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데미안이 될 것인가, 크로머가 될 것인가 [공연]

당신의 얼굴을 찾아
글 입력 2023.04.03 14:40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제목 없음-1.jpg

 

 

데미안은 떠났다. 싱클레어는 알에서 깨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했고, 서서히 알의 표면에 균열을 일으키며 얼굴을 허공으로 내밀고 있을 것이다. 지난달 26일, 뮤지컬 <데미안>은 막을 내렸지만, 데미안과 싱클레어가 우리에게 남긴 조각들은 생생하게 날이 섰다.

 

<데미안>은 이분법적 잣대를 부수고자 한다. ‘선도 악도 아닌, 어른도 아이도 아닌, 남자도 여자도 아닌’ 얼굴을 가진 ‘데미안’. 싱클레어의 지향점이었던 그 ‘이상향’은 극이 진행한 캐릭터 프리, 젠더 프리를 통해 의미가 더해진다. 싱클레어를 연기한 배우가 다른 회차에서는 데미안이 되고 데미안을 연기한 배우가 싱클레어가 되기도 하는 모습, 그리고 데미안과 싱클레어의 성별이 지워지는 모습은 이 이야기가 가닿는 독자층을 넓힌다. 이상적이지만 이상 그 자체는 아닌, 그리고 원작에서는 남성으로 그려지지만 성별의 제약이 없는 보편적인 ‘데미안’을 뮤지컬 <데미안>은 그려낸다. 싱클레어로 표상되는 우리는, 누구나 투쟁해 알을 깨고 데미안이 될 수 있다.

 

밝은 온실 같은 ‘선’의 세계에 살던 싱클레어는 ‘악’의 세계에 살던 크로머와 어울리고 싶어서 거짓말을 한다. 과수원의 황금빛 사과를 훔쳤노라고. 거짓을 신 앞에서 맹세한 싱클레어는 크로머의 협박에 옴짝달싹 못 하며 소중한 것들을 그에게 갖다 바친다. 실은 모두 본인의 선택에 따른 결과의 연쇄 작용이었으나 그는 단 한 번의 실수였다며,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스스로를 연민한다. 자신의 악행을 알아채지 못하는 부모님의 모습에 우월감을 느끼면서, 자신에게도 선택권이 있다는 걸 확인받고 싶었다고 합리화하면서 말이다.

 

데미안의 도움으로 크로머에게서 벗어나게 된 싱클레어는 그를 우상화하며 따른다. 데미안은 그에게 ‘카인과 아벨’ 이야기를 들려준다. 기존 성경에서 인류 최초의 살인자이자 ‘악’으로 표상되는 ‘카인’의 이마에 새겨진 표식은, 실은 낙인이 아니라 그의 비범함을 보여준다는 내용이었다. 공인된 ‘선’의 세계에서 배운 내용과는 정반대였다. 그렇게 싱클레어의 세계는 서서히 넓어진다.  

 

나의 꿈이 너의 길을 찾는다

나의 길이 너의 꿈을 향한다

 

길을 배회하던 싱클레어는 피스토리우스를 만난다. 그는 불을 피워 ‘완전한 신’을 찾고자 하는데, 불길이 잦아들자 자신의 몸을 던지려 한다. 싱클레어는 “당신이 있어야 불을 볼 수 있다”며 그를 만류한다. 싱클레어는 피스토리우스를 만나 한층 더 성장한다. “우린 이야기를 너무 많이 했어요. 이야기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어요”라며, 데미안이 과거의 자신에게 남겼던 말을 그에게 똑같이 남기며 그를 떠난다.

 

이후 싱클레어는 데미안의 어머니인 에바 부인을 만난다. 그녀의 “새는 알 밖의 세계가 어떤지도 모른 채 그저 깨어나려 투쟁한다”는 말에 싱클레어는 ‘인간에게는 날개가 없다’고 반문한다. 날개가 없어서 도처에 널린 인생의 슬픔과 고통을 너무도 가까이서 봐야 하는 건 고통스럽다며 말이다. 그러나 그는 후에 깨닫는다. 인간은 저마다의 별을 향해 절벽에서 뛰어내리고, 그 기나긴 떨어짐에서 날개를 찾는다고.

 

알에서 깨어나려 투쟁하는 새

알은 곧 하나의 세계

 

태어나려는 자

하나의 세계와 투쟁하라

 

싱클레어는 전쟁통에서 다시 데미안을 마주한다. 그리고 처음으로 싱클레어가 데미안에게 먼저 손을 내민다. 그동안 싱클레어에게 손내밀고 그의 얼굴을 쥔 건 크로머와 데미안이었으나, 이번엔 반대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말한다.

 

“너의 얼굴을 찾았구나.”

 

 

 

폐허 속에 빛나는 별


 

선과 악의 구분이 없었던 태초의 인간. 선과 악의 경계를 지우는 싱클레어의 움직임은 그 태초 인간의 춤사위와 닮았다. 구분이 없던 ‘무(無)’의 상태로 돌아가고자, 구원에 닿고자 몸부림치지만 그럴 수 없다. 극 중에서 피스토리우스가 거대한 손 그림자에 매달리고 손을 뻗어대는 연출은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음영으로 보여준다.

 

우리는 셀프(self, 내면적 자기)와 에고(ego, 사회적 자아)가 힘을 겨루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힘겨루기에 온전히 집중하기는 어렵다. 외부에는 수많은 자극이 도사리고 있고, 그 자극을 버텨내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에고가 몸집을 부풀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을 깨기 위해서는 내부의 동력이 필요하다. 내면의 거대한 움직임, 셀프가. 그것에 집중해 힘주지 않으면, 우리는 진정한 자신을 잃어버리고 크로머가 되길 택할지도 모른다. 고민 없이 사회적으로 괜찮은 모습만을 갖추기 위해 지름길을 택한다면 크로머가 될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싱클레어가 성장하며 느꼈듯 선과 악은 명료하게 구분되지 않지만, 적어도 자기 내면에 귀 기울이고 살아가는 데미안이 되길 선택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내면의 성찰 없이 사회적 자아만 키워나간다면, 누군가가 알을 깨고 나오고자 하는 투쟁을 가로막아 버릴 수도 있을 테니.

 

당신의 선택이다. 어떤 얼굴을 가질지는.

 

 

 

IMG_0433.JPG

 

 

[정은지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7.24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