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번아웃, 그 중간에서 만난 봄 [사람]

글 입력 2023.03.27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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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시큰둥한 시기가 있었다. 저번 주말에 이걸 했어요. 내일은 여기에 가보려고요. 하는 지인들의 말에 그래요. 잘 다녀와요. 미적지근한 대답을 했고, 가끔 내 안에서 샘솟는 열정에도 ‘굳이’라며 물을 뿌렸다.


영화를 보러 외출 준비를 하고, 한 끼 식사를 위해 재료를 준비하고, 출근 전 내 머리와 몸을 단장하는 일이 번거로웠다. 주말이면 친구와의 약속을 미루고 침대에 몸을 내던진 후 손가락을 제외한 근육을 최대한 움직이지 않는 것에 행복감을 느꼈다. 몸과 마음에 변화가 없고 에너지 소모가 적은 상태를 평온하다고 여겼던 것 같다.


나에게 주어진 일만 끝내고, 그 외에는 굳이 감정과 체력 소모할 일을 만들지 않는 일상이 여러 날 반복됐다. 그렇게 시간은 시냇물처럼 졸졸 빠르게 흘러갔다.


그리고 벌써 일주일이나 밀린 일기를 몰아 쓰려고 노트를 펼쳤는데, 쓸 게 없다.

당연하지. 본 것도, 경험한 것도 적고, 느낀 감정도 없는데. ‘어제 퇴근하고 집에 와서 쉼. 오늘도 퇴근하고 집에 와서 쉼.’이 전부인 하루들이었다.


문득 이 생활에 익숙해지면 내 인생 전체가 거대한 물줄기처럼 콸콸 지나가겠구나. 손에 잡히는 것 없이 속절없이 흘러가겠구나 싶었다. 침대에 누워 SNS로 다른 할머니들 해외여행 사진 보고 있을 민주 할머니를 상상하니 정신이 번뜩 들었다.


뭐든 해야겠다 싶어 집에서 나와 무작정 걸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여러 생각으로 뒤엉켜 가닥이 잡히지 않았지만 그냥 계속 걸었다. 그렇게 30분. 쌀쌀한 날씨에도 몸에 열이 오르고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앞만 보며 걷다가 외투를 벗을 때 그제야 주위가 시야에 들어왔다. 살랑살랑 꼬리 흔드는 강아지, 엄마에게 재잘재잘 유치원 일과를 보고하는 아이, 휴대폰에 대고 마트에서 무슨 재료를 사 가면 되는지 묻는 젊은 남자. 춥지도 않은지 얇은 옷을 입고 꺄르르 웃는 여학생들.


세상이 이렇게 알록달록했었나?


저 강아지 보송한 털을 보니 미용 다녀온 지 일주일도 안 지났구나. 저 아가는 얼마나 신나는 하루를 보냈길래 복숭앗빛 웃음을 짓고 있을까. 저 남자는 아내랑 함께 어떤 저녁 메뉴를 만들어 먹을까. 어릴 때는 몰랐는데, 그맘 때는 화장 안 해도 예쁘다는 게 뭔지 알겠다. 불순물이 하나도 섞여 있지 않은 학생들의 웃음은 너무나도 싱그럽고 사랑스러웠다.


나만 빼고 봄이 왔었나 보다. 거리에는 활짝 핀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들이 스스로 일상을 피워내는 행위 자체는 이상하게도 나에게 위로와 응원이 되어 다가왔다. 왜 이렇게 즐거움이 충만한 세상을 침대 위에 갇혀 보내고 있냐고 보채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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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골목 어딘가의 식당에서 고소한 음식 냄새가 날아왔고, 허기짐을 느꼈다.

 

집에 들어와 오랜만에 파스타를 만들어 먹었다. 파스타 면을 삶고, 마늘과 버섯을 볶고, 내가 좋아하는 로제 소스를 듬뿍 부었다. 그리고 선물 받은 채로 몇 달이 지난 레드 와인도 한 병 꺼냈다. 예쁜 그릇과 와인잔을 테이블에 놓고, 좋아하는 재즈 음악을 틀었다. 모처럼 집에서 먹는 근사한 저녁 식사였다.


식사를 끝내고 소파에 앉아 어느새 먼지가 쌓인 책을 펴 독서를 했다. 일면식 없는 저자의 해외 유학 생활에 왜 내 가슴이 뛰는 건지. 떨리는 발표를 하고 눈물을 한바탕 쏟은 후 외국 친구들의 찬사를 들었을 때는 나도 함께 벅차올라 눈물이 찔끔 맺히기까지 했다.


책 한 권을 완독하고 보니 벌써 밤 12시. 자리에 누워 스르르 눈을 감았는데, 저기 안에서부터 행복감이 살금살금 올라와 퍼졌다.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느꼈고, 충만했던 내 하루가 자랑스러웠다.


지금껏 내 세상을, 내 우주를 비좁게 만들고 있던 건 스스로였던 게 자명해졌다. 나 하나 쪼그려 누울 수 있는 공간에서는 감정도, 열정도 사치였다. 고작 집 밖 동네에 나갔고, 요리를 했을 뿐인데 내 세상은 분명 넓어졌다. 이렇게 스스로 피워내는 일상도 꽤 향긋하구나.


자꾸만 몸을 일으켜 집 밖으로 나가야겠다. 책을 읽고,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일상에서 마주치는 모든 것에 반가워하며 그렇게 넓어진 내 세상을 살아가야겠다. 그렇게 살아가다보면 나도 누군가를 피워낼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김민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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