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잊어버린 순간을 되짚다, 감각의 박물학

삶을 향유하는 가장 쉬운 방법
글 입력 2023.03.20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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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의 박물학_표지(띠지무).jpg


 

어릴 적 시골의 추억을 그려본다. 하늘은 언제나 새파랗게 맑았고, 피부에 와닿는 공기는 조금 서늘했으며, 길가에는 아침이슬 맺힌 세 잎 클로버와 잡초가 무성했다. 오래전에 무너졌으나 철거되지 않은 작은 축사에선 어쩐지 뱀이 쉿쉿 거리며 돌아다니는 소리도 들리는 것만 같고, 소나무며 채송화며 다양한 꽃과 나무에서 나는 향기가 한데 섞인 그곳은 사람 냄새가 섞여 부드럽고 쌉싸름한 향을 냈다.

 

나는 이제 훌쩍 자라 성인이 되었다. 도시의 삶이란 시골의 그것보다 세련되었고, 편하다. 그러나 이곳을 '느낀' 적이 없다. 볕 좋은 날, 아이들이 놀이터를 뛰어다니고, 쿰쿰하고 안락한 냄새를 풍기는 길고양이가 갸릉대는 소리가 들리는데도 이상하게 그 기억은 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어린 시절에 조금 더 향수가 가미되었기 때문일까? 무감각의 이유를 돌아본다. 각박한 도시, 라는 이유는 아니다. 도시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사니까.

 

별것 없다. 그저 내가 나의 감각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너무도 당연해 그것들의 특별함을 잊은 것이다.

 

 

 

위인 헬렌 켈러?


 

초등학교 저학년, 학급엔 아이들이 읽을만한 책들이 잔뜩 벽에 꽂혀있었다. 나는 그중에서도 세계위인전을 자주 읽곤 했고, 헬렌 켈러라는 인물은 그런 위인전에서 자주 등장하는 여성이다.

 

우리 대부분이 헬렌 켈러가 구체적으로 무슨 사회적인 업적을 이루었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있다면, 그 자신의 장애를 극복하고 단상에 선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그녀의 설리번 선생님이다.

 

<감각의 박물학>은 위인전이 아니다. 다양한 관점으로 우리의 감각을 풀이해주고 돌아보게 만드는 드물게 귀한 누군가의 지식과 경험의 총체다. 그리고 이 책에서 헬렌 켈러는 위인이 아닌 제대로 인간의 감각을 누리며 살 줄 알았던 탐미주의자로 그려진다.

 

귀가 들리지 않고 앞이 보이지 않는 그녀는 자신이 가진 나머지의 감각으로 온 세상을 경험한다. 손으로 만지고 피부로 느끼는 자연의 아름다움은 모든 감각이 정상적인 사람보다도 훨씬 섬세하다. 타인에게서 배어 나오는 종이와 잉크 냄새로 직업을 알아맞힐 수 있을 정도로 기민하게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활용할 줄 안다.

 

우리가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을 주로 시각과 청각에 의존해 사진으로 찍어내듯 윤곽만을 인지한다면, 그녀는 세밀한 붓을 들고 더욱 동물적이고 아름다운 세상을 그려내는 셈이다. 여기 오래된 한자성어가 있다.


 

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지지자불여호지자, 호지자불여락지자.

 

 

헬렌 켈러가 이름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불굴의 의지뿐만이 아니다. 그녀만의 감각으로 세상을 즐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듣고, 보고, 만지고, 먹고, 냄새 맡는 그 모든 것을 당연하게만 여기던 것을 돌아보게 된다.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놓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최상의 내가 될 기회를 발로 뻥뻥 차는 중일지도 모른다.

 

 

 

삶을 즐기는 방법


 

 
"감각의 구두쇠들이 지구를 상속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맨 먼저 세계를 살 만한 가치가 없는 곳으로 만들어버릴 거야."
 

 

저자는 오감을 향유하는 삶에 사치스러움이라는 이름표를 붙이는 이들에게 우려를 표한다. 감각은 사치가 아니다. 우리가 살 이유다. 그렇게 주장하고 있다.

 

실로 그녀의 우려처럼 세상은 점점 더 좁아지기만 하는 것 같다.

 

예상치 못한 기술의 발전 속도는 우리에게 물리적인 자유를 주었지만 동시에 감각의 무뎌짐을 선사했다. 더 이상 버스를 타고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거나, 커피숍에 들러 시큼한 맛이 나는 원두 향을 음미하며, 종이 위의 사각거리는 연필의 감촉을 느낄 필요가 없다. 컴퓨터 앞에 앉아 버튼을 누르면 사람을 만날 수 있고, 태블릿 하나면 모든 배움과 기록을 남길 수 있는 2023년이다.

 

또한 긱 이코노미로 대표되는 요즘의 경제 상황 역시 마음의 풍요로움 자체를 억제하게 했다. 예를 들어 집세를 기준으로 거처를 마련하다 보면 많은 것을 포기하게 된다. 작게는 매끄러운 벽이나 깔끔한 도배, 마당의 향기 나는 작은 화단이나 강이 보이는 풍경이고, 넓게는 아이의 웃음소리부터 내가 나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여유다. 시각, 후각, 청각 모든 것이 점점 더 좁아지고 있다.

 

모든 면에서 더욱더 가난해지기만 하는 것 같은 이상한 발전의 시대다. 어떻게 삶을 더 의미 있게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살아야 후회 없이 좋은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

 

죽기 전에 하는 후회로 보통 경험의 부재를 많이 든다. 여행을 떠나 볼 걸, 사랑한다고 말해 볼 걸 등의 것이다. 그것들은 결국 감각의 부재를 후회하는 것과 같다. 눈으로 볼 걸, 입으로 말해볼 걸, 냄새라도 맡아볼 걸, 귀로 들어볼 걸, 손으로 쥐어라도 볼 걸.

 

결국 삶은 감각을 곤두세웠을 때 즐길 수 있다. 모두 느껴보자. 구두쇠들이 진짜 바닐라빈의 향을 영원히 모르게 만들기 전에, 밤하늘에 떠 있는 별들을 화려한 빌딩으로 가려버리기 전에, 세상을 느껴보자.

 

 

 

알쓸신잡, 알아두면 쓸데 '있는' 신비한 잡학사전!


 

<감각의 박물학>은 이름에 걸맞게 다양한 주제로 감각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저자 개인의 경험부터 신화, 종교, 과학, 예술, 인문학, 철학 등 다양한 이야기가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500페이지에 달하는 이 엄청난 분량의 이야기는 그러나 전혀 어렵지 않고, 즐겁게 읽을 수 있으며 유익하기까지 하다.

 

가령, 과학 시간이 아니라면 냄새가 인간의 첫 번째 감각이었으며 인간 두뇌가 원래 후각의 줄기에서 발생한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언제 알게 되겠는가? 우리에겐 익숙하지 않은 나폴레옹의 부인과 제비꽃과의 이야기라든지, 나비가 체온을 유지하는 방법부터 날 수 있는 최소 온도, 그리스-로마 시대 당시의 방탕한 삶의 방식과 조리법 등...

 

어디서 쉽게 접할 수 없는 주제들이 물 흐르듯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그것도 단순히 이렇다더라, 하는 상식에서 그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언어로 정제하고 해설한 감각의 이야기들이기 때문에 오래 머릿속에 남는다.

 

 

 

유다연.jpg

 

 

[유다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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