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어른과 아이의 경계에서 하는 가장놀이 - 뮤지컬 '비밀의 화원' [공연]

글 입력 2023.03.25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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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비밀의화원-포스터.jpg

 

 

어린 시절 나는 언제나 다른 세상으로 떨어지는 상상을 했다. 자기 전에 눈을 감고 누워서, 다음 날 아침 갑자기 조선시대의 저잣거리에서 일어나는 ‘누군가’인 나를 상상하면서 어디로 가야 할지, 어디를 가면 안 되는지를 상상하고 그곳에서 새로 만나 친해질 사람들을 상상했다. 궁궐 어느 외딴 곳에 떨어져 미래에 대한 지식으로 어느 한 관직을 꿰차고 앉아 성공적으로 조선시대에서 적응하는 결말이 좋았다. 그 안에선 나는 나이지만 내가 아닌 존재로 실제 세상의 어린이에게 허용되지 않는 자유를 몰래 만끽했다.

 

 


두 개의 가장 놀이의 교차점



만 5세가 넘어가면 아이들은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조금씩 벗어난다. 모두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알고, 자신이 알고 있는 상황을 안다는 믿음은 여러 상황에서 부정당하며 ‘나는 알지만, 상대는 모르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차츰 받아들이게 된다. 아이들은 이때 역할 놀이를 즐기게 되는데, 보통 자신들이 자주 경험하는 소꿉놀이가 가장 빈번하다.

 

흔히 ‘보호자(어른), 피보호자(아이/반려동물)’로 구성된 소꿉놀이에서 아이들은 각자 자신의 역할을 맡고는 그 인물인 척 연기를 한다. 보호자는 어른처럼, 피보호자는 아이처럼, 반려동물은 동물처럼 다른 인물(종)이 되며 ‘00이라면 어떻게 행동하고 말할까’를 고민한다. 아이들은 이러한 발달과정을 거쳐 상대방을 이해하는 마음을 키워 자신의 세계를 확장한다.

 

뮤지컬 <비밀의 화원>에는 보육원 퇴소를 앞둔 나이가 된 에이미, 데보라, 찰리, 비글이 등장한다. 이들은 어린 시절 하던 ‘비밀 연극’인 가장 놀이를 통해 호지슨 버넷의 소설 《비밀의 화원》에 등장하는 인물이 된다. 마지막 오픈 데이에서 후원자를 구하지 못하면, 보육원에서 나가 살아갈 상황이 막막한 네 명의 아이는 놀이방 청소를 하다 발견한 울새 나무 조각을 보고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그 시간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에이미는 부모를 잃고 고모부의 저택에 맡겨진 메리, 찰리는 고모부의 아들 콜린, 데보라는 수다쟁이 유모 마사를, 비글은 마사의 남동생 디콘인 척한다. 

 

어른의 가장 놀이는 현실 세계를 회피하는 수단이라 비판받기 쉽기에, 18세인 어른과 아이의 경계에 있는 주인공들에게도 비밀 연극이란 눈총을 받거나 숨겨야 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동시에 아직은 보육원에 머물 수 있는 아이로서 이들은 ‘마지막 오픈 데이 전의 마지막 연극’을 시작한다. 

 

어린 아동들은 가장 놀이를 통해 타인을 이해하는 방식을 배운다. 어른과 아이의 경계 속 4명의 아이는 가장 놀이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뮤지컬 <비밀의 화원>에서 아이들은 두 개의 인물로 가장한다. 첫째는 소설 《비밀의 화원》 속 등장인물을 연기하는 가장 놀이이며, 둘째는 후원자임을 자청한 어른들 앞에서 ‘후원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아이’를 연기하는 오픈 데이의 강제된 가장 놀이이다. 

 

전자는 아이로서 하는 놀이인 반면, 후자는 사회에 나가기 위해 하는 일종의 시험이자 거쳐야 할 관문이다. 어른들의 질문에 아이들은 당황해하며 답할 말을 찾지 못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단점은 지우고 장점을 드러내며 스스로를 뽑아달라고 입꼬리를 올려 웃는다. 

 

어른이 원하는 아이로 가장하는 모습은 어딘가 익숙하다.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목소리를 가다듬고 광대뼈가 아리게 웃으며 입장하는 곳은, 아마도 나의 면접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내 앞에 앉아있는 면접관에게 잘 보이기 위한 미소, 그들의 의도에 알맞은 답변을 내놓기 위해 나이지만 내가 아닌 답변을 하는 모습. 어른이 된 우리는 아직도 사회 속에서 가장 놀이를 졸업하지 못한다. 아이들은 지금 어른이 되기 위한 강제된 가장 놀이의 진통을 겪고 있다. 이들은 이 고난을 어떻게 극복하게 될까? 이때 다시 등장하는 것은 비밀 연극이다.

 

 

[국립정동극장] 뮤지컬 비밀의화원 프레스콜 (6).jpg




토양이 되는 믿음의 전이


 

비밀 연극을 하자고 처음 주장하는 이는 에이미이다. 보육원을 나가면 지금처럼 보지 못할 친구들과 마지막 추억을 쌓고 싶은 에이미는 끝까지 ‘아이의 행위’라며 비밀 연극을 거부하는 찰리를 결국 설득해낸다. 아직도 현실을 모르냐는 비판에 에이미는 상처받기는 하지만 충격을 받지는 않는다. 에이미는 비밀 연극의 한계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 비밀 연극 속의 메리 아가씨가 되어도 자신에게는 누군가 입혀 줄 화려한 드레스도, 신겨줄 멋진 구두도 없다. 부자인 상속자가 나타나지도 않는다. 현실은 그렇다. 

 

그렇다면 무엇이 에이미에게 비밀 연극을 계속하게 하는가? 이 지점에서 소설이 가진, 이야기가 품은 진정한 힘이 드러난다. 세상 물정 모르는 메리 아가씨가 고모부의 저택에서 고모가 죽은 뒤 죽을병에 걸렸다고 생각하는 콜린을 만나, 비밀의 화원을 가꾸며 희망을 되찾는 이야기. 책 속에서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가능성과, 이야기가 주는 고양감이 에이미를 계속 이끈다. 

 

메리로 가장했을 때 자신이 표현한 행복감, 성취감, 뿌듯함이 에이미인 자기 삶에도 이어진다. 나이지만 내가 아닌 무언가가 되었을 때 얻을 수 있는 것은, 지식도 현실도 아닌 깊은 감정이자 앞으로 나갈 동력이다. 자신의 가족이 된 친구들이 옆에 있다는 것, 함께 비밀 연극을 한다는 것이 에이미에게, 데보라에게, 비글과 찰리에게 아이를 벗어난 어른이 되어 세상에서 도약할 힘의 바탕이 되어준다. 씨앗을 심을 때는 흙을 잘 다져야 한다. 하지만 너무 꽉 누르면 안 된다. 새싹이 틈을 뚫고 나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강제된 가장 놀이는 놀이일 수 없다. 오픈 데이에서 강제된 가장 놀이를 선보인 아이들은 결국 후원자를 얻기보다는 스스로 자신의 앞길을 개척해나가기를 선택한다. 소설 《비밀의 화원》에서 걷지 못한 채 휠체어를 타던 콜린이 자기 다리로 걷게 되거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줄 몰랐던 메리가 비밀의 화원은 제 손으로 가꾸며 생기를 되찾아가는 일은 모두 찰리와 에이미의 성장 서사와 긴밀히 교차한다. 메리가 처음으로 화원에 꽃을 심는 순간 바닥과 배경에 가득 펼쳐지는 꽃의 영상과 동시에 <비밀의 화원>을 위해 조향된 향이 극장 안을 채운다. 시청각과 후각을 자극하며 이어지는 전개에서 에이미인 메리의 희망은 나이자 관객의 희망으로 전이된다. 소설 속 메리에서 에이미로, 그리고 관객에게도 이어지는 행복의 전이는 관객에서 ‘나’로 돌아가는 그 순간까지 코끝에 남는 잔향처럼 지속된다. 


인터넷에서 그런 글을 읽었다. 어른은 아이들을 끊임없이 속여야 한다. 현실을 알기 전에, 세상은 아름다운 곳이며 너의 선함은 다른 이의 선함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끊임없이 세뇌해야 한다. 어린 시절의 믿음이 현실에 부딪힌 지금에도 살아갈 토양이 되어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어른인 나는 주변의 아이를 속이기 위해서 이 뮤지컬을 보여주고 싶었다. 세상에는 너만의 비밀의 화원이 있고, 비밀의 화원을 같이 가꿀 사람들이 있고, 그렇기에 세상은 아름다운 곳이라고 속삭이고 싶다. 아이가 이 이야기를 보고 세상이 아름답다고 깜빡 속아 넘어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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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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