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재와 물거품이 이야기하고 있는 사랑에 대하여 [도서/문학]

글 입력 2023.03.13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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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없이 우연히 접하게 되었던 김청귤 작가의 <재와 물거품>.

 

어떤 소재로 어떤 이야기를 다루고자 하는 건지에 대한 정보도 없었으며, 제목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에 대해서도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재와 물거품이라, 철학적인 내용인가? 정도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책이 작아서 그런지 단편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이야기 흐름이 꽤 긴, 짧은 장편 소설이었다.


작가의 문체도 꽤 인상 깊었다. 마리와 수아가 어떻게 서로의 숨결을 불어넣고 서로 안에 자리하게 되는지, 어떻게 서로를 사로잡게 되는지에 대한 묘사가 매우 첨예하게 기술되어 있다. 근래에 쉽게 쓰인 작품들을 더 잦게 접해서 그런지 문장 하나하나가 더욱 가슴속에 콕콕 박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전혀 외설스러운 분위기 없이 은은하고 고혹스럽게 사랑의 아름다움이 표현되어 있다. 김청귤 작가,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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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장을 넘겼을 때 무녀가 등장했다. 무녀라? 꽤 참신한 소재가 매우 의미 있게 다가왔다. 과연 무녀를 소재로 무슨 이야기를 해나갈지 궁금했다. 사실 수아가 등장할 때만 해도 이 소설이 로맨스 판타지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수아의 모습 자체가 인간과는 다르게 형상화되어 있어서 그런지 오히려 동물과의 교감을 이야기하려나 싶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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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를 넘길록 수아가 인어임을 알 수 있었다. 소설의 매력을 진정으로 느낀다는 것은 이렇게 확정할 수 없는 머릿속에서 혼자 구축해 나가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 같다. 영상으로 구현된 이미지들은 어떠한 상상력을 조장해 내지 않지만, 문자로 구현된 이미지들을 해독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상상력이 요구된다. 글자를 하나씩 읽어내려 가면서 그것이 일정 부분 들어맞을 때, 또는 예상했던 것과 달리 갈라지는 지점이 있을 때 그것을 바로잡는 재미가 상당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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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아와 마리의 사랑에는 어떠한 개연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왓챠피디아에 처참하게 매겨진 별점들만 봐도 대부분 개연성을 콕 집어 이야기하고 있다. 수많은 비판 평점을 읽으면서 변명의 여지를 찾게 되었다.

 

애초부터 외로운 마녀와 인어라는 설정이었는데? 그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혹독한 고독감을 느껴 본 적이 없는 것일까? 인간에게 상처받고 세상에 버림받은 외톨이들이 사랑하게 되는 과정에서 과연 어떠한 개연성이 더 필요할까?

 

수아와 마리는 섬 사람들에게 수단 그 이상의 존재가 될 수 없었다. 마을을 지켜 주는, 바다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는 적절한 수단. 그런데 마리와 수아의 만남은 달랐다. 둘은 서로를 수단 삼지 않으며, 오히려 기계적인 수단 아래 숨은 서로의 진짜 모습을 보듬어 줄 뿐이다.

 

더 이상의 개연성은 필요하지 않은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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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 루프로 이어지는 사랑을 읽어 갈 때, 마치 한 척의 배를 떠나보내고 난 직후 그 자리에서 일렁이는 물살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수아와 마리의 사랑은 아주 고요하고 잔잔히 흐른다. 두 사람이 구축한 물결은 아름답게 물 속을 유영하는 수아의 움직임과 같이 매우 평화롭게 흘러간다. 하지만 안온하고 완전한 사랑은 절대로 지속될 수 없다. 물 위에 배가 난입하게 될 때 규칙적인 물결이 흐트러지듯, 수아와 마리의 사랑도 외부 요인들에 의해 무너지고 만다.


솔직히 잔인했다.


수아와 마리는 서로의 힘을 상쇄시킬 수밖에 없는 존재로 태어났다.

 

무한 루프를 돌다가도 종국에는 결국 재가 되고 물거품이 되면서 지금까지 쌓아 온 사랑이 한 방에 무너지는 것도 억울한데, 그 누구도, 심지어는 초월적인 존재도 그들의 유일한 구원을 허락하지 않는 듯한 모습이 너무 가여웠다. 다만 그러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그들의 행위 자체에 조금 더 주목하게 되었다.

 

외부의 핍박은 수아와 마리의 사랑에 씻을 수 없는 흔적을 남긴다. 마치 배가 떠난 직후 물살이 일렁이며 물결에 자국이 지는 것처럼, 그들은 또 시련을 겪고 이별한다. 하지만 상처로 상징되는 물결 자욱들은 다시금 새로운 파도에 의해 흩어지고 다시 한번 고요하고 평화로운 일렁임을 조성해 낸다. 수아와 마리가 지독한 파멸을 예상하면서까지 수백 번도 더 똑같은 선택을 한다.

 

현실에 찌들어 있는 나는 읽은 내내 같은 생각을 반복했다. 바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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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적인 섬마을이라는 공간은 선과 악이 오묘하게 섞인, 우리들의 삶을 그대로 담아 낸 곳이었다. 사회적 약자로 상징되는 두 여성이 겪게 되는 위기가 묘사될 때마다 이 신비로운 섬마을에서 현실의 씁쓸함을 맛보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둘의 위기 대처 방식이 매우 인상 깊었다. 시련을 겪는다면 어떻게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순서이다. 하지만 그들은 상황 자체의 개선을 바라기보다는 그저 어떻게 서로를 지켜낼 수 있을지 고민하고 또 부딪칠 뿐이었다.

 

수아와 마리의 사랑은 아마 현실에서는 절대 볼수 없는 사랑이겠지.... 하는 마음에 마음 한편이 씁쓸해졌다. 비단 맹목적인 사랑, 무한 루프의 이어짐, 신비로운 섬마을이라는 설정들만이 <재와 물거품>의 판타지적 요소를 더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약자로 상징되는 두 여성이 어떠한 편견에도 개의치 않고 사랑한다는 것, 오로지 서로의 순수한 사랑에만 주목할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오히려 더욱 판타지처럼 다가왔다.

 

이렇게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이 현실에서도, 수아와 마리의 세계에서도 평안히 허락되기를 바라며 글을 마쳐 보고자 한다.



[신채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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