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썩은 꽃씨에서도 꽃이 필 거라는 믿음 - 보이체크 인 더 다크

글 입력 2023.03.20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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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 모두 각자의 삶을 영위한다. 각자 좋아하는 것이 다르고, 하고자 하는 일이 다르고, 꿈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그러니 하는 행동도 다르고. 그렇게 하나하나 자신만의 취향과 생각을 겹겹이 쌓아가며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나’를 만든다. 나라는 사람의 오리지널리티를 가진다.

 

그러나 내가 ‘나’로 존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해야 할 일과 삶의 목적은 일방적으로 정해지고, 이를 무조건 따라야 한다. 의미 있는 한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병력 중 한 사람이 된다. 개인보다 전체로 존재해야 하는 상황의 사람들. 바로 전쟁의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다. <보이체크 인 더 다크>는 이런 상황에서도 서로의 눈부심을 알아본 두 사람의 이야기다. 험난한 환경 속에서도 사랑을 믿었던 두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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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잃어가는 어두운 세상에서, ‘너’를 보다



모두가 기계처럼 반복되는 삶을 사는 전쟁의 시대에서, 그 삶에서도 본질을 추구하던 두 사람이 있었다. 보이체크와 마리. 전쟁 중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직업이기에 군인이 된 보이체크와, 군인들이 훈련 뒤 오는 카바레에서 노래를 부르는 마리. 많은 군인이 마리를 흠모하지만, 정작 마리는 자신의 겉치레만 보고 판단하며 마음대로 취급하는 사람들에게 무기력함을 느낀다. 마리는 자신의 노래에 자신의 메시지를 담았기 때문에.

 

 
“그거 알아요? 사람들은 다 내 노래를 듣고 있는 것 같지만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해요. 참 이상하죠?”
 


그러나 자신에게 함께 살자고 제안하는 대위마저도 자신의 노래를 제대로 듣지 않았다. 대위뿐만 아니라, 아무도 마리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은 적이 없다. 그저 그들의 유흥 수단으로, 배경음악으로 쓰며 마리를 자기 입맛대로 소비했을 뿐이다.

 

그렇게 한 번 더 마리가 절망감을 느끼던 찰나, 다른 군인과는 다른 한 사람을 만난다. 자신의 노래가 끝나면 그녀에게 꽃이나 던져주고 가던 사람들과 달리, 진심으로 마리의 노래에 귀 기울여 준 한 사람. 돈이 없어도 그녀에게 꽃 한 송이를 주고 싶어 꽃씨를 직접 심는 사람, 보이체크.

 

 

“왜 이렇게까지 해요?”

“당신 노래가 내게 힘이 되어 주었으니까요.”

 


마리는 자신을 위해 꽃을 직접 심은 보이체크를 보며 그 마음에 감동하고, 둘은 내년 5월에 함께 꽃을 보러 오기로 약속한다. 그저 자신을 소비하는 수많은 추파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소명을 지켰던 마리. 그런 마리의 노래에 담긴 본질을 알아보고 기억해준 유일한 사람, 보이체크. 둘은 속수무책으로 사랑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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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파괴해서까지 지키고자 했지만



그러나 둘은 결혼 후 아이 한젤이 아프기 시작하며 슬픔의 늪에 빠진다. 돈이 없었던 둘은 한젤의 치료비를 감당하지 못하고, 한젤은 점점 건강이 악화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 결정을 단행한다. 자신의 본질을 부술 결심.


보이체크는 군인이었지만 사람을 죽일 용기가 없는 군인이었다. 늘 훈련에서도 낙오되고, 잔인한 훈련을 이행하지 못해 상관에게 구박받고 동료에게 핍박받았다. 그는 생명을 왜 죽여야 하는지 이해할 수도, 죽일 용기도 없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한다는 대의 아래에서 보이체크의 순수함, 따뜻함,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 따위는 무시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훈련에서 늘 괴롭힘을 받더라도, 이 뜻은 굽히지 못했다.


그랬던 보이체크가 돈을 벌기 위해 군에서 진행되는 극비리의 불법 실험에 참여할 결심을 한다. 그 실험은 군대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군인의 인간성을 제거하고 공격에 최적화될 수 있는 약물을 투입하는 실험이었다. 생명에 대한 신념, 인간 본질에 대한 굳은 심지를 굽히지 않았던 보이체크는 한젤의 치료비를 위해 자진해서 실험에 참가하며, 점점 변화하는 스스로 모습을 바라본다. 당나귀 한 마리 죽이는 것도 어려웠지만, 이제는 돈을 위해서라면 새끼 밴 당나귀도 죽일 수 있는.


한편, 마리 역시 한젤의 치료비를 벌기 위해 다시 노래를 부르러 나가고, 자신을 가지려고 했던 대위에게도 직접 찾아가게 된다. 마리도 자신이 고결하게 지켰던 내면의 다짐과 뜻을 부술 결심을 한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 안타깝게도, 서로에게 짐이 될까 불법 실험 참여와 다시 노래 부르는 일을 하는 것을 비밀로 했던 보이체크와 마리는, 그 과정에서 혼자 있던 한젤의 죽음을 맞는다. 한젤을 위해 인간성까지 내던지는 선택을 했지만, 그 과정에서 한젤도 잃었다. 이제 둘에게는 무엇이 남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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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아도 눈을 떠봐도 어두운 세상


 

눈을 떠봐도 어둠만이 가득했던 세상에서, 모두 기계처럼 반복해서 그 어둠에 스며들고 그게 더 자연스러웠던 세상에서, 각자 지니고 있던 눈부심을 알아보았던 둘. 그러나 그 둘은 그들의 책임을 지키기 위해 그 눈부심까지 내버렸고, 그 내버린 노력에도 그 책임마저 지킬 수 없었다. 이건 누구의 잘못일까? 누군가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들은 이제 텅 빈 것일까, 그럼에도 함께 남은 게 있을까.

 

 

눈을 감아도 눈을 떠봐도 어두운 세상에

서로의 손을 더듬어 가도

우리는 왜 당신 손을

놓쳐 버리지 잡지 못하지

우리는 왜

 

- 16. 우리는 왜 中

 

 

보이체크와 마리가 함께 부르는 마지막 넘버의 대사이다. 삶의 목적도, 내면의 반짝임도 잃은 둘은 5월이 되면 함께 오기로 했던 들판에서 만난다. 반복된 약물 실험과 한젤을 잃은 충격 탓에 보이체크는 정신이 반쯤 나간 채로 꽃이 만개했다고 말한다. 마리는 그 꽃을 볼 수는 없지만, 보이체크에게 그때의 약속처럼 함께 춤을 추자고 말한다. 둘은 둘만의 봄에서 둘만의 꽃에서 춤을 춘다.


마리가 오기 전, 꽃이 아직 피지 않은 들판을 보며 보이체크는 스스로 자책한다. 내가 꽃을 피워내겠다고 했는데, 내가 피워내지 못했다며. 그러나 극 중 서술자가 나타나 사실 그 꽃씨는 썩었기에 애초에 피지 못했을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뜻밖에, 그 말을 들은 보이체크는 그리 충격의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보이체크도 마리도 꽃씨를 심을 때부터 알았던 게 아닐까. 처음 꽃씨를 심을 때, 원래 이렇게 꽃씨가 이렇게 생긴 게 맞냐고 마리가 묻는다. 이 꽃씨가 썩었을 수도 있다는 걸, 어쩌면 둘은 알면서도, 꽃이 필 것이라 믿은 게 아닐까.


이 극을 보며 <푸른 잿빛 밤> 생각이 많이 났는데, 같은 작가의 극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푸른 잿빛 밤>을 보며 전쟁 상황에서 우리가 잃을 수 있는 것, 그럼에도 지켜야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면, <보이체크 인 더 다크>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지키고자 노력했는데도 지키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보이체크 인 더 다크>는 수미상관으로 끝난다. 첫 넘버의 제목이 ‘어느 오월의 노래’이고, 마지막 넘버의 제목이 ‘다시, 오월의 노래’이다.

 

 

이건 어느 오월의 노래 온 세상이 붉게 물들은

이 시절을 살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부르는 노래라네

 

- 1. 어느 오월의 노래 中

 

 

이건 다시 오월의 노래 온 세상이 검게 물들은

그 시대에도 살아있다고 영원히 외치는 노래라네

 

- 17. 다시, 오월의 노래 中

 

 

어쩌면 마리와 보이체크였을 수많은 사람. 그러나 나는 마리와 보이체크가 평생 그들만의 봄, 5월에서 함께 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 믿음이, 썩은 꽃씨에서 꽃이 필 거라는 믿음과 사랑을 가졌던 그 둘과 더 어울리니까.


그러니 그 시절에도, 이 시대에도. 지키고자 하는 것을 필사적으로 지키며 사는 사람들이 그들만의 꽃을 틔울 수 있기를 응원하며 이 이야기를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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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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