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느긋한 사진이 성급한 우리에게 [미술/전시]

김수강 개인전 〈겹, 겹〉 관람 후기
글 입력 2023.03.07 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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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다 바빠 현대사회".

 

언제부턴가 일종의 '밈'으로서 여러 매체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문장으로, 제대로 휴식할 시간조차 갖지 못하고 일과 업무에 시달리며 바쁘게 세월을 보내는 현대인들의 삶을 잘 나타낸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더 나은 삶을 위한 경제 성장은 개인의 삶에 여유와 편의를 건네려 다음 목표를 향한 발걸음을 계속하지만, 그럼에도 우리에겐 언제나 시간이 부족하다. 더 이상 효율성만큼 중요한 건 없다.


현대 사회는 인류가 겪었던 이전의 어떤 사회보다 효율성이 극도로 발전한 사회다. '효율'은 대상의 가치를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었으며, 이는 비단 기술, 사물뿐 아니라 인간에게도 해당되어 '효율적인 사람'이 성공적인 삶을 갖기 위한 필수조건이라는 서사가 만연해있다.


이러한 효율에 대한 찬미는 경제적 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더 나아가 우리의 일상생활 전반에 스며들었다. (현대의) 사진은 즉각적으로 대상을 담을 수 있다는 점에서 효율성을 대표하는 기술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스마트폰의 보급은 더 이상 사진을 찍는 데 있어 필름 따위를 요구하지 않으며, 누구나 쉽고 간단하게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촬영 후 생성된 데이터는 usb나 인터넷을 통해 자유롭게 이동이 가능하며, 프린터를 이용하면 눈 깜짝할 새 인쇄된 사진을 출력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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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강 작가의 사진 작업은 이러한 통상적인, 효율적인 사진과 대비된다. 작가는 검 바이크로메이트(gum-bichromate)라는 기법을 사용하여 대상을 화면에 담는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카메라로 대상을 찍은 후 필름으로 만든다. 수용성 물감과 고무액, 그리고 중크롬산염을 혼합한 특정색 감광액을 제작한다. 감광액을 인화지 위에 얇게 칠한 뒤, 필름을 그 위에 올려놓고 감광기를 이용하여 이미지를 현상한다. 노광 되지 않은 부분을 씻어내기 위해 물에 담갔다 빼내면 얕은 색층이 남게 된다.
 
인화지를 말리고 다른 물감으로 위의 과정을 반복하여 사진을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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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업은 물감을 한 겹 한 겹 쌓아 올려 부옇던 대상이 점점 선명해져 가는 시간입니다. 별 것 아닌 사물을 가만히 길게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오래 바라본 그 사물은 그 이전의 그것과는 조금 다른 무엇이 되어 가장 적당한 무게로 거기에 있습니다. 제 일상을 바라보는 그 시간은 몹시 느리고, 깊고, 무겁지 않고, 가볍지 않습니다. 저는 그 시간을 소요(逍遙)하며 즐거워합니다." - 김수강

 

작가의 사진은 우리가 알고 있는 통상적인 사진과 다소 거리가 있다. 위 과정은 대상을 즉각적으로 포착하고 손쉽게 복제할 수 있는 현대 사진의 장점을 배제시킨다.

 

이러한 아날로그적인 작업을 통해 작가가 사진에 담고자 하는 대상은 특별한 순간이 아닌 일상 속의 사물이다. 화면 속 사물은 너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꾸밈없이 그 자리에 놓여있다. 우리가 평소에 쉽게 먹고, 사용하고, 지나치던 사물들을 오롯이 마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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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사진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빠져든다. 엄밀히 말하자면 대상이 현현된 화면의 이미지에 매료된다. 이는 색채를 한 겹씩 쌓아 올리는 방식이 곧 작가가 직접 대상에 색채를 부여한다는 능동적 행위라는 점으로부터 비롯된다.

 

수행적 과정의 작업 방식을 통해 겹겹이 쌓이는 것에는 비단 대상의 색채뿐 아니라 행위자의 대상에 대한 경험과 기억들도 해당된다. 이로 인해 우리는 작가의 사진으로부터 높은 감각의 밀도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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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율만을 좇으며 빠르게 흘러가는 현대의 시간 속에서 우리의 일상 감각은 무뎌져간다. 사물의 용도와 효용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관계 맺기 방식은 우리를 단조로운 무채색의 삶으로 이끌어가며 마음속에 성급함과 불안함을 심어주었다.

 

어떤 대상에 몰두하여 온전히 대면하는 것은 잊고 있던 나와 대상의 관계를 재발견하게 만들고, 더 나아가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제공한다. 이러한 점에서 작가의 작업은 삶에 색채를 쌓아 올리는 과정이며, 그의 느긋한 사진은 성급한 우리에게 잠깐의 여유를 건네준다.

 
 
[정충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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