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을 읽고 [도서/문학]

글 입력 2023.03.30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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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을 꾸역꾸역 읽었던 기억이 있다. 읽는 과정은 힘들었지만, 읽고부터는 내가 고민해 왔던 일련의 사유들이 한데 모아 정리되는 기분이 들어 뿌듯했던 기억이 있다.

 

어떻게 본다면 내가 철학적인 사고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라고 볼 수도 있겠다. 최근 철학 서적을 다시 뒤적이기 시작하면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을 다시 펼쳐보게 되었고, 공부했던 바를 정리하고자 한다.

 

 

 

무엇이 계몽의 변증법인가?


 

과거의 자연은 인간이 지배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자연은 야만스러운 것이고, 우리에게 위협을 가하는 존재였다. 인간은 자연스레 자연의 야만스러운 자연의 위협에 맞서고자 하였다. 이때 인간에게 효과적인 수단이 되었던 것이 바로 '이성적인 사고'이다.

 

인간은 이성적인 사고를 통해 자연을 이용하고 지배하고자 하였으며, 우리는 이것을 '계몽'으로 인식한다. 이렇게만 본다면 우리는 자연을 완전히 지배했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사실상 이러한 행위는 다시금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를 초래하였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는 인간이 계몽으로써 도래시킨 사회에서의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욕구와 감정과 같은 자연스러운 내적 본능을 도구적 이성의 통제 아래 복종시키는 것을 말한다. 자연과 신화를 부정하며 탄생했던 계몽이, 다시금 인간의 내적 본능마저도 통제하게 만든 야만의 모습으로 이끌게 한 것이다.

 

바로 이것이 계몽이 만들어 낸 계몽의 변증법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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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지배의 이차적인 변형


 

오늘날의 인간은 자연지배라는 목적을 위해 자연을 조작하는 데 성공하였다. 자연은 이제 단순히 이성을 통해 지배할 수 있는 대상이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연지배는 다시금 사회적 지배를 만들게 된다.

 

그렇다면 인간이 물리적인 자연을 지배하는 것을 자연지배로 보고, 인간이 자신의 외적 자연을 지배하는 것을 사회적 지배로 보겠다. 이러한 인간의 자연지배와 사회적 지배에는 구조적 관계가 존재하는데, 그것은 자연을 지배한다는 것은 항상 사회적 지배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 역으로 사회적 지배의 결과로서 이해될 수도 있다는 역설적인 구조이다.

 

이는 자연지배를 재화와 노동의 분배를 관철한 사회적 지배구조의 성립을 배제하고서는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로 설명될 수 있다.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여 제1의 자연으로부터 철처히 해방되었으나, 그럴수록 노동은 언제나 정의롭게 분배되는 것이 아니었고, 이에 자연스레 자기보존을 위해 분업을 선택하게 되며, 오히려 제2의 자연의 강제에 말려들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어떻게 본다면 자연지배는 1.인간이 외적 자연을 지배하는 것으로 보는 사회적 지배와, 2.인간의 내적 자연을 지배한 것으로 보는 인간의 자기지배로 이차적으로 변형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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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구적 이성에 대해


 

우리가 만들어 낸 이성에 따라 자연은 특정 체계 아래에서 객관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대상이 되었다.  사회적 진보는 이성을 도구화하였고 개별적이고 특수한 모든 것을 보편적인 것으로 묶어 내었다.

 

이렇게 모든 것이 기계적인 사고로 관통하는 사회에서는 인간이 진리를 찾고자 하는 행위 역시 여기서 비롯된 도구적 검증으로밖에 해석될 수 없다. 이때 도구적 이성은 객체를 지배할 수 있는 것으로 환원하고, 주체도 객체를 물화시킨다. 이제 개별적이고 특수한 것들의 객체와 주체의 질은 모두 상실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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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


 

막강한 자연의 위협에 맞서 생긴 도구로써의 계몽은 다시금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를 초래한다. 인간은 자연의 위험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해방시켰으나, 이성을 통해 새로운 사회의 질서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자신을 이성이라는 획일적인 가치로 묶어 억압시키게 될 수밖에 없다.

 

인간이 자신의 내적 자연을 완벽히 지배하는 데는 자신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이 필수적이다. 사회적 지배와 억압에서부터 벗어나기 위한 자기통제가 내면화되어 철저한 자기검열이 이루어지고, 이는 곳 자기소외 현상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성취를 위해 본능을 억누르고 비이상적으로 노동하는 것, 공부하는 것, 그로 인해 느끼게 되는 무력감 및 자아를 상실감 등이 그 예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은 자신들이 지배한 자연에서의 원활한 자기보존을 위해 다시금 자기 자신을 억압시킬수밖에 없다.


어떻게 본다면 ‘인간 자신이 자연’이라는 의식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계몽의 변증법을 통해 이러한 의식 체계 자체가 말살되어 버리는 순간 인간 개인의 삶의 목표와 의식은 쓸모없는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해방을 위한 외적 자연의 지배는 다시금 내적 자연의 지배를 조성하였고, 이것은 주체로서의 자연, 객체로서의 자연 모두의 파괴를 만들어 낼 뿐이었다.

 

이러한 파괴는 주체 자신의 객체(자연)로부터의 소외, 다른 주체(타인)으로부터의 소외까지 이어질 수밖에 없다. 자기를 보존하기 위해 일구어 내었던 방법인 지배 때문에 다시금 자유에 이르지 못하고 속박에 묶이게 된 인간은, 종국에는 자신을 부정하는 비극을 맞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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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 방법?


 

자본주의로 점철된 사회를 살아 가고 있는 지금, 읽는 내내 동의하는 부분이 꽤 많았지만 완전히 그렇다고 할 수 없었던 대목도 상당 부분 존재했다. 계몽은 진실로 인간을 몰락시켰다고 할 수 있는가? 우선 여기에 대한 대답을 어떻게 내리는 게 좋을지 부담이 되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인간의 부활을 위한 해결 방법은 무엇이 있을지에 대한 고민은 결국 다시 자연의 부활로 이어지는데, 그렇다면 이렇게까지 기술이 발전하고 계몽이 우리 시대를 지배한 현 순간에서 자연의 부활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지 등등에 대한 고민이 지속적으로 이어졌던 것 같다.


 

[신채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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