가겠다는 심청이다.
공양미 삼백석에 인당수에 몸을 던진 것만으로 자식으로서의 몫을 다했다고 볼 수도있겠지만 심청에게는 아니었다. 애초에 자기 몫의 효나 도리를 다했다는 생각도 없이 아버지의 걱정만을 하는 것이 느껴졌다. 진정 선을 행하는 사람이 선함을 의식하지 않듯이, 세상 사람들에 의해 효녀라 불린 심청도 효를 목적으로 자신의 죽음을 결정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얻은 생의 기회 앞에서도 아버지를 떠올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찌 보면 그녀가 효를 생각하지 않았기에 우리에게 그 효심이 더욱 도드라져 보이는 것이다.
심청의 의지를 존중한 용왕은 심청을 연꽃에 태워 바다 위로 올려 보내준다. 그렇게 1막이 끝나고 인터미션이 주어졌다.
2막은 1막에 비해 러닝타임이 짧았다. 왕실 연희를 배경으로 왕과 신하들, 무희들이 등장한다. 바다에서 발견된 특별한 연꽃이 임금에게 진상되고 사람들은 그 안에서 나오는 심청을 보게 된다. 심청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은 왕은 심청을 궁에 머물게 한다.
깊은 밤, 피리 부는 악공의 연주에 홀로 계실 아버지가 떠올라 울적해진 심청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춤을 춘다. 이를 발견한 임금이 심청에게 다가가 위로를 건낸다. 둘 사이 사랑이 싹트는 순간을 역시 발레답게 파드 되로 재현하였다. 발레 <심청>의 백미로 뽑히는 문라이트 파드 되가 바로 이 부분이다. 개인적으로 발레는 아주 밝거나 아주 우아한 매력이 있다고 여기고는 하는데 문라이트 파드 되는 발레의 우아미를 만끽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달빛과 참 어울리는 춤이 발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심청과 왕의 파드 되를 감상했다.
2막에서 또 인상깊었던 부분은 발레와 한삼의 조화였다. 궁중연희의 무희들의 춤 장면, 왕이 심청의 아버지를 찾기 위해 연 맹인잔치의 봉산탈춤 모티프 장면에서 무용수들은 손에 우리 전통 춤 소도구 중 하나인 한삼을 착용했다. 춤선의 종류가 달라도, 한삼이 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한삼은 춤꾼이 만드는 동작의 아름다움을 허공에까지 연장하는 동시에 더 극적인 춤선을 만들어냈다.
마지막 부분인 맹인잔치 장면에서 심청은 공연 포스터에서처럼 화려한 홍원삼을 입고 등장한다. 이는 심청이 왕비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맹인잔치에서 드디어 상봉하게 된 심청과 심 봉사에게 기적이 일어난다. 공양미 삼백석을 바친 직후에도 뜨지 못했던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잔치에 참가한 모든 맹인들이 앞을 보게 되니 가히 커다란 기적이라 할 수 있겠다.
결말이나 다름없는 이 기적 장면에서 극은 다시 1막 1장의 마을 장면처럼 전래동화 같은 분위기로 되돌아간다. 꽉 닫힌 해피엔딩이니 이 장면에서 전래동화 분위기가 되는 것 자체는 자연스럽다. 그런데 사실 나는 이 부분이 다소 아쉬웠다. 극 전체적으로 봤을 때 각 막의 작은 장마다 달라지는 분위기가 막간마다 그라데이션으로 연결되는 느낌보다는 뚝뚝 떨어지는 인상을 받게 된 것이다.
문라이트 파드 되에서 한껏 올라간 우아함과 청아함을 맛보다가 엔딩에 이르러 다시 전래동화 느낌이 된 것이나, 인당수에 빠진 심청의 vcr 영상에서 심청의 심리와 처지를 무겁게 느끼다가 갑자기 별세계의 디베르티스망을 느끼게 된 것이 그러했다. 물론 디베르티스망은 발레의 장르적 특성이라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이런 발레만의 특징이 두드러져 정서적인 연결감이 약해질 수 있는 부분에서는 공간 연출에서 새로운 별세계 느낌 보다는 용궁이라는 공간의 전통적인 느낌을 더 살려 시각적인 통일감으로 극을 뒷받침해주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심청>의 2막에 이르러 왕의 구장복이나 왕후의 홍원삼 등, 발레 공연에서 보기 힘든 전통 예복을 볼 수 있던 것이 좋았다. 발레 안무에 맞게 변형된 보다 단출한 한복도 아름다웠고, 입었을 때 발레 동작은 줄어들지만 그래도 깊은 전통 미감을 보여주는 왕실 예복의 등장도 반가웠다. 무엇보다 이 레파토리는 한국의 효 사상과 한국 특유의 아름다움을 외국에 알리는 역할을 했으니, 퓨전 의상부터 변형을 거의 거치지 않은 의상까지 고루 등장하는 것이 극에 무리가 되지 않고 더욱 이점이 되었다 할 수 있겠다.
5월은 가족과 관련된 날이 많은 만큼 가정의 달이라 불린다. 심청은 의식하지 않고 행한 깊은 효에 대하여 그려나가는 이 무용극이 다양한 연령층의 가족 구성원에게 또 다양한 감정을 일깨워 줄 수 있지 않을까. 역시나, 자식된 입장의 나로서는 나이 들어가는 부모님께 의지하는 자식으로부터 의지가 되는 자식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부모자식 간의 정을 새록새록 쌓아가는 어린 자녀 관객, 부모로부터 홀로서기를 준비하는 청년 관객, 어느새 자신이 부모가 되어 아이 손을 잡고 오거나 자신보다 연로한 부모님을 모시고 온 관객 등등.. 가족에서 점하고 있는 위치와 나이에 따라 효에 대한 감상도 가지각색일 것이다. 여기 온 관객들이나, 공연을 준비한 분들 모두 다양하게 행복한 가정의 달이 되길 바라며 극장을 나왔다.
[신성은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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