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보는 자의 권력에 관하여 - 시선의 불평등 [도서/문학]

글 입력 2023.05.01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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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누드화를 가까이 본 적이 있던가?

 

평소 작품을 볼 때 습관이 있다. 집요하게 동세, 형태, 질감 하나하나를 뜯어본다든지, 각도를 달리하면서 캔버스 옆면은 어떠한가, 주변에 설치한 작품과는 무슨 연관이 있나 살핀다든지 말이다.

 

그런데 여성의 누드가 등장하는 그림은 자세히 감상해 본 적이 없다. 내가 예술을 즐길 줄 몰라서 그런 걸까.

 

아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확실히 알게 됐다. 그건 본능적으로 회피하고 싶은, 수치스러운 그런 류의 감정에서 기반한 외면이었다. 온전히 나에게 주어진 예술 향유의 시간마저 나의 시선은 그다지 자유롭지 못했다.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미술을 공부할 학생으로서 몇 작품에서 느껴지는 불편함을 제대로 마주해야 한다. 그리고 근거에 기반한 문제점을 끌어내어 보다 여러 시각으로 작품을 바라봐야 한다는 건 분명하다.

 

캐서린 매코맥(Catherine McCormack)이 『시선의 불평등(프레임에 갇힌 여자들)』(2021)에서 제기한 의문, 그리고 그가 여러 근거를 대며 우리 안에 깊게 자리한 이미지들의 원형을 밝힌 덕분에 더 이상 미술관에 걸린 그림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지 않기로 했다.

 

 

[크기변환]시선의불평등 1.jpg

 

 

 

비너스, 어머니, 아가씨와 죽은 처녀, 괴물 같은 여성


 

‘시선의 불평등’에 관한 문제는 이전부터 다뤄졌다. 작품을 완성한 작가, 작품의 소유주, 관객이 남성이었기 때문에 시선의 권력은 그들의 것이었다. 반면 작품에서 보이는 대상은 여성, 유색인종, 식민지 주민이었기에 결국 사회상과 맞물려 작품의 주체와 객체가 확실하게 드러나는 작품이 정말 많이 견고하게 남아있다.


미술 작품은 켜켜이 쌓여 그것이 역사가 되고 당위를 만들어낸다. 게다가 실화를 기반으로 약간의 과장(혹은 아예 의미를 반전) 해 조작한 이미지는 인지하지 못할 만큼 우리 일상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알아채는 순간 한 대 맞은 듯한 기분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p.48

남성과 여성의 나체를 바라보는 시선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밎지 못하겠다면, 공공장소에 누드 여성의 조각상이 있다는 상상을 한번 해보자. 그러한 장소에서 여성의 몸은 현실의 실제 권력을 의미하고 정부 혹은 존경받는 기관을 상징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표현 형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p.53

‘베누스 푸디카(Venus Pudica, 모든 비너스의 원형)’는 성적 욕망, 그리고 나중에 문화적인 성취의 상징이 되었던 다산과 사랑의 여신을 묘사할 뿐 아니라, 비너스 그림들이 생식기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여성들의 수치심을 문화적으로 어떻게 강화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이기도 하다.


 

비너스를 떠올리면 아름다운 여성에 대한 뿌리박힌 인식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얀 대리석으로 표현한 뽀얀 살결, 적당한 곡선, 가냘프게 내린 시선. 과연 아름답다고 믿게 된 이 비너스의 전형은 누가 만들었을까?


불현듯 누드 크로키를 그린 열아홉 살 때가 떠올랐다. 유독 더웠던 2018년의 여름. 미술 대학을 가기 위해 서울에 어느 미술 학원을 잠시 다녔다. 도착한 그곳에서 처음 만난 여성 모델은 노래를 틀고, 가운을 한쪽에 내려놓고, 자유로운 제스처를 취했다. 우리는 그의 자세, 몸의 선을 주시하며 연필을 들고 스케치북에 그렸다.


혼란스러웠다.

 

2018년 그때도 우리는 여성의 몸은 그렸지만 남성의 몸은 그리지 않았다. 남자 모델을 못 구했거나 이런저런 사정이 있었다고 치자. 그러나 그때 느낀 당혹스러움은 아직도 기억한다. 그건 나도 저기 저 포즈를 취하는 여성과 동일한 성을 가져서 그랬던 걸까. 기묘하고 불편했던 감정은 크로키를 마무리할 때까지 가시지 않았다.


지난날 어머니는 ‘집안의 천사’여야 했다. 남편이 돌아올 따뜻한 보금자리를 위해 잘 관리하면서 아이들을 잘 키워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가령 17세기 네덜란드 사회에서는 바다를 항해하는 남편들을 달래기 위해 독박 육아에 시달리고, 전염병의 위기에서 두려움에 떨던 여성들이 평온하다고 꾸며낸 가정 풍경화를 생산했다.


지금이라고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양식화된 가정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상업적인 영역에 이용하면서부터 이미지에 사용된 장치들은 더욱 교묘해졌다. 핀터레스트, 인스타그램에서 해시태그로 퍼지는 정상 가족의 형태는 앞서 말한 비너스처럼 또 하나의 편견을 심어준다.


그러나 진짜 우리 엄마들의 일상은 그런 게 아니다. 집안을 ‘유지’하기 위한 그들의 정신없는 하루를 생각해 보면 마냥 좋고 평화롭다고 치부할 수 없다.



p.128

유켈리스는 ‘발전’과 ‘유지관리’의 차이를 설명하려고 했다-‘발전’이 새로운 개념과 생각을 탐구하는 창조적인 일이고 전통적으로 남성들만 추구한 것이었다면, ‘유지관리’는 ‘빌어먹을 시간 전부를 잡아먹는’ 지루하고 실용적인 일이다. (…) 그리고 이 ‘유지관리’는 여성들의 몫이었다(그리고 지금도 대체로 그러하다).


 

캐서린 매코맥이 책에서 다룬 네 가지 유형의 미술 작품 속 여성 중 ‘처녀’를 다룬 세 번째 파트가 가장 참담했다. 특히 폭력, 강간이 동반된 신화를 바탕으로 제작한 조각과 회화를 공공기관, 광장에 설치했다는 것은 께름칙하다. 이 역시 일상 속에 스며들었기에 사람들은 자각 없이 지나쳤을 것이다.


진정 안타까운 사례는 폭력 속에 노출되어 있으면서 자신을 극단으로 내모는 소녀들이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등장하는 ‘오필리아’는 주변 남성들이 죽고 나자, 결국 강에 빠져 ‘아름답게’ 죽은 인물이다.


그렇다면 남성이 부재하는 여성은 죽는 게 마땅한가? 또 그 과정이 낭만적인 것으로 포장되어 이미지로 변환되고, 잡지까지 장식하는 건 기괴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p.143

처녀의 원형은 여성이 된다는 것이 자신의 고유한 욕망에 의지해 행동하기보다 강제로(혹은 주변 상황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끌려다니기를 기다리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문화적 이미지들에서 여성의 쾌락과 욕망은 거의 눈에 띄지 않지만, 신화의 강간과 성폭력은 미술관과 박물관에서, 그리고 공공기념비나 심지어 주머니 속 동전에 새겨진 그러한 이미지들을 발견할 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지나치게 많이 보인다.


 

p.235

괴물이나 마녀를 팜파탈이라는 섹시한 가면이 아니라 자기 본연의 모습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여성의 자기결정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일 수 있다. 여성의 자기결정은 비너스의 거짓된 완벽한 외모에 대한 집착을 거부하고, 마더링의 상충되는 기쁨들을 전적으로 포용하며, 또 자신의 쾌락에 적극적이기보다 섹스와 학대에 굴복하는 착하고 수동적인 처녀를 넘어서는 다른 롤모델을 허용한다.



그래서 여성들은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인 백인 남성의 취향이 기준이 된 이미지들을 대적하기 위해 수십 년간 대안을 탐색했다. 기원전에 적힌 문서들로부터 특정 집단이 일부러 조작한 것(가령 메두사, 마녀)을 찾아냈으며, 인식을 전환하기 위해 결합하고 해체하며 애쓰고 있다.

 

공교롭게도 최근에 <존 윅 4>(2023)를 봤다. 영화에서 핵심이 되는 촬영지는 프랑스였고, 루브르 박물관을 대표하는 극적인 순간을 담은 때깔 좋은 회화 몇 점이 배경으로 아낌없이 쓰였다.


그중 눈에 띄인 건 악인의 뒤에 외젠 들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1827)이었다. 고대 아시리아의 왕 사르다나팔루스가 반란군에게 부당하게 패한 뒤, 장례용 장작더미에 올라갔고 충실한 애첩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는 것이 원작의 내용이다.


하지만 들라크루아는 사르다나팔루스가 자신의 명령에 따라 하렘의 모든 애첩과 시동을 학살하고, 애마와 개, 보물 같은 재산까지 모두 파괴하는 것을 바라보는 장면을 상상해 그렸다. 강렬한 붉은색을 사용해 보는 이로 하여금 시선이 위에서 아래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고통 속에 여인들의 몸짓이 부각된다.


더욱이 영화에서는 그림 안에 나체의 여성들과 각 잡힌 정장을 입은 남성들이 분명하게 대비된다. 책을 읽지 않았다면 미장센을 돕는 도구로써 쓰였겠구나 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그렇게 보이는 장면들을 고분고분하게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p.165

편안함은 (대부분이 그렇듯) 특권과 정치의 문제다. (…) 리베카 솔닛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모르고 있을 권리…… 고통을 생각하지 않을 권리”가 얼마나 편안한지 생각하게 한다.

 


[지소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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