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뒤집힐지언정, 변함없이 위를 향하는 슬픔의 형태 [영화]

우리는 슬픔의 삼각형을 벗어날 수 있을까
글 입력 2023.05.25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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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종려상’이라는 말을 듣는다면,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아마도 <기생충>을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세계 3대 영화제 중 하나인 칸 영화제의 최고상이자, 매번 세계 영화인들의 초미의 관심사가 되는 이 상을 한국인이 거머쥘 수 있었다는 건 분명 큰 축복이고 기쁨이었다. 2021년에는 쥘리아 뒤쿠르노 감독의 <티탄>이 이 상을 가져갔고, 가장 최근 수상된 2022년도 황금종려상을 따낸 건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의 <슬픔의 삼각형>이었다.

 

결과적으로 영화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명예를 얻은 작품들이니, ‘예술’로서 이들의 작품성이 어떤지를 논하는 건 큰 의미가 없을 것 같다. 다만 이 상을 시상하는 전문가들이 아닌 대중의 시선에서 이 영화가 얼마나 와닿았는지를 짚고 넘어갈 수는 있을 테다.


<기생충>은 계급 구조에 대한 은유를 직관적인 상하 구도와 ‘수석’ 같은 독특한 상징물로 매끄럽게 풀어낸 작품이었고, 특히 ‘냄새’라는 소재가 한국 관객들에게 제대로 먹혀들었다. 반면 <티탄>은 지나친 잔혹함과 복잡한 서사 구조로 인해 대중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어려웠다. 감독의 의도를 알아맞히지 못한다면 의미를 갖기 어려워지는 영화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되려 고통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는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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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삼각형>은 <기생충>과 <티탄>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영화다. <티탄>처럼 과한 이미지와 난해한 연출로 관객에게 힘겨움을 주는 영화기도 하지만, <기생충>처럼 이입하기 쉬운 인물상과 통념을 뒤집는 구도를 활용해 쉽게 이해되는 ‘교훈 한 줄’을 전달하는 데는 성공하는 영화기도 하다. 수상 직후 환호와 야유가 동시에 터져나왔다는 이 문제작, <슬픔의 삼각형>은 무슨 말이 하고 싶었을까.

 

 

 

삼각형은, 언제나 꼭대기가 있다


 

노골적으로 피라미드식 계급을 상징하는 삼각형이 끝도 없이 등장하는 이 영화에서, 단 하나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그 모든 삼각형에 ‘꼭대기’가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1부에서 칼은 ‘부자’가 꼭대기에 있는 지위의 삼각형에서 런웨이의 앞자리를 빼앗기고, ‘여자’가 꼭대기에 있는 젠더의 삼각형에서 여자친구 야야에게 밥값을 내기를 강요당하면서도, ‘남자’가 꼭대기에 있는 힘의 삼각형에서는 야야에게 화를 내며 위협을 가하기를 망설이지 않는다. 하루도 안 되는 잠깐의 시간 동안 수많은 삼각형들이 그의 삶을 지나갔고, 상황에 따라 그의 위치가 조금씩 바뀌기도 했다. 그러나 꼭대기의 존재 자체가 그 아래의 누군가에게 강압으로 다가온다는 사실만큼은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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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의 요트로 넘어가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군말 없이 여자들의 가식적인 사진을 찍어주는 남자들, 돈 많은 남자 앞에서 춤을 추는 여자들, 부자의 변덕 때문에 억지로 수영을 하는 직원들, 있지도 않은 돛을 청소해달라는 승객의 요구에 호응해줘야 하는 선장까지. 그 방식이 은밀하든 노골적이든, 꼭대기에 올라서 있는 누군가는 언제나 그 아래에게 자신의 진짜 모습을 숨기기를 강요한다.

 

이때 흥미로운 지점은, 그런 강요 앞에 꼭대기 아래의 사람들은 죄다 입을 닫아 버리기를 택한다는 것이다. VIP에게 런웨이의 앞자리를 빼앗긴 칼은 이렇다 할 항의 한 번 못한 채 뒷자리로 향해야 했고, 마찬가지로 수영을 강요당한 직원들도 곤란해하기만 할 뿐 부자를 설득할 결정적인 한 마디는 꺼내지 않는다. 단 한 번, 남성이라는 이유로 밥값을 내도록 강요당한 데 환멸을 느낀 칼이 큰 소리로 짜증을 내는 순간은 관객들에게 ‘찌질하다’고 인식될 뿐이었다. ‘이건 잘못됐다’는 아랫사람의 외침은 칼이 그랬던 것처럼 사회성이 떨어지는 발화로 받아들여지거나, 아예 입 밖으로 나오지도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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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영화는 말 한 마디 못하는 아랫사람들에게 황당한 요구를 일삼는 꼭대기층을 벌주기라도 하듯, 그들의 입에서 말이 아닌 ‘구토’가 나오게끔 한다. 멀미가 나도 억지로 사치스러운 음식을 먹어대고, 당장 토할 것 같아도 물이 아닌 위스키를 마셔대는 그들의 가식은 그렇게나마 응징당한다. 거기에 더치 앵글을 타고 끊임없이 기울여지는 화면은, 그들이 올라가 있는 그 삼각형이 얼마나 알량한 기반 위에 세워져 있는 것인지를 말한다. 그렇게 조금씩 기울어지던 삼각형이 정말로 뒤집혀 버리면서,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으로 넘어간다.

 

 

 

삼각형은, 뒤집혀도 삼각형이다


 

산 넘어 산이라고 했던가. 불의의 사고로 무인도에 표류하게 된 8명의 승객들은 그곳에서 새로운 산, 아니 산처럼 높고 세모난 삼각형을 마주하게 된다. 바로 뒤집힌 삼각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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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도는 요트에서 작동하던 계급의 문법이 지속될 수 없는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돈은 아무것도 살 수 없는 종이쪼가리에 불과했고, 보석은 당장 먹을 수 있는 프레첼 스틱 하나보다도 무가치한 물건이었다. 그래서 무인도의 삼각형의 꼭대기 위에 새롭게 올라선 건, 유일하게 불을 피우고 생선을 잡을 수 있었던 아시아인 여성 청소부 애비게일이었다. 다시 그녀를 이루는 말들을 살펴보자. 아시아인, 여성, 청소부. 원래의 삼각형이었다면 대부분 삼각형의 아래쪽에 놓일 조각들이었겠지만, 뒤집힌 삼각형에서 그녀는 당당하게 꼭대기층을 꿰차고 앉는다.


처음에 이 계급의 전복은 꽤 짜릿하고 유쾌하게 느껴진다. 까마득히 아래에서 수모를 견뎌온 사람이 마침내 위를 차지하게 되는 서사는 언제나 그렇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애비게일은 ‘꼭대기를 쟁취해낸 아랫사람’이 아니라, 진짜 꼭대기 그 자체가 되어 간다. 마치 처음부터 자신이 꼭대기였던 양 원하는 대로 권력을 휘두르고, 젊은 남성인 칼을 성노리개로 사용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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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집힌 삼각형에도 꼭대기는 하나뿐이었으며, 그 꼭대기로부터 흘러내리는 탐욕은 언제나처럼 더러웠다. 그리고 그렇게 견고했던 애비게일의 세상은 구조대가 오기 전까지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야기의 종반부에 들어서자, 황당한 전말이 밝혀진다. 그들이 무인도인 줄 알았던 섬은 사실 자연 상태의 섬처럼 꾸며진 고급 리조트였다. 원래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는 엘리베이터를 목전에 두게 된 애비게일과 야야. 그렇게 애비게일은 한창의 단꿈에서 이제는 깨어나야만 할, 다시금 원래의 삼각형 아래로 내려가야만 할 상황과 마주한다.

 

그러나 아래에 있을 때는 평등을, 위에 있을 때는 불평등을 바라는 게 인간의 본성이지 않겠나. 애비게일은 아름다운 불평등으로 가득한 자신의 낙원을 깨부수고 싶지 않았을 테다. 결국 그녀는 삼각형이 도로 뒤집히는 걸 막기 위해, 야야를 죽일 큼지막한 돌을 꺼내든다. 그리고 그런 애비게일에게, 야야는 돌아가면 그녀를 자신의 비서로 만들어 주겠다고 제안한다. 원래의 삼각형으로 돌아가 평소보다 나은 삶을 살 것인가, 언제 다시 뒤집힐지 모르는 지금의 삼각형에서 군림하되 노심초사하며 살 것인가. 선택의 갈림길 앞에 선 애비게일로부터 끝내 눈을 돌리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삼각형은, 결국 언제나 슬프다


 

이 영화에 ‘빌런’이란 존재할까? 그러니까 이들 중 명백한 악의를 품고 계획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들은 그저 위에 있으니까 밟았을 뿐이었고, 아래에 있으니까 밟혔을 뿐이었다. 꼭대기와 아래가 언제든 뒤집힐 수 있는 삼각형이라면, 사실 진짜 문제는 삼각형의 생김새지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아닐 테다.

 

그래서 삼각형은 항상 슬픔을 가지고 있다. 언제나 꼭대기가 있기에 그 나머지는 괴로워해야 한다는 슬픔을, 아무리 뒤집혀도 절대 평평해질 수는 없다는 슬픔을. 감독이 이 영화를 미국에 마르크스주의를 전파하기 위한 ‘트로이의 목마’쯤으로 생각했다는 사실을 알고 보면 이는 더욱 명확해진다. 사람들을 슬프게만 만드는 삼각형은 해체돼야 한다, 정도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했던 내용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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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건 불가능하다. 평생을 삼각형이 뒤집히기만을 기다리며 살아갈 게 아니라면, 슬픔의 삼각형은 지금 당장 자본주의 사회를 숨가쁘게 살아가야만 할 우리가 감내해야 할 고통이다. 수많은 삼각형이 우리의 삶을 속절없이 지나쳐갈 테고, 우리는 그 안에서 때론 밟히고 때론 밟으며 우두커니 서 있을 테며, 그로 인해 언제나 슬퍼하는 누군가가 생겨날 테다.


그렇다고 마냥 높은 삼각형을 구경만 할 수 없다면, 내가 꼭대기에 있는 삼각형에 도달했을 때 삼각형을 조금씩 눌러 보는 건 어떨까. 삼각형을 아무리 뒤집어도 삼각형이라는 얘기는 질리도록 했으니, 한 번 위에서 삼각형의 각도와 높이에 변화를 줘 보자는 거다. 힘 없는 아래가 아닌 힘 있는 위로부터 시작되는 그런 움직임, 아래를 짓밟기보다는 아래와 가까워지려는 그런 노력은 분명 삼각형의 형태를 조금씩 바꿔 놓을 수 있다. 삼각형이 견고할수록 처음 몇 번의 시도는 아무 효과도 없어 보이겠지만, 그 시도가 쌓이다 보면 어느새 조금은 완만해진 삼각형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므로.

 

그리고 그렇게나마 ‘덜 슬픈 삼각형’의 세계를 상상해 보려면, 오늘도 나를 지나쳐갈 삼각형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여보는 우리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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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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