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고전을 고전의 방식으로 : '코리아 이모션'

글 입력 2023.03.25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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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은 어렵다. 오래된 예술이 지니는 정형성이야 더할 나위 없이 명확하고 튼튼하나, 그것이 되려 역기능도 한다. 현시대와 동떨어진 이미지와 이야기. 발전은 어디서부터 어디로 향하는가. 시작점은 모르겠어도 끝점은 언제나 똑같다고 본다. 경계의 붕괴, 즉 둘로 나누어 편을 가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태 말이다.


인간이 만든 모든 것들을 생각해도 그렇다. 기존에 있던 것에서 영감을 받아 이어지고, 서로 따라 하고, 합치고, 일부만 떼어서 확장하여 여기까지 오지 않았는가. 가장 와닿는 예시는 사람을 보면 자연히 볼 수밖에 없는 각자의 옷차림, 패션이려나. '원래' 등산할 때 입는 옷이나 신발가지가 일상생활에서 불쑥 등장했고, '예전에' 입던 스타일을 그대로 따라 입고 쓰는 요즈음. 빠른 변화가 민감한 반응을 발전의 초석으로 삼은 산업이라 그런지 '~할 때'라는 특정성을 서서히 무너뜨리는 것 같다.


이러한 변화가 클래식에도 닿고 있을까, 궁금증을 안고 공연을 관람했다.

 

 

2023 정기공연 코리아이모션 포스터.jpg

 
 

본격적인 공연 시작 전, 단장님이 어떤 의도로 극을 만들었는지, 무엇이 결합된 형태인지 설명하셨다. 키워드는 크로스오버와 네오클래식.

 

먼저 크로스오버. 단어 뜻 그대로 선을 넘는, 그러니까 두 개 이상의 것을 한데 섞는다는 의미였다. 그러면서도 고전주의를 다시금 따르는. 그래서인지 한국스러움을 '정(情)'으로 정의했다. 다른 나라에서는 단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그래서 어쩌면 정의조차 내리지 못할 정서. 안무가 또한 이 정서에 집중하신 듯했다.


덧붙여 무용과 발레의 차이를 몸소 움직임으로 보여주셨다. 전자는 밖으로 뻗는, 후자는 안으로 굽이치는 느낌. 나처럼 클래식 문외환인 관람객에게 반가운 설명이었다. 안과 밖을 비교해 가며 몸짓을 읽어보기 좋을 것 같아서. 프로그램은 총 9가지로, 여성과 남성이 쌍을 이뤄 추는 8 인무부터 성별을 나눈 4 인무와 2 인무까지 있었다.

 

1. 여성 남성 8 인무

동해 랩소디 Rhapsody of the East Sea


2. 여성 4 인무

달빛 유희 Dancing Moonlight


3. 남성 4 인무

찬비가 Cold Rain


4. 여성 2 인무

다솜  Dasome


5. 남성 2 인무

다솜  Dasome


6. 여성 2 인무

미리내길 Mirinaegil


7. 여성 남성 4 인무

비연 Bee Yeon


8. 남성 2 인무

달빛 영 Moonlight Young

 

9. 여성 남성 12 인무

강원, 정선 아리랑 Arirang

 

 

2021( Korea Emotion 1 ) - ⓒ Universal Ballet_photo by Kyongjin Kim 1.jpg

 

 

시작은 강렬했다. 무용가들이 양쪽에서 나와 강강술래 하듯 중앙에서 빙빙 돌며 원형을 만들고. 두 팔은 옆으로 벌리되 쭉 펼치지 않고 어깨를 말아 무언가를 끌어안는 모양새였다. 거기에 위아래로 움직임까지 더해지니, 탈춤이나 한국 전통춤에서 보이던 '얼쑤!'를 발레와 접목시킨 게 아닌가 싶었다. 문득 이 노래의 제목이 '동해 랩소디'라는 걸 떠올리며, 노래와 춤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고 느꼈다.


8 인무라고 해서 모든 무용수가 내내 무대에 머문 것 아니다. 일부는 무대 옆으로 빠지고, 들어서고, 빠지고, 들어서고. 단체 안무는 대부분 무대 구성에 따라 인원수를 가감한다지만, 비단 같이 차르르 흐르는 옷을 입어서인지 그 움직임이 파도를 연상시켰다. 여성 무용수들의 옷은 푸른 계열이기도 했고 말이다.


고막을 울리는 장단을 뒤로하고, 이제는 같은 성별끼리 4 인무와 2 인무를 연달아 선보였다. 여성 무용가들과 남성 무용가들의 순서가 번갈아 나오다 보니 자연스레 그들 간의 대비가 느껴졌다. 떠나간 상대를 그리워하는 설정은 똑같아도 표현 방식이 완전히 달라진달까. 이때부터 궁금증이 일었다. 팔을 쭉쭉 뻗어 각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것 같은데 왜 한쪽은 여리고 조심스러운 반면, 다른 한쪽은 강하고 뚜렷해 보이는지.

 

 

2021( Korea Emotion 1 ) - ⓒ Universal Ballet_photo by Kyongjin Kim 5.jpg

 
 

가장 큰 차이점은 발의 보폭 같았다. 기다란 치맛자락이 몸을 감싸서 여성 무용가들은 상대적으로 자유분방하고 빠른 발놀림이 어려워 보였다. 물론 종종걸음으로 무수히 턴을 돌며, 발목에 닿던 끝자락이 양옆으로 펼쳐져 꽃을 만들던 대목은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했다. 남성 무용가들의 옷은 상대적으로 단순하였는데, 대신 부채를 활용한 춤을 선보였다.


치맛자락과 부채.

 

몸으로 표현하는 분야이다 보니 자연히 어디부터 어디까지 신체로 간주하여 보여줄지 고심하는 것도 중요한 연출의 일부일 테다. 얼마 전 보았던 책의 각주가 떠올랐다.


 

그레고리 베이트슨은 시각장애자의 지팡이를 신체의 일부로 볼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지팡이가 신체의 외부에, 그것과 분리되어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에게 중요하지 않다. 상실된 신체 기능을 보완한다는 점에서 지팡이는 틀니(몸에 삽입되지만 탈착이 가능하다)나 인공심장(몸에 삽입되며 탈착이 불가능하다)과 본질적인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틀니나 인공심장이 신체의 일부라면 지팡이 역시 그럴 것이다.

 

책 '사람, 장소, 환대' 서문 각주 6)에서 발췌

 


책에서 이야기하고자 했던 바는 장애가 있는 사람의 신체를 가리키기에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 하지만 사람의 신체 외의 사물까지도 신체로 간주한다는 관념만을 가져와, 관람에 접목해 보았다. 그러자 흰 부채를 펼치고 접는 일련의 동작이 다르게 느껴졌다.

 

부채춤이 아닌, 한 손끝이 부채인 사람들의 춤. 손가락 끝에서 몸선이 멈추는 게 아니라 부채의 끝까지 이어진다. 게다가 품이 적당하면서도 발목 언저리는 타이트하게 잡힌 바지의 모양새는 움직임을 전혀 제약하지 않는다. 부채를 날개처럼 펴고 자유롭게 뛰놀듯 무대를 큼지막하게 오가던 몸놀림.


반면, 여성 무용가들은 자신의 몸선에 거의 딱 들어맞는 의상을 갖췄다. 치마가 자유롭게 펼쳐져 빠르게 턴을 할 때마다 신체로 간주할 부위는 넓어지나, 그 크기는 크지 않다. 꽃봉오리가 피어나기 전후를 비교하며 위용을 느끼진 못하듯. 그리고 보폭이 좁고 발꿈치를 뗀 사뿐한 걸음은 무게를 더 가벼이 보일 뿐이다. 자연스레 무대의 끝에서 끝까지 크게 움직이기보다는 정적임이 강조되었다.


위로 뛰어오르는 움직임은 무용가들이 쌍을 이룰 때에만 이루어졌다. 남성 무용가들이 여성 무용가들의 뒤에 서 그들을 들어 올리고, 지탱하고, 빙빙 돌리고. 우리는 꽃을 볼 때에 꽃잎에 집중하지만, 실은 꽃을 감싸는 잎과 줄기가 있기에 노랗고 빨갛고 희고 파란 것들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겠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꽃을 형상화한 것도 같았다. 크게 공간을 쓰지 않고 제 구역을 지키던 것도, 뿌리를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식물의 특성처럼 보였고.

 

 

2021( Korea Emotion 1 ) - ⓒ Universal Ballet_photo by Kyongjin Kim  (44).jpg

 

2021( Korea Emotion 1 ) - ⓒ Universal Ballet_photo by Kyongjin Kim  (49).jpg

 

 

안내받은 공연 예정 시간은 80분 남짓이었는데 한 시간 정도 지나니 커튼콜까지 끝났다. 중간에 옷을 갈아입는 게 거의 없어서 그 시간만큼 줄어든 게 아니었을까. 약간의 변화는 주었지만 이전에 보았던 옷들과 큰 차이는 없다고 느껴 조금은 아쉬웠다. 다양한 구성을 담아내기엔 짧은 시간이었는지. 


극장을 나서자 셔틀버스가 보였는데, 정년이 창작극 광고 배너가 실렸다. 오늘 본 공연은 고전을 바탕으로 성악, 국악 등의 음악과 함께 동서양의 예스러움을 표현해 냈고, 저 극에선 여성 국극이라는 옛것을 소재로 현대 시대상을 반영한 전개를 보여주겠구나 싶었다.

 

고전을 고전의 방식으로, 고전을 현대의 방식으로. 이 시대를 어떤 관점에서 보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표현하는 범위와 방식, 바꿀 것과 바꾸지 않을 것은 달라지겠지만, 내가 예상한 방향과는 결이 다르긴 했다. 다르게 해석하는 창작물들이 더욱 많아질 테고 그럼 내게 거리가 한없이 먼 클래식도 한 뼘 한 뼘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은근한 기대를 해보며 저녁 공연이 끝난 깜깜한 밤, 해오름극장의 높은 언덕에서 천천히 내려갔던 것 같다.

 

 

[박윤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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