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우리를 환대하는 낯선 세계로 - '미래과거시제' 배명훈 작가

글 입력 2023.04.02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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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에 한국 이름을 가진 인물이 나오고 한국을 배경으로 사건이 일어나는 게 낯설지 않은 2023년은 한국 SF의 황금기이다. 오늘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한국 SF’라는 것이 생소하게 느껴지던 시절부터 묵묵히 작품을 창작해 온 여러 작가 덕이다. 『타워』를 시작으로 15여 년간 다양한 작품을 발표해 온 배명훈 작가도 그중 한 명이다. 전형적인 틀을 거부하고 고유한 영역을 만들어내며 그 자체로 하나의 장르라는 평을 듣는 그가 세 번째 단편소설집 『미래과거시제』로 돌아왔다. 


은경, 은수, 소희… 어디에나 있을 것 같은 친근한 이름들이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안내한다. 거기에는 전염병의 여파로 한국어에서 파열음이 사라진 미래(「차카타파의 열망으로」)가 있고, 돈 쓰는 게 존재 목적인 로봇(「수요곡선의 수호자」)이 있고,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 시간 속의 연인(「미래과거시제」)이 있다. 새로운 세계의 규칙을 이해하는 즐거움을 느끼고 군데군데 흩어진 유머를 발견하며 책을 읽다 보면 이 세계의 설계자, 배명훈 작가가 궁금해진다. 지난 27일, 책 출간 후 바쁘게 지내고 있는 그를 만나 오랫동안 가꿔 온 ‘배명훈 세계’를 들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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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에서는 우리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세계 전체에서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다는 감각이 중요하거든요.” 

 


『미래과거시제』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그동안 꾸준히 작품을 발표해 오셨지만 단편소설집으로는 7년 만인데요, 소감을 듣고 싶습니다.


7년 만이라고 하니 굉장히 오래된 것 같은데요, 단편소설집을 7년 만에 냈을 뿐 그동안 여러 단편을 발표하고 에세이집과 장편소설도 출간하며 바쁘게 지냈어요. (웃음) 이번 책은 지난 몇 년간 다양한 지면에 발표했던 단편 중 9편을 골라서 엮은 거예요. 많은 분이 추천사를 써주셨고 표지도 잘 나와서 책을 받아보고 기분이 정말 좋았어요. 여러 가지로 완성된 느낌이에요. 곽재식 작가님이 추천사에 써주신 것처럼 이 책이 제 대표작이 될 거라고 이야기하고 다니는 중입니다. 

 

 

책에 수록된 아홉 편의 단편은 어떤 기준으로 고르신 건지 궁금해요. 


그동안 썼던 것들을 돌아봤을 때 SF에서 ‘경이감’이라고 하는 느낌을 잘 담고 있는 작품, 작가로서 어떤 확신이 좀 더 강하게 느껴지는 작품을 뽑았어요. 적절한 작품을 잘 고른 것 같아 만족스러워요. 

 

 

책을 읽으며 팬데믹의 흔적을 여기저기서 느낄 수 있었어요. 대중교통 마스크 의무 해제가 발표된 지금 시점에서 소설을 쓸 당시를 돌아보면 또 다른 느낌일 것 같습니다. 작가님께 팬데믹은 어떤 시간이었나요? 


팬데믹이 매우 ‘SF적’인 기간이었다고 생각해요. SF에서는 우리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세계 전체에서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다는 감각이 중요하거든요. 예를 들어 어떤 신기술을 사용하는 개인의 일상을 다룬다면 그 신기술로 인한 변화는 주인공만의 특수 사항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함께 겪는 것이어야 한다는 거죠. 우리나라의 방역 시스템이 주목받으며 잠시 세계 방역의 표준이 되기도 하고, 각 나라의 확진자 수에 주의를 기울이는 등 팬데믹 기간에는 나의 경험이 전 세계 사람의 경험과 연결된다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그래서 SF를 쓰기에 적절한 시기가 아니었나 싶어요. 실제로 쓰는 사람도 늘어난 것 같고요. SF 작가로서는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각 작품마다 작가노트가 실린 것도 눈에 띄었어요. 특별히 작가노트를 실은 이유가 있을까요?


추천사에서 정소연 작가님이 제가 한국 SF에서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는 말씀을 해주셨어요. 누가 만들어낸 길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자신의 길을 만들어내고 있음을 인정받은 거라 제게 굉장히 의미 있는 말인데, 그 말은 곧 다른 사람이 제 작품에 대한 해설을 쓰기가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잖아요. 저는 독자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해설이 들어가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고민하던 중, 다른 분에게 부탁드리기가 어렵다면 제가 직접 쓰면 되겠다 싶었어요. 작가노트는 그렇게 쓰게 되었습니다. 

 

 

아홉 편의 작품 중 「미래과거시제」가 표제작이 된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출판사에서 회의를 한 결과 ‘미래과거시제’가 제목으로 좋다는 분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고 들었어요. (웃음) 저는 ‘임시 조종사’와 ‘접히는 신들’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임시’나 ‘접히는’ 같은 단어가 단편집 제목으로 들어가기에는 그다지 어감이 좋지 않다는 의견이 있었죠. 저도 ‘미래과거시제’가 잘 정해진 제목이라고 생각해요. 책에 실린 단편 중에는 언어와 시간을 다룬 게 많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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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쓸 때면 늘 질문이 또 다른 질문을 불러옵니다. 

그렇게 이어지는 질문이 제가 소설을 계속 쓰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해요.” 

 


수록된 작품 중에서 작가님이 가장 마음이 가는 작품 또는 쓰면서 가장 즐거웠던 작품은 무엇인지 들어볼 수 있을까요? 


쓰는 데만 8개월이 걸린 「임시 조종사」를 꼽을 수 있을 듯해요. 판소리 형식으로 소설을 써보겠다는 구상은 예전부터 해 왔지만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릴 것 같아 손을 못 대고 있다가, 팬데믹으로 일정이 다 취소되던 시기에 집필을 시작했습니다. 제가 장편소설 초고를 집필하는 데 보통 3개월이 걸리는데 중편소설 규모인 이 작품에 그 두 배가 넘는 시간을 썼으니 그만큼 수고가 많이 들어간 거죠.


쓰면서 재밌었던 건 「차카타파의 열망으로」예요. 파열음이 사라진 미래 이야기를 파열음을 사용하지 않고 썼어요. 새로운 언어 규칙을 만들어 소설에 적용하는 작업, 가독성을 크게 해치지 않으면서도 독자에게 새로운 느낌을 줄 수 있는 언어 규칙에 대해 편집자와 의논하는 작업이 재미있었습니다.

 

 

저도 그 두 작품이 좋은 의미로 충격적이었어요. 해당 소설들을 다른 지면에 처음 발표했을 때 독자 반응은 어땠나요? 기억에 남는 반응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임시 조종사」는 주변에 국문학 전공하신 분들과 동료 작가분들이 많이 좋아하셨어요. 일반 독자분들은 아무래도 많이 어려워하셨죠. (웃음) 판소리 형식으로 쓰였기에 한자를 거의 모르는 세대에서는 더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듯해요. 이번 책으로 이 소설을 처음 접한 독자분들은 어떻게 읽었는지도 궁금합니다. 반응을 더 많이 들어보고 싶은 작품이에요.


「차카타파의 열망」은 무엇보다 오타를 제보하는 전화가 많았어요. 출판사로 전화도 오고, 웹사이트에 댓글도 달렸죠. 제 작품 『타워』를 영어로 번역하신 류승경 선생님이 꼭 번역하고 싶다며 연락하신 작품이기도 해요. 번역이 완료되어 조만간 미국에서 공개될 예정입니다. 일본어로도 번역되었는데, 나중에 번역 출간된 『타워』 리뷰에 어떤 분이 「차카타파의 열망」을 언급한 것도 신기했어요. 여러 가지로 단편소설치고 꽤 반응이 많았던 작품입니다. 

 

 

「홈 어웨이」에는 한 문장을 쓸 때마다 함성이 나오는 애플리케이션으로 슬럼프를 이겨내는 소설가가 나옵니다. 작가님도 15년 넘게 소설가로 살며 주인공처럼 슬럼프를 겪은 적이 있나요? 있었다면 어떻게 그 시기를 지나오셨는지 궁금합니다.


당연히 있었는데 출판계가 느리게 흘러가서 티가 안 났던 것 같아요. (웃음) 제가 슬럼프를 겪는 기간이 출판계 입장에서는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던 거죠. 


슬럼프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소설을 쓰며 새로운 시도를 해보려는 마음과 사람들이 읽기 좋게 쓰려는 마음 사이에서 고독해질 때가 있어요. 그럴 때는 동료 작가들이 도움이 돼요. 눈을 낮추지 말고 제가 하려는 새로운 시도를 계속해보라고 말해주는 분들이 있거든요. 특히 SF 작가이면서 SF 비평 쪽으로도 높은 안목을 가진 정소연 작가님의 존재가 많은 자극이 되었습니다. 


독자분들에게서도 많은 힘을 얻어요. 제가 발표하는 작품마다 다 챙겨봐 주시는 분들, 이 소설은 꼭 책으로 내달라고 하시는 분들이 계세요. 덕분에 소설을 계속 쓰고 있습니다.

 

 

작가님은 작품의 아이디어를 주로 어디서 얻으시는지 궁금합니다. 소설 창작을 위해 요즘 새롭게 관심 갖고 계신 분야가 있는지도 궁금해요.


저는 주로 연구를 하며 자료를 모으고 소설을 써요. 연구라는 건 단편적인 아이디어를 얻는 것을 넘어서 직접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맞는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기에, 소설을 쓸 때면 늘 질문이 또 다른 질문을 불러옵니다. 그렇게 이어지는 질문이 제가 소설을 계속 쓰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방식의 창작이 힘들긴 하지만 덕분에 고갈되지 않고 새로운 걸 계속 찾을 수 있는 것 같아요. 


2020년~21년에는 외교부에서 연구 용역을 줘서 화성에서 사람이 사는 시대 화성의 글로벌 거버넌스에 대해 연구했어요. 그 연구 내용을 소설로 쓰는 작업을 하는 중이에요. 연작소설집으로 내려 하는데 지금 네 편은 발표했고, 두 편을 더 써서 올해 말쯤이면 작품들을 모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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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는 낯선 곳, 새로운 곳, 자꾸 집 밖으로 나가야 하는 이야기예요. 

인물이 집 안에서 생각에 잠기면 SF는 진행될 수가 없어요.”

 


「수요곡선의 수호자」는 인공지능이 예술을 포함한 산업 전반의 주체가 된 세상이 배경인데요, 읽으면서 최근 화제가 된 챗GPT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작가님은 인공지능 시대 창작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들어보고 싶습니다.


챗GPT를 창작에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이것저것 실험해보는 작가님들도 계세요. 저도 생각하는 활용법이 몇 가지 있어요. 예를 들어 제가 쓰는 소설 안에서 또 다른 소설 텍스트가 필요할 때가 있는데, 결국 제가 쓰는 거면서 평소 제 스타일과는 달라야 하니 어렵거든요. 그런 텍스트를 챗GPT가 써준다면 편할 거예요. AI 창작자가 일반화되는 시대에는 오히려 인간 창작자만의 영역이 새롭게 생겨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그래도 본질적으로 AI가 위협이라는 생각은 듭니다. 제가 글 쓰는 스타일을 AI가 학습해서 그대로 베낄 텐데, 그걸 막는 조치도 생겨나면 좋겠어요. 조만간 책을 내면 ‘AI가 학습하는 걸 거부합니다’ 같은 안내문을 쓰는 날이 오지 않을까요.

 

 

『우주섬 사비의 기묘한 탄도학』의 ‘작가의 말’에서는 한 편의 이야기를 무겁게 풀어낼지 경쾌하게 풀어낼지 갈림길에서 신나는 스텝을 자주 선택한다고 하셨는데요, 이번 책에서도 그 ‘신나는 스텝’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작가님이 냉소 대신 택하는 ‘신나는 스텝’에 대하여 좀 더 들어보고 싶습니다. 


문학계에는 우울하고 슬프고 괴로운 이야기가 너무 많아요. 왠지 그런 이야기가 더 있어 보이기도 하죠. (웃음) 저도 그렇게 쓸 수 있겠지만, 웃음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는 작품은 희소하니까 그 길을 가고 싶어요. 사실은 그게 더 어려워요. 내가 만들어놓은 설정 안에서 문제가 해결되는 희박한 경우의 수를 찾고, 그걸 설득력 있게 풀어내야 하거든요. 정말 많은 고민이 필요한 작업이지만 어렵게 쓰고 나면 저도 즐거워집니다. 


많은 독자분들이 제 소설을 다정하다고 말씀해주시는 건 SF라는 장르와도 관련이 있을 것 같아요. SF는 낯선 곳, 새로운 곳, 자꾸 집 밖으로 나가야 하는 이야기예요. 인물이 집 안에서 생각에 잠기면 SF는 진행될 수가 없어요. 제 작품에는 그 낯선 곳에서 주인공이 환대받는 경험이 나오기에 더 다정하게 느껴지는 게 아닐까요. 「임시 조종사」의 지하임이 낯선 곳에 뚝 떨어져 길을 찾는 과정에서 맛있는 밥을 얻어먹고 나서부터 내가 이 공간에 들어갈 수 있구나 생각하는 것처럼요. 


세계를 향해 모험하는 인물들이 나오고 세계도 그들을 계속 괴롭히지만은 않는 이야기, 누군가는 너를 도와주겠다 말을 거는 이야기. 저는 그런 걸 쓰고 싶어요.

 

 

작가님의 평소 가치관이 반영된 결과일까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요. 인간에 대한 일반적인 신뢰는 갖고 있지만 인간의 구체적인 면면을 좋아하지는 않거든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는다는 평을 오래 들어 왔는데 반은 맞고 반은 아니에요. (웃음) 저는 제 소설의 서술자가 저보다 훌륭한 사람이라고 자주 생각해요. 소설을 쓰며 나보다 훌륭한 서술자의 목소리에 자꾸 빙의하다 보면 저도 더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변해가는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미래과거시제』 독자분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유쾌하게 읽을 수 있는 작품도 있고 좀 어렵게 다가오는 작품도 있을 것 같아요. 요즘은 쉬운 글만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저는 좀 어려운 글을 읽음으로써 만날 수 있는 새로운 세계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저도 작가로서 발전할 수 있고요. 지난 몇 년간 발표한 작품을 종합선물세트처럼 모은 책이니 재미있게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

 

내가 살아가는 이 세계는 어디로 나아가고 그 속에서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갈까. 알 수 없는 미래에 불안해지다가도 배명훈 작가의 작품 속에서 그 미래를 살아가는 인물을 보면 왠지 용기가 생긴다. ‘은경’, ‘소희’처럼 나와 비슷한 이름을 가진 이들이 나와 비슷하게 평범한 감정을 느끼며 일상을 보내기 때문이다. 모든 게 다 나빠지기만 하는 디스토피아가 아니라 조금 낯설어도 정 붙일 구석이 남아 있는 ‘배명훈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면, 미래도 괜찮지 않을까. 다음 이야기를 궁금해하며 책장을 넘기는 마음으로, 앞으로 나아갈 다짐을 해본다.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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