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완전한 자유에 발 묶인 자의 결말, 연극 '슈미'

글 입력 2023.03.13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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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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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빛나는 아름다움.” 연극 ‘슈미’의 주인공, 슈미가 극중 계속해서 내뱉는 말이다. 스스로 빛나기 위해 그녀가 주장하는 것은 자유를 누리며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다. 슈미는 실제로 모든 선택을 완전한 자의로 행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 결과가 자유로 성취되었는가? 그리고 그러한 삶이 과연 그녀를 빛나게 했는가? 또 자유에서 멈추지 않는 ‘책임’을 어떻게 감당했는가? 그 결말은 슈미가 극중의 네 인물과 맺는 관계에서 형체를 드러낸다.


가장 먼저 충동적으로 결혼을 결정한 남편 경만이다. 바닥에 끌리는 원피스에 맨발 차림인 슈미와는 대조적으로 단정한 일상복에 구두까지 갖춰신은 모습이다. 옷차림에서도 알 수 있듯 이들의 성격은 정반대다. 시종일관 차가운 아내 앞에서도 경만의 얼굴에선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아직 정교수 승진을 준비 중인데도 슈미를 위해 집을 사치스럽게 꾸미는 등 아내가 원하는 모든 것들을 들어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결코 자연스럽지 않다.


슈미는 아내로서의 삶에 전혀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 만족하지 못한다는 표현보다는 만족을 원치 않는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 같다. 화려하고 넓은 집을 기뻐하지도 않고, 남편의 지극정성에도 반응하지 않는다. 자신을 끌어안으며 아이를 갖자고 말하는 그의 손길 역시도 매정히 밀어낸다. 책임과 의무가 주어지는 아내라는 자리 자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모습이다. 그 누구보다도 자신의 삶을 더 사랑하기 때문일까.


슈미는 경만과 부부 관계로 묶여있는 상태지만, 경만과 함께 어릴 적부터 친구였던 인물들과도 묘한 기류를 형성하고 있다. 먼저 검사라는 지위로 권력을 손에 넣은 도규는 슈미에게 너희 부부의 관계에 또 다른 점으로 끼어들어 삼각관계를 만들겠다는, 다소 협박에 가까운 사랑 고백을 하는 인물이다. 어긋난 욕망으로 그녀를 가지고 놀기 위해 경만에게 새 집 마련에 필요한 거액을 빌려주기도 한다. 


두 번째로는 경만의 대학 동창인 유완이다. 유완은 과거에 슈미와 연인에 가까운 관계를 맺었던 인물이다. 그는 슈미와 자유와 일탈이란 무엇인가를 두고 토론을 벌이고, 햇살 안에서 벌거벗은 채 자유를 누렸다. 함께 삶을 찬미하는 동시에 그녀가 머리에 겨눴던 권총을 계기로 새로이 태어났다. 당시 죽음을 받아들이려 했지만 슈미의 선택으로 삶에 남겨진 그는 아직까지도 슈미를 원하고 있다. 오랜만에 한국을 찾은 이유도 그가 영국에서 집필해 대성공을 거둔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저서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 저서는 이들의 또 다른 친구인 애경의 도움으로 완성된 것이었다. 애경은 영국에서 돈 많은 남자와 사랑 없는 결혼을 했지만, 유완과 내연 관계를 맺고 그의 저술에 온 몸과 마음을 다해 도움을 준 인물이다. 슈미와 경만의 결혼 역시 명분이었을 뿐, 사라진 유완을 만나기 위해 수 년만에 한국을 찾은 상황이다.

 

그 사실을 눈치챈 슈미가 애경에게 우리는 학창시절에 원수지간이 아니었냐며, 서로가 서로를 ‘애견’과 ‘슛 미(Shoot me)’라고 놀렸던 건 기억나지 않느냐고 물으며 이곳에 온 진목적을 캐묻는다. 그러자 애경은 자신은 진정 유완을 사랑했고 유완도 자신을 사랑했다고 고백한다. 유완을 통해 살아있음을 느꼈고, 유완 역시 자신 덕분에 엉망이었던 삶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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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Unsplash, Maxim Hopman

 

 

모든 인물들은 서로 얽히고설킨 돈독한 친구 관계처럼 보이지만, 주인공 슈미는 모든 인물들과의 일대일 관계에서 각자의 비밀을 숨기고 있다. 또 유일하게 집 밖을 떠나지 않는 인물이기도 하다. 친구들이 초인종을 눌러도 경만에게 문을 열어주라고 지시할 뿐 집 밖으로 나서지 않는다. 그저 자신만의 황량한 왕국에 서서 이곳을 드나드는 인물들을 관찰하고 원하는 대로 조종하려 할 뿐이다. 

 

하지만 그 행위의 방향을 좌우하는 인물이 있다. 바로 유완이다. 슈미는 자신이 추구하는 '아름다운 삶'을 유완으로 하여금 입증하고자 한다. 그래서 유완을 끊임없이 시험한다. 먼 과거에 그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어 그를 삶과 죽음의 경계로 몰아넣었던 것처럼 말이다. 

 

첫 번째 시험은 술로 치러진다. 알콜 중독 치료를 위해 건배를 사양하는 유완에게, 슈미는 사람들이 너를 축하의 자리에도 끼지 못하는 나약한 사람으로 볼 것이라고 비난한다. 또 애경이 유완의 옆에 딱 붙어 자신을 만류하자 그녀가 했던 사랑고백을 폭로해 버린다. 자신이 아는 유완이라면 애경을 사랑했을 리 없기 때문이리라. 유완은 슈미의 의도대로, 곧바로 애경의 사랑을 부정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와인잔을 입에 대고 들이켜 버린다. 


슈미는 유완이 술 그 자체를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술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로부터 승리하길 원했다. 그가 도규가 초대한 파티에서 살아남아 ‘디오니소스처럼 머리에 포도잎사귀를 장식하고’ 당당히 돌아오기를 바랐다. 그리고 파티로 향하는 남자들에게 꽃을 건네며 그들을 배웅한다. 하지만 자제력을 잃은 유완은 극강의 쾌락과 구분할 수 없는 고통에 빠져들어 엉망이 된 채 돌아온다. 심지어 자신의 역작이 담긴 녹음기를 잃어버린 채로 말이다. 


하지만 슈미는 그것이 유완에게는 진정한 자유를 가져다주는 두 번째 계기가 되리라 믿는다. 신발을 잃어버린 채 양말 바람으로 등장한 유완의 모습은, 그가 맨발로 서 있는 슈미의 삶과 합치되기 직전임을 보여주는 장치였을까. 그래서 슈미는 경만이 녹음기를 주워 집안에 보관하고 있는데도 그 사실을 숨긴다. 그러곤 오래전 유완을 겨눴던 권총에 도규가 준 총탄을 장전해 건넨다. 자신이 택했던 자유의지에 뒤따른 책임을 죽음으로 갚고, 그로 인해 삶의 굴레에서 해방되기를 바라며 그를 다시금 시험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규는 유완이 자살을 시도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한다. 모두가 충격에 빠진 가운데, 슈미는 그의 죽음이야말로 아름답기 그지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진상은 달랐다. 녹음 내용이 정리된 애경의 노트를 찾기 위해 그녀의 숙소로 들어가려고 모텔 주인과 몸다툼을 벌이다 외투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권총이 발사된, 지극히 우발적인 사고에 불과했다. 그 사건의 본말은 슈미에게는 자유로 여겨졌던 선택지들이 유완에게는 여전히 일탈이었음을, 유완은 슈미가 열망했던 길을 택하지 않았음을 들춰낸다. 


도규는 권총에 장전돼 있었던 총탄은 자신이 준 것이니 그 총이 너의 것이라는 증거가 분명하다며 슈미를 압박한다. 결국 모두가 바라보는 가운데, 슈미는 테이블에 올라 자신의 머리에 총을 겨눈다. 어릴 적 애경이 불렀던 별명이 그녀의 오버랩되는 결말이다. 방아쇠를 당기자 탕 소리가 어둠을 울리며 극은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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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완이 떠난 뒤 슈미는 녹음기에 끼워진 카세트테이프를 풀어헤치면서 독백했다. ‘나는 내 아이를 죽였다.’ 하지만 그 녹음본이 자신의 아이와도 같았다고 말한 사람은 애경이었다. 애경이 그저 애정과 정성의 산물로서 녹음본을 아이에 빗댔다면, 슈미에게 아이란 유완과의 대화에서 언급한 ‘사명’에 비유되는 존재다. 슈미는 자의가 아닌 사명은 결코 원치 않았다. 자신과의 약속, 다시 말해 자신의 자유에 기반한 선택이 아니라면 그 싹을 잘라내고자 했다.


그럼에도 슈미 또한 타협을 받아들이는 순간을 마주한다. 아이 곧 타의에 의한 사명을 받아들이는 시점, 즉 경만에게 임신을 고백하는 순간이다. 이때 그녀는 유완과 함께였을 때처럼 햇살에 몸을 내맡기는 게 아니라 경만과 함께 그늘에서 햇살을 바라볼 것을 결심한다. 따가운 통증과 뜨거운 열기를 피해 서늘한 곳에서 햇볕을 관망하려는 순간. 그녀가 그토록 갈망했던 책임으로부터 멀어지려는 순간이다.


하지만 슈미는 자신과 동일시했던 유완의 실패를 목격한 후, 결국에는 햇빛을 향해 직접 선회해 나아간다.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최후의 방법이라고 여겼던 죽음을 스스로 선택한다. 슈미는 무한한 자기긍정의 결말로 자기부정을 택하는 역설적인 인물이다. 자신의 삶을 극도로 긍정한 끝에 삶의 의지를 단념하는 것마저도 자신의 자유의지라고 여긴다. 하지만 아포리아에 빠진 나머지 삶을 포기해 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그것을 완전한 자유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는가.

 

무대 위에서는 유독 선(線)적인 연출이 눈에 띈다. 무대를 가로지르는 긴 구조물은 의자나 테이블로 사용되지만 두 인물이 대치하는 상황을 시각화하는 장치 혹은 무대 속의 무대처럼 기능한다. 슈미가 유완과 나란히 앉아 허공에서 연탄곡을 치는 장면에서도 수평적인 구도가 인상적이다. 이렇듯 슈미는 모든 인물과 팽팽한 선으로 연결된 듯하다. 또 그녀의 인생 역시 마찬가지다. 삶은 마치 직선처럼 연속적이며 필연적으로 시작과 끝을 갖는다. 슈미에게는 그 끝이 또다른 시작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끝을 향해 나아간 것이 아니라 그곳으로 내몰렸다는 것이 그녀의 삶이 비극이었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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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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