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때로는 눈 감고 사는 게 편할 때도 있습니다?! [영화]

영화 <올빼미>를 음미하면서...
글 입력 2023.04.07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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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


 

맹인이지만 뛰어난 침술 실력을 지닌 ‘경수’는 어의 ‘이형익’에게 그 재주를 인정받아 궁으로 들어간다. 그 무렵, 청에 인질로 끌려갔던 ‘소현세자’가 8년 만에 귀국하고, ‘인조’는 아들을 향한 반가움도 잠시 정체 모를 불안감에 휩싸인다.

 

그러던 어느 밤, 어둠 속에서는 희미하게 볼 수 있는 ‘경수’가 ‘소현세자’의 죽음을 목격하게 되고 진실을 알리려는 찰나 더 큰 비밀과 음모가 드러나며 목숨마저 위태로운 상황에 빠진다. 아들의 죽음 후 ‘인조’의 불안감은 광기로 변하여 폭주하기 시작하고 세자의 죽음을 목격한 ‘경수’로 인해 관련된 인물들의 민낯이 서서히 드러나게 되는데...

 

 

*

아래부터는 해당 영화에 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때로는 눈 감고 사는 게 편할 때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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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이 너무 많으면 보이는 것도 그에 따라 늘어난다. 보이는 것이 증가하면 생각 또한 많아지기에 내 머릿속은 물음표로 가득 차게 된다. 그러나 영화 <올빼미>를 마주한 뒤 새로운 이념을 가지게 되었다.

 

영화 <올빼미>는 낮에는 앞이 보이지 않는 소경이지만 밤에는 희미하게 앞을 볼 수 있는 주맹증을 앓고 있는 침술사 천경수의 시선으로 전개된다. 천경수는 심장병을 앓고 있는 동생을 보살피며 침술사의 꿈을 가지고 있었다. 우연히 이형익 어의의 눈에 들어 궁에 침술사로 들어가게 된다.

 

‘맹인 침술사’이기에 많은 이들이 처음에 그의 능력에 의문을 품었지만 그 의심은 소현세자를 치료한 후 눈 녹듯이 사라졌다. 그러나 경수를 둘러싼 인물들은 그가 밤에 앞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경수도 이를 주변에 말하거나 소문 내지 않았다. 이 사실을 처음 발견한 것은 청에서 돌아온 소현세자. 그는 일찍이 경수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의 병마저 잘 활용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러나, 경수와 소현세자의 우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소현세자에게 시침을 하기 위해 이형익 어의와 함께 동궁으로 찾아간 어느 밤, 경수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소현세자는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고 촛불이 바람에 흔들려 꺼지게 되자 앞이 보이지 않던 그는 처참한 광경을 마침내 보고야 말았다. 이형익 어의가 소현세자에게 독약을 시침하고 있었던 것.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였지만 경수는 보이지 않은 척해야 했다.

 

분명히 보았다. 보았지만 그는 목격자가 될 수 없었다. 처음부터 계획된 경수의 입궁 그리고 누군가의 계략. 경수는 무서웠다. 보고 싶지 않은 사실을 마주했을 때, 그는 절망에 휩싸였다. 더불어 누가 맹인의 증언을 믿어주겠단 말인가. 과연 경수는 이 사실을 묵인할 것인가 혹은 목격자로서 진술을 할 것인가.

 

소현세자가 맹인 침술사 천경수의 눈이 밤에만 밝아진다는 것을 알아챈 후 둘의 대화를 들여다보자.


 

소현세자: “너는 어찌하여 밤에 눈이 트인다는 사실을 숨기면서 사느냐”

천경수: “때로는 눈 감고 사는 게 편할 때가 있사옵니다.”

 


눈 감고 살아간다는 것. 아무것도 안 보일 정도로 캄캄하다면 답답할 것이다. 평생을 캄캄한 어둠 속에서 살아왔던 그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보인다”는 것은 많은 책임을 가져온다. 내가 보았기에 증명해야 하고, 내가 보았기에 말해야 한다. 무거운 책임은 내가 보았다는 사실만으로 내 어깨를 짓누를 때가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볼까? 내가 좋아하는 두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서로를 싫어한다.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그리고 다른 사람은 한 사람에 대한 험담을 ‘나’에게 늘어놓기 시작한다. 내가 보고 들었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들은 ‘내’가 마치 그들의 의견에 동조한 것처럼, 들어줬으니 받아줬으니 너한테도 책임이 있다는 것처럼 말한다. 나는 이런 상황을 정말 많이 겪어보았다. 이럴 때마다 한 생각은 천경수의 생각과 동일하다.

 

“차라리 눈을 감고 귀를 닫고 살았더라면 삶이 훨씬 더 편해지지 않을까.”

 

모르는 것에 대한 답답함이 아는 것에서 오는 불편함보다 나에게 가벼운 짐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천경수가 자신의 주맹증을 탓하고 비난하는 모습을 보면 안타까웠다. 보려고, 들으려고 하는 욕심은 절대 나쁜 것이 아닌데 내가 눈을 감고 귀를 닫고 싶은 원인은 늘 나의 주위로부터 오는 것 같아 마음이 많이 불편했다. 천경수도 나도 당당하게 밝히고 싶다. 나도 볼 수 있다고, 나도 말할 수 있다고. 그러나 참고 있는 것뿐이라고!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경수는 나와 달리 그가 본 모든 것을 토해낸다. 단순히 사실을 내뱉는 것이 아닌 뭐가 옳고 뭐가 그른지를 정확히 분별하여 온 대신들과 궁인들에게 ‘선포’한다. 물론 낮에 말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내 앞에 있는 것들이 대체 무엇인지조차 파악할 수 없는 소경이 인조보다도 그리고 나보다도 훨씬 더 객관적으로 사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로써 증명되었다. 삶의 편안함을 위해 귀를 닫고 눈을 감는 것은 잠시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삶의 짐을 소멸시키고 싶다면, 내가 진실로 사실에 다가가고 싶다면 눈을 감는 것이 아닌 눈을 뜨고 “제대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 방향이 어디든지에 상관없이 내 생각을 빛에 반사시켜 보이게 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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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부분은 소현세자와 인조 사이의 갈등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남한산성의 굴욕을 당한 인조와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아들 소현세자. 소현세자는 청나라의 문화를 받아들여 조선을 성장시키고자 했지만 인조는 직접 당한 굴욕의 역사가 아직 머릿속에 남아있기에 소현세자의 뜻을 인정하지 못하고 반대한다. 사실 정치와 역사에 정확한 답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조의 태도는 나의 편의와 나의 욕심으로 “제대로” 보지 못한 축에 속한다. 청과의 교류를 무조건적으로 반대하기보다는 청과의 교류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더불어 잃는 것은 무엇이 있는지 한 나라의 왕으로서 “제대로” 봤어야 한다. 이미 역사는 역사로 남았지만, 만약 내가 소현세자였다면 인조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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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제대로 보는 법”을 가르쳐 주는 영화이다. 제대로 보기가 어려운 이 현대 사회에 제대로 말하기도 힘든 세상이 오지 않도록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경수의 눈과 입을 빌려 이야기하고 있다. 당신은 지금 당신이 처한 상황을 제대로 바라보고 있는가? 만약 제대로 바라보고 있지 못하다면 지금 영화 <올빼미>를 보았으면 좋겠다. 내가 아직 언급하지 않은 커다란 반전 속 제대로 볼 수 있는 방법을 또한 이 영화에서 발굴해낼 수 있지 않을까?

 

눈을 감고, 귀를 닫고 사는 것은 편하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그 편함은 누굴 위한 편함인가.

 


[임주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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