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애프터썬’,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기 [영화]

시간이 지나면서 선명해지는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글 입력 2023.04.21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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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썬’은 31살 어린 아빠 캘럼과 11살 소피의 튀르키예 여행을 선명한 현재와 흐릿한 캠코더 영상으로 넘나든다. 영화는 저화질의 캠코더 영상으로 시작한다. 곧이어 영상은 모자이크처럼 흐트러지고, 검은 배경 가운데의 사람을 점멸하듯 보여준다.


첫 장면의 알 수 없는 흐름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계속된다. 누군가의 기억, 캠코더에 남은 기록, 그리고 누군가는 볼 수 없었던 장면까지. 정확한 이야기를 알려주지 않고 뒤죽박죽 쪼개진 장면을 제시한다. 마치 우리의 실제 기억처럼 말이다.


아무리 인상적인 기억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파편처럼 생각나기 마련이다. 잊고 있던 어느 한 부분이 한참 지나 비슷한 일을 겪을 때 갑자기 떠오르기도 한다. 


캠코더에 남은 영상은 실제 경험보다 흐릿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기억이 조각처럼 남는다면 캠코더는 상대적으로 또렷한 기록 장치가 된다. 뒤섞인 기억과 기록을 따라가다 보면 보면 어른이 된 소피가 캠코더를 통해 캘럼의 흔적을 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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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보면 소피의 회상만을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화에서는 소피가 볼 수 없었던 캘럼의 모습도 보인다. 위험한 난간을 밟고 올라선 모습, 어두운 바다를 향해 뛰어가 잠기는 모습, 혼자 큰 소리를 내며 우는 모습은 그가 위태로운 상태임을 짐작하게 한다.


그런 상황에서도, 아니 그런 상황이어서 더 그랬을까? 소피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닦는 손길에서는 사랑이 묻어난다. 반대로 소피가 캘럼에게 똑같이 해주는 모습은 마치 사랑이라는 감정을 학습한 것처럼 느껴진다. 샬롯 웰스 감독은 “나는 이 영화가 슬픔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슬픔을 초월하는 사랑에 관해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 기분 있잖아, 집으로 돌아왔더니 지치고 멍한데 뼈들이 제대로 안 움직이는 느낌.

몸에 힘이 없고 다 그냥 지쳐서 가라앉는 것처럼 이상한 기분 말이야.

 

 

사람이 벼랑 끝에 몰린 때라고 해도 24시간 내내 슬픔에 빠져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웃고, 평소와 다르지 않게 행동하다가 한순간에 물에 잠식된 것처럼 몸을 움직이기 힘든 상태가 된다. 어린 소피는 캘럼이 우울한 상태라는 것을 몰랐겠지만, 어느 정도 우울이라는 감정을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어떤 이유로 얼마나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당시의 어린 소피뿐만 아니라 자식이 생긴 어른 소피마저도 알 수 없다. 그저 그런 상황에서 영원히 머물고 싶은 튀르키예 여행의 기억을 만들어 준 캘럼을 그리워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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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제목 ‘애프터썬’은 타기 전에 바르는 썬크림과 다르게 햇볕에 이미 탄 후에 바르는 복구용 크림을 말한다. 캘럼은 캠코더에 모든 것을 담지 않는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를 소피에게는 이야기해 주지만, 캠코더는 끄고 이야기하려 한다. 자신이 떠난 후에 소피에게 애프터썬과 같은 회복과 위로를 안겨주기 위해서였을까.


나는 제목을 직역하여 ‘태양 뒤에'라고 생각해보았는데, 소피가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는 행성처럼 느껴졌다. 행성은 항상 태양의 빛을 받고 있지만 영원히 만날 수 없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회전하는 행성과 뒤늦게 캘럼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소피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여행의 마지막 날 밤, 둘은 사람들 사이에 껴서 춤을 춘다. 이때, 점멸하던 장면이 춤을 추는 둘의 모습과 중첩된다. 어른이 된 소피와 변하지 않은 얼굴의 캘럼. 어른 소피와 캘럼은 격하게 싸우다가 결국 포옹한다. 계속해서 캠코더를 돌려 보고, 캘럼의 슬픔과 기쁨을 이해하려 애쓴 결과다.

 

 

하지만 사랑은 우리가 밤의 끝자락에 있는 사람들을 보살피게 하고

또 사랑은 우리가 스스로를 돌보는 방식까지 바꾸게 하지

이건 우리의 마지막 춤이야

 

 

이 장면에 배경음악으로 깔린 Queen의 Under Pressure는 소피가 아빠를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노래 같았다. 여행을 마지막으로 다시 만나지 못했을, 그 마지막 춤을 기억하며 떠올리는 노래 말이다. 왜 스스로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지 않았냐고 원망하는 듯하면서도 사랑 때문에 그만큼 버틸 수 있었던 캘럼을 기억 속에서 끌어안는 것이다.


소피가 캠코더를 셀 수 없이 돌려본 후에야 캘럼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듯이 ‘애프터썬’을 여러 번 보고 나서야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선명해지는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어떤 매개를 통해 곱씹는 많은 소피의 기억이 갈 수록 선명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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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예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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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 명왕성
    • 좋은 해석 잘 읽었습니다.
    •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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