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슬픔이여 안녕, 그리고 사랑이여 안녕 [도서/문학]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글 입력 2023.03.31 14:59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사랑의 모순증명



'언니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멋쩍어하면서 다소 뜬금없는 질문을 던지던 애의 추천 덕분으로 이 책을 읽었다.


어디서 들었는데 '정의'라는 단어를 듣고 무엇을 떠올리는지 보면 그 사람이 문과인지 이과인지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Justice를 떠올리면 문과이고 definition을 떠올리면 이과라는데, 나는 학창 시절을 전부 문과로 살았으면서도 자꾸만 definition을 기웃거리는 유형의 사람이다. Justice를 적재적소에 언급하기 위해서도 definition이 필요하지 않겠느냐면서.

 

그 때문에 나에게는 추상적인 단어의 definition을 궁금해하는 오래된 습관이 있다. 그래서 사랑이 무엇인지 묻는 말은 흥미로웠지만, 정작 답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에 처하자 쉽게 말문을 뗄 수 없었다. 그 애의 메모장에는 같은 질문을 받은 여러 명의 답변이 적혀 있었는데, 모두 사랑을 다르게 정의하고 있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그만큼이나 사랑을 정의하려는 시도는 방대하지만, 그처럼 수많은 정의들이 과연 모두 엄밀한가는 누구도 자신 있게 답하지 못할 것이다.


극도의 추상성과 범용성을 지닌 개념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다만 지나치게 학술적인 관점은 잠시 내려놓자. 일전에는 사랑만큼이나 미지의 개념인 행복을 정의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그때 누군가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너나 나나 행복이 무엇인지 정확히는 몰라도 불행이 무엇인지는 아니까, 그걸 피해서 살아가다 보면 행복에 도달해 있을 거라고. 이것은 내게 참신하고도 유용한 시도로 느껴졌는데, 수학에서 A를 증명하기 위해 not A를 증명하는 모순증명법처럼, A가 무엇인지 알고자 한다면 어쩌면 그 반대로 여겨지는 개념으로 눈을 돌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게끔 했기 때문이다.

131.jpg


쎄씰에게 사랑이란 무엇이었는가


 

<슬픔이여 안녕>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질문이 있다면,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다.


쎄씰은 방탕한 생활을 즐기는 아버지와 함께 파티와 클럽을 전전하면서 아버지와 그 주변인들이 사랑을 정의하는 방식을 그대로 답습한다. 쎄씰은 사랑에 대해서는 '데이트라든지 키스, 권태 같은 것' 밖에는 알지 못했으며, 쎄씰의 사랑은 강한 열정이고 곧 쾌락이었다. 이런 종류의 열정은 휘발성이라는 특징을 지니는데, 이 탓에 쎄씰이 가지고 있는 사랑의 추억은 언제나 얼굴 없는 익명성으로 뭉뚱그레진다. 함께했던 사람의 얼굴도 행동도 주변의 풍경도 강렬한 열정에 휩싸여 휘발되어, 사랑의 순간은 그저 '어떤 얼굴, 어떤 행동'으로 기억되며 오직 '돌연한 감동'만이 덩그러니 남을 뿐이다. 그런 쎄씰에게는, 휴양지에서 만난 매혹적인 남성인 씨릴 역시 휘발성의 쾌락을 가져다주는 얼굴 없는 대상이었으며, 쎄씰은 처음 경험한 쾌락의 순간에 사랑이라는 이름표를 붙인다. 

 

그런 쎄씰에게 사랑이 '한결같은 애정, 다정스러움, 부족함'이라고 말하는 여성이 있다. 이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쎄씰과 안느의 관계였다. 소설 전반에서 안느와 쎄씰의 관계는 갈등의 탈을 쓴 상호의존의 형태로 드러난다. 적어도 내가 분석하기로는, 안느야말로 쎄씰과 진정으로 사랑했던 상대방이었으며, 그렇게 생각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쎄씰은 갑작스레 나타나서는 졸업 시험 준비에 몰두하라면서 자유로운 자신의 삶을 통제하려는 안느에게 거부감을 느끼지만, 그러한 거부감의 이면에서도 쎄씰은 안느가 언제나 옳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다. 안느가 단순히 옳다고 생각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나아가 쎄씰은 안느에게 강렬한 끌림을 느낀다. 쎄씰은 '그녀(안느)의 간결하고도 결정적인 표현이 나를 매혹시켰다'면서, 고고하고 지적인 안느 아래서 자라는 자신의 미래를 상상하기도 한다. 

 

또한 안느는 쎄씰에게 구체적인 순간을 살도록 만드는 인물이다. 그가 사랑했다고 믿었던 다른 사람들과의 순간에서 구체성은 언제나 휘발된 채 익명성만이 남았다면, 쎄씰은 안느와 이야기를 나눌 때면 '완전히 열중해 있'는 채로 '충실하고도 어려운 순간들을 살'게 된다. 이처럼 안느는 단순히 적대적인 대상이 아닌, 쎄실에게 자아와 세계를 감각하는 새로운 방식을 선사해 준 이다. 씨릴이 육체적 관계를 통해 쎄씰 육체의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 주었다면, 안느는 정신적인 살아있음을 선물했던 것이다. 

 

이때 안느 역시 쎄씰을 통제하고 억압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으며, 때로는 쎄씰에게 의존하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파티에서 아버지의 지인인 웨브와 샤르르가 안느를 곤란하게 만들 때, 쎄씰은 일부러 안느를 칭찬하고 안느와 아버지와의 관계를 한층 깊어지게끔 만들며 분위기를 전환한다. 이날 이후 안느가 커피 한 잔과 함께 쎄씰을 찾아왔던 장면에서는, 안느가 쎄씰의 행동에 감사와 애정을 느끼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물론 이들의 관계를 성애적 사랑으로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모녀도 친구도 아닌 이 두 인물 간에 구축된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사랑이 아니라면 과연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어쩌면 안느와 쎄씰은 닮았다. 주체적이고 당당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지키고자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사랑과 슬픔의 상보성 


 

[크기변환]16456F154B2EDB6618.jpg

 

 

앞서 말했듯이, 쎄씰은 사랑을 정열과 쾌락으로 정의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쎄씰의 정의는 이야기의 후반부에서 다시금 붕괴하는데, 그토록 열정적으로 사랑했다고 믿었던 씨릴을 보며, 쎄씰은 그가 마치 아무도 모르게 잊힌 책 속 등장인물 같다면서 사실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깨닫는다. 

 

그렇다면 쎄씰은 그 누구도 사랑한 적이 없었는가? 이 소설의 결말은 사랑의 허무함과 공허함으로 귀결되는가? 이 소설의 결말은 오히려, 씨릴이 아닌 안느와의 관계로부터, 그리고 슬픔으로부터, 사랑의 허무함이 아닌 사랑의 실존을 그토록 통렬하게 확인하게끔 해 준다.

 

씨릴에 대한 감정 변화로 인해 사랑이 정열과 쾌락이라는 쎄씰의 정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반증되고,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작품 그 어디에도 사랑에 대한 수정된 정의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행복에 대한 정의 대신 불행에 대한 정의를 내놓았듯이, 쎄씰은 사랑이 아닌 사랑의 상실로 인한 슬픔으로써 어렴풋하게나마 사랑의 존재를 깨닫는다. 

 

그토록 냉담하고 침착했던 안느가 울면서 떠날 때, 쎄씰은 그가 '어떤 관념적 실체가 아니라 살아 있고 느낄 수 있는 인간에게 도전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마침내 안느가 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쎄씰은 그가 느껴 본 적 없던 감정인 슬픔을 마주한다.  

 

이 책의 제목에서 '안녕'은 헤어질 때의 인사가 아닌 만날 때의 인사다. 쎄씰의 삶에는 쾌락과 정열만이 가득했기에 그에게 슬픔은 너무나도 낯선 감정이었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거대한 행복의 근원은, 세상이 온통 행복으로 둘러싸여 있을 때는 차마 발견할 수가 없다. 아주 소중하고 빛나는 무언가가 있었다는 사실은, 오직 상실을 겪은 뒤에서야 뒤늦게 깨닫는 법이다. 

 

이처럼 사랑과 슬픔은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상보적인 개념이며, 결국 슬픔에 대한 인사는 쎄씰이 그동안 뭉뚱그레 휘발시켜 왔던 사랑의 실체를 처음으로 확인하는 계기가 된다. 쎄씰은 슬픔을 맞이하면서, 동시에 떠나가는 사랑에게는 정중한 작별 인사를 건넨다. 물론, 쎄씰은 여전히 사랑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아마 앞으로도 오랫동안 모를 것이다. 그러나 쎄씰은 마침내 발견한 것이다. 사랑이 거기 있었다는 사실을. 슬픔이 아니었다면 그 자취조차도 느낄 수 없었던 사랑을, 흔적으로나마 느끼고 품는다. 슬픔이여 안녕(bonjour), 사랑이여 안녕(adieu).

 

 


그리고, 사랑이여 안녕



책의 저자인 사강의 삶은 그야말로 불꽃 같았다. 그런 그가 나의 이런 해석을 듣는다면 어쩌면 크게 웃을지도 모르겠다. 사강은 '사랑을 믿느냐'는 질문에, "농담하세요? 제가 믿는 건 열정이에요. 그 이외엔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사랑은 이 년 이상 안 갑니다. 좋아요, 삼 년이라고 해 두죠"라고 답했다. 그런 그에게 사랑이라니. 

 

그러나 앞선 질문은 사랑을 믿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라기보다는 사랑이 영원하다고 믿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세상 모든 것들이 결국은 휘발될 터라면, 사랑 역시 예외는 아닐 것이다. 타오르는 불도 언젠가는 꺼지듯이 사랑도 그러하리라. 

 

사강과 쎄씰이 본 사랑의 속성은 열정, 즉 불의 속성이다. 그렇다면 나는 타고 남은 재의 속성을 보고자 한다. 그토록 뜨겁게 불타올랐다면 정말이지 모든 게 소실되었어야 마땅한데, 이제는 형태조차 알아볼 수 없이 재가 엉성하게 남아 있다. 

 

사랑은 동사로서의 사실이다. 뜨겁고 격렬한 불길 속에서는 타오르는 '사랑한다는 사실'을 차분히 직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타고 남은 재는 '사랑했다는 사실'이다. 타오르던 사실은 사라졌지만, 적어도 그 자리에 무언가가 존재했음을 증명할 사실만이 남았다. 그리고 이 사실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은 슬픔이다. 

 

쎄씰은 사랑의 정의는 알지 못했지만 적어도 자신이 사랑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모 시인의 말마따나 타고 남은 재는 기름이 된다. 혹은 비료가 되고, 습기제거제가 될 수도. 그렇기에 사랑이 무엇인지 평생 모를지라도, 사랑했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는 과연 얼마나 클 것인가.

 

 

[김채영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6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