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어느새 흠뻑 젖어든, 연극 몬순 [공연]

"서로 너무 멀지만, 다르지 않다는 거."
글 입력 2023.04.20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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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단]몬순_포스터.jpg

 

 

 

연극 <몬순>


 

‘몬순’은 계절풍을 뜻하는 단어로, 비를 동반한 바람이다.

 

작품은 전쟁과 거리상으로 혹은 심리적으로 멀어보이는 9명의 인물의 일상을 통해 어느새 흠뻑 그들을 적시고 통과하고 있는 전쟁을 이야기한다. 이들의 일상은 우리와 닮아있지만, 그들의 이름과 사는 곳은 가상의 것으로 낯설다.

 

불과 몇십 년 전에 전쟁을 겪은 나라에서 살고 있지만,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전쟁을 멀고 먼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로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극을 보다 보면, 이 낯선 이들의 이름에 우리의 이름이 겹쳐 들어가는 걸 느낄 수 있다.

 

 

[국립극단]몬순(2023)_홍보사진06.jpg

 

 

전쟁 중인 나라인 타트 출생 네이지는 무기 회사 직원인 차미와 그의 아들 굴의 집에서 홈스테이를 하고 있다. 네이지는 어린 굴을 위해 밤마다 산책을 좋아하는 괴물 이야기를 만들어 들려준다. 아직 타트에 남아 식당을 운영하는 가족들에게 세 시간마다 한 번, 위태로운 전화를 걸며. 대학원생 새벽은 미디어아트 졸업 전시 주제인 '전쟁'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고민하며 전쟁에 관련된 사람들을 인터뷰하기 시작한다.

 

또 다른 전쟁 국가에서 사진 취재를 하는 이삭과 타트에서 온 교환학생 코우쉬코지는 그런 새벽에게 자꾸만 혼란을 가중시킨다. 유치원에서 일하는 리오와 타트 출신 안무가 문은 오래된 커플로, 퀴어 페스티벌 참가를 앞두고 현실을 녹인 2인극 콩트를 만들어 선보이기로 한다. 친구 홀키를 관객으로 앉혀둔 채 장면 연습을 반복해보지만 그들은 그들의 삶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자꾸만 난관에 부딪히는데…….


이들이 존재하는 동안, 방향을 알 수 없는 작은 바람이 무대의 곳곳에서 불어온다.


 

"차미가 서있는 그곳과 내가 있는 곳은 서로 너무 멀지만, 다르진 않다는 거."


 

 

재현


 

[국립극단]몬순(2023)_홍보사진02.jpg

 

 

작품이 전쟁을 재현하고 말하는 방식이 뜻깊다. 네이지가 전쟁의 공포에 휩싸여 케즈의 장난에 대응하지 못할 때, 새벽은 전쟁 배경 게임을 하고 있다. 이처럼 작가는 하나의 물리적 무대 공간 내에서 서로 다른 장면을 병치함으로써 우리 일상에 스민 전쟁에 대해 보여준다.


전쟁을 비롯한 폭력 소재는 재현의 문제를 안고 있다. 폭력을 재현하는 과정이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재현된 폭력이 폭력의 대표로서 일반화될 가능성이 있다. 피해자를 재현하는 데 있어 그들을 대상화하거나 타자화함으로써 폭력은 스펙터클로써 소비될 수 있다. 더하여 그것이 실화를 바탕으로 할 때, 폭력으로 찢긴 누군가의 경험은 서사로 구성될 시 왜곡될 가능성이 크다.


작가는 이러한 재현의 문제를 9명의 인물 각각의 일상을 하나의 물리적 공간에서 교묘하게 겹쳐서 풀어냄으로써 다각도에서 접근한다. 무대 위 9명의 인물은 무대라는 하나의 물리적 공간을 공유하고 있다. 하나의 물리적 공간은 각각 다른 공간이 된다. 연극의 시공간적 한계가 예술적 특성으로 피어나는 순간이다. 그러나 관객의 눈앞에서, 서로 다른 몸이 물리적 실체로 하나의 물리적 공간에서 얽히는 모습은 또 다른 가능성을 떠올리게끔 한다. 우리가 얼마든지 얽힐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작가는 세 가지 내러티브에 걸쳐 전쟁을 다면적으로 표현한다. ‘유리 괴물’, ‘미사일엔 낙하산이 없다’ 그리고 ‘몬순’. 전쟁은 네이지의 이야기 속 ‘유리 괴물’처럼 “시간도 공간도 먼 곳에” 있을 것만 같다. 작품 속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타트는, ‘붕붕’이 서른 밤을 꼬박 날아야 도착할까 싶은 곳에 있다.

 

이 작품 속에서 직접적으로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고통받는 사람은 등장하지 않는다. 목소리만이 등장할 뿐, 그 몸은 보이지 않는다. 전쟁은 그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스펙터클로서, 예술의 소재로서, 호기심의 대상으로, 게임 속 배경으로, 생계를 위한 수단으로 스며들어 있다. 그들은 물리적으로, 심리적으로 거리를 두고 전쟁을 대하고 있다. 그러나 전쟁은, 굴이 본 유리괴물처럼 어느새 성큼 다가와 눈앞에 있다. “있어! 여기에! 내가 봤어.”


굴은 성큼 눈앞에 다가온 괴물의 투명한 몸에 비친 자기 자신의 얼굴을 본다. 비당사자와 당사자, 피해자와 가해자로 이분할 수 없게 모두가 유리 괴물의 몸에 뒤엉킨다. 굴은 유리 괴물을 목격하고 겁에 질려 옷장 안에 숨는다. 리오는 그런 굴을 달래기 위해 괴물이 누구도 자신을 해치지 못하게 하기 위해 꾸며낸 속임수라고 말한다. 과연 유리 괴물에 비친 ‘나’의 얼굴은 속임수인 걸까? 오히려, 리오의 말은 전쟁에 대한 방관을 합리화하는 어떤 담론과 유사해 보인다.

 

작품은 여기서 이야기를 끝내지 않고 산책을 좋아하는 괴물 이야기가 변주되고 있음을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서 밝힌다. 작품은 이런 논점을 남긴다. 전쟁이 과연 어떠한 수단을 통해 온전히 표현될 수 있을까. 누군가의 기억과 어떤 버전의 서사가 역사로 기록되며 폭력을 대표할 수 있을 것인가. 누군가의 기록이 더 쉽게 배제될 수 있는가. 폭력이 서사화될 때 그것이 체계화될 수 있다는 우려를 어떻게 고려할 것인가.

 

 

 

"도망치지 않는 방법 하나 가르쳐 줄까."



자칫 보면 이 작품이 무력감을 느끼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작품 속 인물들은 무력감에서 멈추지 않고 나아가길 선택한다. 도망치지 않기 위해 리오가 새 고추 모종을 사 와 심듯이, 그들 마음속에 변화의 씨앗이 깃든다.

 

작품 말미에서 관객들은 무대 위에 선 9명의 인물 사이를 통과하는 바람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선명한 빗소리도. 코우쉬코지는 더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겉도는 느낌에 혼란스러워하는 새벽에게 말한다. “우리 다 여기 있어.” 경험하지 않고는 절대 도달할 수 없는 중심부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재현하고 생각하기를 멈춰야할까. 코우쉬코지는 말한다. “내가 정말 궁금한 건. 새벽이 왜 거기 서 있는지야.” 멈춰서는 안 된다. 우리가 왜 여기 있는지.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고, 작품은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코우쉬코지와 새벽을 따라, 숨을 들이쉬며, 여기에 숨이 깃들어 있음을 실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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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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