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돌담길 넘어, 비밀의 화원으로 가자 - 비밀의 화원

돌담길 끝 모퉁이에 가려진 곳, 내 비밀의 화원.
글 입력 2023.03.23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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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비밀의화원-포스터.jpg

 

 

비밀의 화원으로 간다. 마침 극장이 회사 근처라서 오기 부리듯 신청했다. 근 반년 가까이 연극을 보지 못했기에 요즘 들어 마구잡이로 집어보고 있다. 서울로 발령이 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아 아직도 회사에서는 여러모로 머리가 아파오곤 하지만, 오늘은 비밀의 화원으로 간다. 머리의 회로가 과전류에 다 타버린 듯, 멍해지는 오후 3시면 언제 집에 가나 하는 생각, 그 대신에 오늘은 정동극장을 생각했다. 


비밀의 화원으로 간다. 가는 길, 덕수궁 돌담길을 짚어보았다. 그러고 보면 횡단보도를 2번만 건너면 있는 돌담길인데, 와 볼 생각 한번을 안 했다는 것이 그제야 생각났다. 회사를 마치면 뒤도 안 돌아보고 집과 서재로 내달리기에, 아마 앞으로도 한참을 그럴 것 같아서 돌담길의 돌들을 하나씩 꾹꾹대며 걸었다. 담벼락 아래에는 누군가 버스킹을 하고 있었다. 멀리서 불어오는 노랫소리, 노랫소리는 밤바람에 얹혀 날아들고 있었다. 바야흐로 믿어 볼 만큼 푹숙허니 포근해진 것이 근래 오락가락하던 날씨에 대한 나의 의심을 걷어내고 있었고, 버스킹의 소리가 가지는 특유의 공간감은 봄이라는 기시감을 환기시킨다. 봄에만 버스킹을 듣는 건 아니라지만, 버스킹을 들으면 봄 생각이 나는 것이란 나만의 일이 아닐 테다. 


버스킹과 돌담길을 지나면 정동교회가 가장 먼저 보이고, 조금만 더 가서 정동극장이다. 처음 와보는 곳, 밤이 만물은 물론이요 만사를 가려주었기에, 밑동으로부터 밝혀오는 조명들에 의해 정동길은 저 혼자만 어여뻤다. 사위를 돌면 키 높은 건물들의 이마 위로는 이름자나마 써놓고선 선 채로 꾸벅대었고, 이리로 굽어보듯이 병풍처럼 장승처럼 서 있었다. 정동극장은 그 한가운데에 있다. 영업을 마치곤 캄캄히 발을 쳐둔 채 일찍 잠에 든 건물들을 목전에 두고 있어, 여기까지만 빛을 밝혀둔 거리는 정동극장으로 인도하는 듯하다. 걸어보니 알 수 있는 것, 즉 밤의 덕수궁 돌담길은 애초에 여기까지 사람을 이끌어 대는 것이다. 


1층 카페는 그 즈음 이미 마감하고 있었고, 1층 마당에서 잠시 땀을 식혔다. 적당히 조용했다. 가변, 사람들이 곧 있을 연극에 대한 기대와 흥미로 웅성이는 것은 선선한 감각을 자아낸다. 꼭 그때 나를 감돌고 있던 것, 봄밤과 같이 얼마든 좋을 느낌. 그들 하나하나를 바라볼 수는 없기에, 나는 빈 곳으로 고개를 맞추어 두고서는 그런 소리와 기색 같은 것들을 엿들어 보았다. 그러고 보니 여기 앉은 자리까지 회사로부터 1km 남짓이라니, 잠시 기분 나쁜 기억이 떠올라 흥취를 깨곤 미간도 찌푸라들었지만, 서울이란 동네는 모퉁이를 돌면 이다지가 각 다르구나, 어쩌면 모든 공간은 모퉁이로 막혀서 바로 앞에서도 알아볼 수 없도록 잘 가려져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치 비밀의 화원이 그렇듯이. 


*


극이 시작하기 3분 전, 녹음된 안내멘트가 끝나는 동시에 현을 고르는 소리. 예술의전당에서나 들어보았던 소리에 무대를 훑어보았다. 바이올린과 첼로, 일렉기타와 건반 앞에 각각 연주자들이 자리했다. 어감이 참 우스워 언젠가는 써보겠노라 생각하던 단어, 생(生)음악이 떠올랐다. 라이브 뮤직이라고 그냥 불러보기에는 영 심심한 것이, 이들을 잘 표현해주지 못하는 것만 같았거든. 무대 위의 배우들이 쌓아가는 화음이 이 위에 올라타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케 했다. 


사람의 목소리가 그 자체로 악기라는 누군가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라고 생각해왔다. 우리가 그냥 노래를 부르면, 그것은 악기의 소리라기보다는 사람의 말소리에 가깝기 때문이다. 정확히 음정을 짚지 못할 때면 생겨나는 플랫음과 고르지 못한 발성으로부터는 인간적인 요소들이 상기되거든. 그런 전제에서 무대 위 배우들의 목소리는 악기라고 불러야 적당하겠다. 목소리가 정확한 음정을 짚었을 때의 음률과 비강이 진동하면서 생겨나는 공명음은 현악이 내게 그러한 것처럼 아름답다. 다만 이때 더욱 아름다운 것은, 사람은 가진바 음색에 의해, 저마다 다른 악기로 거듭나기 때문이다. 바이올린과 바이올린, 첼로와 첼로가 그러한 것과는 달리.






보육원의 아이들, 에이미, 찰리, 비글, 그리고 데보라는 내일 있을 마지막 오픈데이를 준비한다. 내일까지 양부모나 후원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이제 18세로 갓 성인이 될 아이들은 지원금을 받고 퇴소해야 한다. 모두 씩씩하려 하지만 찰리는 그렇지 않다. 그는 내일 있을 오픈데이도 그 이전, 수십 번의 오픈데이와 똑같을 것이고 아무것도 바뀔 것은 없다고 화를 낸다. 내일이 지나면 헤어져야 하기에, 그들은 마지막으로 어린 시절 같이 하던 역할극 놀이를 하자고 제안한다. 소설 비밀의 화원 속 주인공이 되어보는 것. 찰리는 자꾸만 염세적인 태도를 보이며 다른 아이들을 밀어내려 하지만, 마침내 그들에 감화되어 마지막 역할놀이를 마친다. 그리고 비밀의 화원의 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아이들도 이제 당차게 세상으로 나아간다.  


에이미, 찰리, 비글, 그리고 데보라. 각 이름을 입에 굴려보면 느껴지는 어감이 그들의 성격을 대변해주는 것 같다. 말괄량이 에이미, 새초롬한 찰리, 비글은 정말 비글 같았고 데보라는 어딘가 깊고 또래에 비해 현숙하다. 찰리를 제외하고 아이들은 명랑하다, 절망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퇴소 직전까지 보육원에 남아 또 다른 오픈데이를 준비한다는 것은, 그 이전에 십 수년 간의 오픈데이가 어떤 결과였는지를 말없이도 알려준다. 그런데도 저토록 명랑하다는 것, 내일 있을 마지막 오픈데이는 무언가 다를지도 모르고, 마침내 후원자를 만나 학교를 가거나, 일자리를 구할지도 모른다고 설레는 것은 무얼까. 너무 현실 사람이 된 나는 그들에게서 거리감을 느끼며 제4의 벽을 감각한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의문형이 아니라, '저럴 수는 없는 법이지.' 법칙으로 내게 깊이 박인 까닭이다. 그런 의미에서 찰리는 그런 나와 객석의 사람들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내일 있을 오픈데이와 그 이전 수십 번의 오픈데이가 다를 수는 없는 법이지, 하물며 그것이 마지막이라면야, 마지막이 가지는 쓸쓸함과 초라함을 더해 조금 더 아픈 날이 될 것이라 생각하는 찰리. 하지만 그런 찰리의 마음과 그 마음을 녹여내는 것이 에이미와 비글과 데보라의 희망찬 명랑함이었다는 사실까지도, 모두 찰리의 입을 빌려 관객들을 겨누고 있다. 


새를 따라 들어선 비밀의 화원, 지척에 있었지만 10년간 아무도 들어가지 못한 화원. 역할극 안의 주인공들도, 그들을 연기한 에이미와 찰리와 비글, 그리고 데보라도 모두, 돌아 나올 때 한 아름 명랑함을 가지고 돌아나오는 곳, 비밀의 화원. 비밀의 화원에 미니어넷(미뇨네트)을 심어 마침내 피워내는 순간, 객석에 꽃향기가 만발했다. 미니어넷의 꽃말은 '당신의 매력', 그렇다면 미니어넷을 피워낸다는 건 당신의 매력을 피워내는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방치된 채로 피어나는 꽃이 없듯이, 심고 물을 뿌리고 바라보며 피워내는 것은 꽃이건 당신의 매력이건 마찬가지라는 것이라고까지 말해볼 수 있다. 그럼 당신의 매력을 피워내는 것은 무엇인가, 꽃에 대해서는 물과 관심이었던 그것은? 연극은 희망이라고 말하려는 듯 하다. 


희망, 물론 희망이지. 그 어려운 것. 십 수 년의 오픈데이와 마찬가지 십 수년의 내 기대들이 교차한다. 희망이 절망으로 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고도 손쉬운 일이라서, 절망을 희망으로 되돌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답은 정해져 있는 것이니, 근심과 걱정만으로는 그대 마음속에 이미 오래 있던, 10년이 넘게 있었으며, 좀체 들어설 수 없던 그 비밀의 화원으로 가볼 수 없으리라는 것이고 너나 나나 체념 속에 온전히 머무를 수 없다면, 어떤 것이건 희망해야지. 어쩜 대책 없어 보일 정도로 그래야지. 그리고 그때 너랑 나랑 반짝, 빛날 것이다. 


**


객석에 앉아 딱딱하게 구는 당신, 당신이 빛나기 위해서도 어서 이리로, 머뭇거리고 붙잡아대는 망설임을 벗고 비밀의 화원으로 들어가야지? 연극이 그렇게 말한다. 모르는 사람은 없을 테지만, 언제나 기억하고 간직하지는 않는 것, 그대 꿈꾸고 희망하고 빛나리라고. 나는 아직도 나의 빛나는 순간을 고대하는 것으로 보아 꿈꾸고 있는 것도 같으나, 영 망설이는 듯하다. 극이 마치고 덕수궁 돌담길을 되짚어 나온다. 큰 길가로 나서자, 아침에 보던 것들로 가득했다. 그제야 퇴근하는 넥타이들과 차량과 간판과 회사들, 더구나 밤이 깊자 취객들이 즐비했다. 남대문로 1길은 술 취한 어른들로 가득했다. 술이 잔뜩 돼 길에서 서로 소리 높여 이야기하고, 더 마시자고, 마치 어린아이가, 혹은 에이미가 찰리에게 그랬듯, 앙탈을 부리는 듯이 제안하고, 2차는 자기가 쏘겠다며 으름장을 두는 모든 얼굴들을 헤치고 버스를 타러 갔다. 


그들은 즐거워 보였다. 사람이 옳게 술을 마시면 아이처럼 되는 것 같다. 그들은 그리운 아이들의 세계로 돌아간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눈앞에 비밀의 화원이 드리웠을지는 잘 모르겠다. 내 귀는 지나치게 밝아 마치 정동극장 1층에서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의 이야기를 엿들어버리곤 하지만, 희망이나 명랑함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거든. 그 길 내내, 여기서부터 1km도 되지 않는 곳, 정동극장을 생각했다. 


정동극장, 내겐 그곳이 화원이다. 사람들이 곧 있을 연극에 대한 기대와 흥미로 웅성이는 곳, 꼭 그때 나를 감돌고 있던 것, 봄밤과 같이 얼마든 좋을 느낌. 꽃이 피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이 곧 있을 연극에 대해 웅성이는 것이 내겐 꼭 꽃 같다. 거기 앉았으면 내가 무슨 꿈을 꾸어도 괜찮을 것 같거든, 모두가 각자로서 고독한 회사와 그 바로 앞 흡연장소에서는 어려웠던 것을. 어쩌다 리뷰가 사회초년생 푸념 비슷하게 된 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비밀의 화원을 찾은 것 같다. 거기로 이어진 덕수궁 돌담길도, 내내 어둠과 조명도, 한산함도, 그리고 연극을 기대하는 사람들로부터 뿜어나오는 기색도 있어, 아마 내일부터는 창가를 서성이다간 불현듯 그곳을 떠올려보리라. 돌담길 끝 모퉁이에 가려진 곳, 내 비밀의 화원.

 

 

[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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