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편집된 어린이의 세상 [문화 전반]

글 입력 2023.05.07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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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에서 캡쳐로 올라온 한 독자의 리뷰를 읽었다. 리디북스에 연재되는 BL 웹툰의 폭력적 연출에 대하여 비판하는 독자는 이런 말을 했다. ‘목격자가 아니라 독자로 남고 싶다. 그림은 개인의 상상이 아니라 직관적이기에 개인이 방어할 수 없다’라고. 리뷰의 문장을 읽고, 불현듯 떠오르는 불쾌감이 있었다. 이유를 찾지 못해 차곡차곡 쌓아 놓았던 예민한 불편함이.


귀여운 여자아이를 대표로 걸어놓은 웹툰이 있었다. 공주 같은 드레스를 입고 환하게 웃는 만 5세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이의 그림. 그러나 그 그림을 보고 눌러 본 웹툰에서 어린이 주인공은 피투성이가 된 채 성인조차 견디기 힘든 고난을 겪고 있었다. 아무도 보듬어 주지 않는 공간에서 그 나이대 아이들이 사용하기 쉽지 않은 어려운 문장들을 턱턱 뱉어내며 성인 인물에게 자신의 살길을 찾아 무릎을 꿇고 빌기도 했으며 성인의 인정을 받기 위해 목숨까지 건 과제를 수행하기도 했다. 온몸에 베인 상처를 달고 피투성이가 된 채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끽해야 만 5세로 보이는 어린이 주인공. 성인 인물은 어린이가 목숨을 걸고 자신의 고난을 겪으며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어린이를 살리기로 마음먹는다. 어린이가 목숨을 건 과제를 수행하는 동안 그 웹툰을 보는 이들은 말한다. “어른스럽다, 철이 일찍 들었다, 응원한다.”

 

이상하다. 여기까지 오니 내 속에서 토해내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분명해졌다. 만 5세 어린이가 죽음의 위협을 간신히 벗어나 한 공간에 머무르기 위해 무릎을 꿇고 제 살을 찢는 고통을 견디고 인정받는 이야기를, 정말 어린이의 성장 서사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일까? 


무언가 잘못된 게 틀림없다. 독자의 리뷰를 읽고 떠올린 불유쾌함의 근원은 그곳에 있었다. 나는 그 웹툰을 읽는 동안, 웹툰을 즐기는 감상자가 아닌 아동 학대 사건의 목격자가 되었던 것이다. 상상할 여지를 주지 않는 웹툰은 내게 피투성이가 된 채 목숨을 구걸하는 어린이의 그림을 보여주었고, 나는 그 웹툰 속 어린이 주인공과 현실 속 아이들의 얼굴을 겹쳐 읽는다. 보호자에게 폭행당해 죽음에 이른 여러 어린이의 생애 마지막 사진들이, 증거물로 제출된 멍든 상처투성이 몸이, 학대하는 보호자에게조차 사랑을 갈구하며 웃던 아동 학대 피해자의 얼굴이, 체념하며 자신을 때리는 보호자 앞에 꿇는 무릎이. 그 피해자들의 이미지가 준비되지 않았던 내게 쏟아지듯 밀려왔다. 처음 아동 학대 피해자들의 사진을 보고 느낀 여러 감정이, 현실에 존재하는 다시는 반복되지 않아야 하는 반인륜적 범죄행위들이, 내가 그 웹툰의 어린이 주인공의 이미지를 ‘목격’하게 만들었다. 


어린이 주인공이 새로운 보금자리에 머무르기 위한 개연성을 주기 위해 꼭 피투성이 어린이의 모습이 필요했을까? 폭력을 행하는 주체가 성인이 아니기 때문에 괜찮은 것일까? 


이제 이어지는 궁금증이 생긴다.


왜 꼭 주인공이 어린아이여야 했을까? 이 주인공은 흔한 ‘아동’과 같은 특징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아직 미성숙한 뇌의 발달단계로 인한 자기중심적 사고도 존재하지 않고, 만 5세들이 공유하는 언어발달 오류도 찾아볼 수 없다. 문장 구성 능력은 성인보다 뛰어나며 호소력까지 짙다. 계속해서 어린이 주인공의 어른 같은 행동은 작가가 그리는 캐릭터 디자인에서 튕겨 나간다. 이 웹툰의 주인공은 어린이가 아니다. 사실 웹툰의 주인공은 어린이의 외형을 한 성인에 가깝다. 성인처럼 말하고 성인처럼 생각한다. 특정한 콘텐츠의 이야기가 아니다. 고구마와 사이다를 찾는 피드백 빠른 플랫폼의 작품 속에 어린이의 정신은 장마가 끝난 길거리의 잡초보다 더 빠르게 자란다. 


로맨스 판타지 장르 속 어린이의 몸으로 회귀한 작품은 독자들에게 조건 없이 사랑받는 위치를 제공함으로써, 독자들이 가진 결핍을 채우고 카타르시스를 준다. 인물의 귀여운 행동과 외모로부터 권력을 얻어 사랑받는 권력을 쟁취하는 것이다. 어린이의 외형을 의도적으로 취하며 얻는 부산물이 현실로부터 괴리감을 증폭시킨다. 이러한 콘텐츠 속에는 어른스러운 어린이만이 존재한다. 노키즈존 여부를 두고 큰 논쟁거리가 되고, 잼민이라는 유행어가 통용되며 공공장소에서 피해를 주는 어린이에게 향하는 혐오를 당연시하는 사회에서 오히려 콘텐츠 속의 어린이는 무해하다는 점이 어쩌면 당연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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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유튜브 캡쳐

 

 

2022년 5월 9일,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는 ‘아이에게 괜찮다고 말해주세요!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애티켓(아이+에티켓) 캠페인’을 벌였다. 정신건강의학과 오은영 박사는 캠페인 영상에서 식당에서 우는 아이, 커피를 쏟은 아이에게 괜찮다고 말해달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어린이는 발달 과정상 낯선 상황에서 울 수 있고, 몸을 계획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서툴기 때문이다. 캠페인 영상에서 우는 아이를 본 식당 손님은 “아이는 그럴 수 있죠”라고 말하고 아이의 보호자는 “감사합니다”라고 답한다. 같은 해 5월 16일 중앙일보는 이런 타이틀의 기사를 냈다. “‘왜 배려 강요하나’ 오은영 ‘애티켓 캠페인’ 뜻밖에 논쟁” 기사 속 네티즌은 “배려가 강요당하는 기분”이라는 말을 했다. 왜 수많은 반응 중에 하필 배려를 강요한다는 단어를 사용한 댓글을 제목으로 사용했을까. 그리고 아이는 그럴 수도 있다는 말에 사람들이 왜 그렇게 화를 낼까.


우리 사회는 어린이가 끼치는 조금의 피해도 용납하고 싶지 않다. 인터넷에서 항상 그런 말을 하니까,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니 당연히 그들이 즐기는 콘텐츠 속에서 조차도 그 어린이의 민폐, 아니 모든 종류의 민폐는 허용되지 않는다. 이제 웹툰에서 느낀 기묘한 틈새가 무엇에서 기인했는지 확실해진다. 어린이처럼 보이지만 어린이가 아닌 그 캐릭터를 무어라 설명할 수 있을까.


지금은 사회가 용인할 수 있는 점만 골라 ‘편집된 어린이’ 캐릭터들의 세상이다. 만화와 소설 속 어린이 캐릭터의 조형이 이렇게도 겉돌게 느껴지는 이유가 이곳에 있다. 우리는 콘텐츠 속 어린이의 예쁨과 귀여움만 취할 수 있다. 만 5세 아동은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모든 이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건 아주 통상적인 발달단계의 과정이다. 나는 알고 너는 모르는 사실을 전제하여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은 아직 발달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 시기의 아이들은 좀 얄미운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자신의 앞에 있는 물건이 뒤돌아 있는 상대에게까지 보인다고 생각한다는 뇌 구조는 생리학적 발달 단계에 따른다. 그러니 당연하다. 

 

만 5세 아동은 이제 조금씩 담화 구성을 연습해 나가는 시기이다. 그러나 과거-현재-미래를 이해하여 시간 순서상 완벽히 이야기를 구성하여 표현하는 것에 아직은 어려움이 있다. 한두 문장의 단순한 인과관계는 설명할 수 있으나 이야기 담화 수준에서 여러 에피소드의 순서를 맞추어 말하기는 아직 어렵다. 그러니 이제 유치원에 간 만 5세 아동에게 오늘 유치원이 어땠냐고 묻는다면 답변은 시간 순서상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이야기는 여기저기 중구난방으로 펼쳐진다. 이것이 이 연령의 아이가 답할 수 있는 최선이다. 그러니 이것도 당연하다. 이 어린이에게는 당연한 일이다. 성인은 그 오류를 잡아내 수정해 말해준다. 이러한 피드백 과정과 뇌의 발달을 거쳐서 비로소 그다음 단계로 자라나는 것이다.

 

어린이가 어린이다울 수 있는 아동용 애니메이션은 흔히 성인들에 의해 밈으로 끌려와 민폐 캐릭터가 된다. 어린이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인터넷 공간 안에서 민폐 캐릭터는 조롱거리다. 어린이들은 그런 성인을 모방한다. 편집된 어린이만 받아들이는 사회가, 어린이가 스스로를 타자화하게끔 한다. 다름을 차별하는 사회는 이렇게 재생산된다. 민폐 행동, 나한테 피해를 줄 행동은 나쁜 것. 놀려도 되는 것. 조롱해도 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나와 너 사이의 구분선은 뚜렷해지고 차별은 정당화된다. 


어른들의 시선에 맞춰 편집된 어린이의 세상에서 실제 어린이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피해를 주는 것이라면 어떤 전제조건도 이해해 주지 않는, 날 선 사회에서 편집되지 않은 어린이란 공공장소 속의 소음, 무조건적인 규칙 밖의 이단아, 한 번 찌푸리는 눈살과 작게 지껄여지는 욕설의 주인공이 된다. 


어린이를 향하는 사회의 배척성은 어린이만을 향하게 될까? 


그 시선은, 혐오는 중력에 따라 아래로 흐른다. 그 대상은 어린이에 국한되지 않는다. 어린이에게 눈치를 주는 사회는 빠르게 시대를 따라오지 못하며 키오스크 하나를 한참을 잡고 서 있는 노인들에게 향한다. 2001년 오이도역 레프트 추락사고를 시작으로 휠체어를 탄 사람도 안전하게 지하철을 탈 수 있기를 요구하며 지하철역에서 시위하는 장애인에게 향한다. 이 흐름이 담론장에서 노키즈존은 어린이 혐오가 아니라 부모 노릇을 하지 못하는 부모를 금지하는 것이라는 반론이 통하지 않는 이유다. 경향성이라는 것이 있다. 어린이를, 어린이와 동승한 아이의 보호자를 욕해도 제지받지 않을 것이라는 사회의 분위기가. 피해를 주는 사람이 무조건적 잘못이라는 무언의 사회적 약속 아래, 피해를 주는 이들의 잘못이 존재한다며 한두 마디씩 거들며 비난해도 괜찮은 것 같은 분위기가 존재한다. 

 

우리가 벗어나야 하는 것은 아래를 향해 혐오를 쏟아내도 제지하지 않는 흐름이다. 빅브라더가 아니라면 불편한 생각까지 제재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 불편함을 표현하지 않을 수 있다. 불편하지만 그 대신 어린이니까 괜찮다고 말할 수 있다. 개인이 가진 가치나 양심에 따른 판단일 수도 혹은 그렇게 하도록 만들어지는 분위기의 영향을 받아서일 수도 있다. 혐오 발언을 다수가 옳지 않다고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중요하다. 이를 지탱하는 것은 어린이, 노인,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 성소수자, 여자를 넘어선다. 


편집되지 않은 어린이는 시끄럽고 이따금 내게 실수하기도 한다, 착하지 않은 장애인은 지하철을 지연시키며 이동권 투쟁을 벌이며, 조용하지 않은 성소수자는 동성혼 합법화 및 차별금지법 입법을 위해 끊임없이 소리친다. 


편집된 어린이의 세상은, 착한 장애인의 세상이자 조용한 소수자의 세상이다. 쾌적함을 위해 나의 발언권마저 상실된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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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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