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서로의 외로움이 만나게 되었을 때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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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이 사람과 같은 칸에 타고 싶지 않아서 기차에서도 내렸는데, 어느새 이 사람을 사랑하게 된 건지.
핀란드 유학생 ‘라우라’는 고대 암각화를 보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무르만스크로 향하게 된다. 그녀는 무르만스크행 기차 ‘6번 칸’에서 ‘료하’라는 남자를 만나게 되는데, 이상하고 무례한 남자의 첫인상에 ‘라우라’는 여행 시작부터 불편함에 휩싸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료하’와 함께 나누는 이야기들은 ‘라우라’의 마음의 거리를 좁히게 되고 끔찍할 것 같던 6번 칸에서의 3일은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간다.
라우라의 외로움
원래 라우라의 무르만스크 여행은 여자친구인 ‘이리나’와 함께 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하지만 바빠서 함께 할 수 없다는 이리나의 말에 라우라는 괜찮다는 이야기밖에 할 수 없다.
라우라가 무르만스크로 떠나기 전날, 이리나의 집에서 열리는 파티에서 모두들 이리나와 함께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흥겹게 춤을 추지만, 라우라는 그 속에서 어딘가 어색하고 불편해 보인다. 사람들 사이에서 빛나는 이리나의 모습에서 라우라는 묘하게 거리감을 느낀다.
단둘이 보내는 마지막 밤에서도 끝내 그 거리감은 좁혀지지 않고 라우라의 표정에는 외로움과 쓸쓸함만이 그려진다. 라우라가 이리나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혼자 가도 괜찮다는 말이 아니라 함께 여행을 가고 싶다는 말이었을 텐데.
어려운 마음으로 시작한 여행이지만 6번 칸에서 료하를 만난 이후, 라우라는 모스크바로 돌아오기 위해 기차에서 내린다.
라우라는 돌아갈 마음에 들떠 애인에게 전화를 걸지만, 이리나는 “벌써 돌아오려는 건 아니지?”라는 답을 한다. 사실 암각화를 보고 싶어 했던 건 라우라의 애인인 이리나였고 라우라에게 이 여행이 특별했던 이유는 이리나와 함께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리나의 답을 들은 라우라는 목적을 잃은 여행을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다.
몇 번이고 받지 않은 전화, 돌아오는 짧고 간결한 대답에서 우리는 라우라가 얼마나 외로운 사랑을 했는지 알 수 있다. 그녀의 자리가 언제든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수 있다는 불안과 옆에 있지만 채워지지 않는 공허를 느끼며, 라우라는 사랑의 시간들을 버텨왔다.
료하의 외로움
료하의 첫인상은 무례하고 이상하다.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할 수 없는 예의 없는 말과 행동들은 라우라의 눈살을 절로 찌푸리게 만든다. 하지만, 이런 료하의 모습은 자신의 외로움을 보여주지 않기 위한 일종의 방어기제일 뿐이다. 료하와 지내는 3일 동안 라우라는 이와는 정반대인 그의 다정함과 순수함을 보게 된다.
영화에서 료하의 이야기가 자세하게 그려지지는 않지만, 우리는 몇몇 장면으로 료하의 상황을 알 수 있다.
돈을 벌기 위해 무르만스크의 광산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 할머니가 그의 유일한 가족이라는 것, 유학생인 라우라와는 상대적으로 배움의 깊이가 얕아 보이는 것. 어쩌면 료하는 경제적, 심리적으로 채워지지 않는 공허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스스로 외로워지는 것을 택했다.
무르만스크에 도착하기 전, 라우라와 료하는 저녁을 함께 한다. 인연을 이어가고 싶어 하는 라우라와 달리, 료하는 라우라를 밀어낸다. 언젠가는 헤어지게 될 만남으로부터, 그가 다시 혼자 남겨졌을 때 찾아올 외로움에게서 달아난다. 결국 그는 라우라를 남겨두고 인사 없이 기차에서 내린다.
둘의 외로움이 만나는 순간
언제부터 서로를 사랑하게 된 건지, 서로의 따스함의 마음을 기대게 된 건지는 모른다. 홀로 기차의 좁은 통로를 지날 때는 의기소침해져있던 라우라였지만, 료하와 함께 지나가는 기차의 좁은 통로는 즐겁기만 하다.
라우라는 동승객에게 모스크바의 추억이 가득한 캠코더를 도둑맞는다. 캠코더 속 연인 이리나의 모습이 모두 사라져 라우라는 눈물을 보이지만, 료하로 인해 금세 그치게 된다.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서 캠코더로 열심히 남긴 이리나와의 추억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들에 불과했다.
라우라에게 이리나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 같았지만, 그녀는 연인과의 추억 없이도 웃음 지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고는 캠코더 없이 온전한 마음으로 료하와의 새로운 추억들을 남기기 시작한다.
라우라를 떠났던 료하는 용기를 냈다. 일하는 광산으로 호텔 전화번호를 남긴 라우라를 또 밀어내지 않는다. 일을 마치고 라우라의 호텔에 찾아와 함께 암각화를 보러 가자고 한다.
힘든 여정 끝에 보게 된 암각화는 초라하기만 하다. 분명 전에는 암각화를 보러 왜 무르만스크까지 가냐며 타박했던 료하이지만, 암각화 하나만을 바라보고 여행에 오른 라우라이지만, 암각화가 그게 다여도 괜찮아보인다. 그러고 둘은 둘만의 순간을 즐긴다. 아이처럼 눈에서 뒹굴고 놀며 서로에게 가까워지는 것으로부터 더 이상 도망치지 않는다. 처음부터 암각화는 목적에 없던 여행인 것처럼.
마지막으로 료하는 형편없다며 건네지 못했던 라우라를 그린 그림과 함께 ‘하이스타 비투’라는 문구를 남기고 간다. ‘하이스타 비투’라는 단어는 료하와 닮았다. ‘엿먹어’라는 거친 말로 보이지만, 그 속은 여리고 따뜻한 사랑고백이라는 것을 라우라만이 해석할 수 있다. 거칠게 다가온 료하이지만, 그 아이 같은 순수한 마음은 라우라만이 발견할 수 있었다.
라우라와 료하가 다시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설사 만나지 못한다고 해도 둘은 이제 외롭지 않다. 서로를 채워주던 따뜻함의 기억이 계속해서 그들 주변을 감쌀 것이다. 나의 존재를 사랑해 주는 사람의 기억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둘을 둘러싸고 있던 외로움은 추운 북극의 날씨에서도 서로에 의해 녹았으니.
[이연재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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