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에든버러 여행기

건설적 고독에 관하여
글 입력 2023.04.08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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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1월, 새해가 되자마자 추가하는 짐 없이 런던에서 에든버러로 가는 항공권을 예매했었다. 2박 3일 동안 필요한 것은 조금의 현금, 한 여벌의 옷과 책, 노트, 혹시 배고파질 때 먹을 빵이었다. 단촐히 챙긴 가방만큼, 혼자 떠나는 이 여행의 시작이 홀가분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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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는 해리포터의 모티프가 된 만큼, 런던과는 분명 다른 매력이 있었다. 오랜 시간을 머금은 건물들의 빛바랜 색, 울퉁불퉁한 돌담길 때문에, 살아보지도 않은 과거에 들어온 듯한 신비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조금 더 외곽 쪽은 심지어 진흙 길이 많아서, 호텔에 돌아오면 매일 밤 신발에 묻은 흙을 털어내야 했다. 


사실 이 지역은 그리 춥지 않은 계절일 때, 가장 예쁘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도착했을 때의 한겨울의 에든버러는 비가 살짝씩 오는 흐린 날씨였다. 스콧 기념탑 주위에 있는 넓은 공원에도 거의 인적은 없었고, 비바람이 부는 거리에서 가이드를 듣는 사람들의 표정 역시 그다지 밝아 보이진 않았다. ‘뭐 이런 날도 있지...’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긍정 회로를 돌렸었다.


그러나 나의 약소한 바람과는 무색하게 여행 두 번째 날엔 빗발이 더 거세지기 시작했고, 결국 아무 상점들 속으로 들어가 잠시 비를 피하는 방법을 택하게 되었다. 다행히 이 방법은 성공적이었는데, 에든버러의 유명한 빅토리아 거리에는 해리포터 기념품들과 위스키, 비스킷, 캐시미어 목도리 등 유명한 선물 목록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파도 같이 밀려오는 비구름을 피하기 위해 돌담길로 만들어진 터널을 지나갈 때의 묘미도 있긴 했다. 


그렇게 하나둘 생각나는 선물들을 사다 보니 어느새 비가 그쳐서, 공원에 앉아 점심을 먹을 준비를 했다. 축축한 벤치 위에 아무거나 깔고 앉을 것을 찾아 앉았다. 가져온 빵을 꺼내고 따뜻한 커피를 입에 대었다. 근데 그 순간 정말 정적이 찾아왔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혼자 떠나 온 것이 덜컥 실감 났다. 그 공원엔 족히 백 년은 넘게 서 있었던 것 같은 아주 큰 나무가 있었는데, 그 순간엔 나와 그 나무 둘뿐이라고 느껴질 만큼 주위가 조용했다. 

 

그리고 이 짧은 정적의 시간 사이로 ‘내심’의 마음이 마구 튀어나오고 있음을 느꼈다. 내심 햇빛이 들지 않아서 아쉬웠던 속내를, 아니 사실은 내심 새해가 되면 괜스레 싱숭생숭해지는, 그저 모른 척했던 생각들이 노크도 없이 들이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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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나’의 초라한 시간들을 감추려 이리저리 바쁘게, 복작복작한 소리 가운데 내가 아닌, 정말 조용한 세계에서의 나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곧 빛이 들어올 순간을 기다리며 고유의 색을 잃어버리지 않고 견디는 조용한 시간의 흐름이, 곳곳에 고여있던 감정을 자꾸 들여다보게 했다. 짧은 기간 내 여러 관광지를 돌았지만, 결국 이번 여행을 뜻깊게 만들어주는 건 아무도 의식하지 않은 곳, 낡은 시간의 흐름만 가는 공원. 커피 한 잔과 빵 한 조각. 나만의 시간. 조용한 이 찰나들이었다.


*


그래서 홀로 여행을 할 때, 자신이 만들어가는 하루가 된다는 점이 가장 특별하다. 어디를 갈지 계획하고, 어디서 시간을 보내는지 등에 대해 홀로 생각하고 가끔은 다른 곳으로 가보기도 하는 것. 공원에서의 점심은 사색하기로 결정한 시간이고, 직접 혼자만의 생각으로 채우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 안에서 통제권을 가지고 자신의 삶에 대해 생각하는 것. 그 시간은 나중에 두고두고 보아도 귀하다.


데이비드 소로는 이전에 ‘건설적 고독(Constructive Solitude)’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그에 따르면 고독은 개인의 내면을 단단하게 건설하는 힘이 있다. 버지니아 울프도 말했듯이, 모두 저마다의 방을 갖고, 그 방 안에서 자신의 중심을 찾는 일, 내 방의 세계를 점점 더 확장하되, 외부적 요인으로부터도 자신의 방을 휩쓸리지 않도록 지키는 일, 그것이 자기다워지는 길임을 서술했다. 이처럼 자기만의 방을 고독과 사색으로 건설하고 확장하는 일은 중요한 과정이며, 외로움과는 확실히 다른 차원이다.


타지에서 혼자 살며 알게 된 것은, 이러한 고독한 순간들을 거쳐 심리적 독립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모순덩어리인 자신을 그대로 마주하는 의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혼자만의 세계를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는 삶의 태도, 자신의 미래를 자신의 정의하는 가치관으로 계획해 보는 데까지, 모두 고독의 연장선이며, ‘나’를 짓는 건설적 과정이 된다. 이는 조금 더 지혜를 보유한 성인으로서 자라나기 위한 필수적 단계가 된다.


*


고마운 공원을 떠나며, 빛바랜 나무를 눈에 한 번 더 눈에 담고, 비 온 뒤 촉촉해진 습한 향기를 맡았다. 흐리지만 봄이 되면 아름답게 꽃피울 이곳에서의 짧은 시간이 향후 분명 도움이 될 것이라 여기며, 이내 무거운 마음을 털어내고 다시 곳곳을 여행해 보았다. 이제는 또 다시 새로운 곳을 향해 발을 디뎌볼 시간이다.

 

 

참고 자료

헨리 데이비드 소로, 『소로의 문장들 - 한 권으로 만나는 소로의 정수』, 마음산책,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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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은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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