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북한산 백운대를 다녀오며

글 입력 2023.03.02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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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네 시. 북한산 등반을 위해 모인 시각은 정확히 네 시였다. 일출을 보고 싶었다. 재작년 여름 즈음에 올랐던 관악산을 끝으로 동네 뒷산조차 오르지 않았지만 차가운 겨울산 꼭대기에서 맞이하는 따뜻한 절경이 궁금했다. 동행인은 절친한 친구와 후배, 총 세 명이었다.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는 이유로 장장 십 년 동안 이어져 온 끈질긴 인연이다. 북한산 가자. 말마따나 동네 뒷산도 아니고 지명 있는 산에 오르는 일을 '밥 먹자.' 따위의 가벼운 제안처럼 받아들이고 만다.


특히 나는 등산화도 구비하지 않았던 초짜였다. 지난날에 러닝화를 신고 생각 없이 관악산에 올랐다가 수도 없이 미끄러졌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무렴 등산은 장비빨이라지만 아직 그 정도의 애정은 모자란 모양이다. 중고마켓에서 장만한 트래킹화로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준비를 했다. 그때만 해도 우리의 목표는 컵라면이었다. 백운대 꼭대기에 올라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먹겠노라. 소소하고 낭만적인 바람에서 시작되었다.


네 시에 데리러 갈게. 그 말에 따라 기상했지만 친구는 아무도 나오지 않으리라 예상했단다. 세 명 다 계획과는 거리가 먼 성향인지라 본능이 이기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한 명도 빠짐없이 약속한 시간에 모였다. 아직 밤이 깊은 시간에도 도로를 달리는 헤드라이트 불빛. 이른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우리 말고도 수두룩 빽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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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대는 북한산 고봉 중에 하나로 듣던 대로 험한 암벽이 자리한 경로였다. 산을 오르는 초입부터 캄캄한 어둠이었다. 당황한 것도 잠시, 우리는 휴대폰 손전등을 켜고 더듬더듬 산을 올랐다. 약 삼십 분 간 서로의 숨소리를 안정 삼아 묵묵히 등정했다. 귓가를 윙윙 감싸며 울어대는 바람소리와 어둠에 익숙해진 걸음은 무아지경이었다. 평소 운동과 담을 쌓고 지냈던 내 체력이 유일하게 발목을 붙잡았고 잠시 쉬었다 갈 것을 제안한다. 소음도 없는 고요한 새벽. 산 중턱에 잠시 멈춰 서서 어슴푸레 반짝이는 불빛들을 내려다보았다.


이른 새벽이었지만 어둠이 깔린 산 아래 붉게 몰려오는 빛은 아침과 밤을 혼동하기에 마땅했다. 프랑스에서는 황혼을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고 부른다. 지고 있는 해와는 거리가 멀었으나 밤이라고 생각하면 터무니없이 어둡고 아침을 앞질러 간다면 상쾌하기 그지없는 등산이었다. 다시 힘을 내어 정신없이 걸어 올라가면 한두 팀의 무리가 우리를 뒤따라왔다. 서두르는 걸음은 모두 아침 일출을 보기 위해서였다.


금요일에서 토요일로 넘어가는 새벽이었다. 그리고 금요일은 서점 출근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동안 수고했어. 어딜 가든지 넌 잘할 거야. 약 2년 동안 근무했던 곳을 인사 한 마디로 끝냈다. 같이 간 후배 역시 오래 일했던 직장을 그만뒀고 숱한 면접 끝에 제게 꼭 맞는 이직 자리를 찾아냈다. 중간 과정이 생략되었지만 일자리를 다시금 찾는 것은 꽤나 고역임이 틀림없다. 자신에 대한 믿음은 차치하고 주변 사람들, 특히 가족의 걱정 어린 시선을 견뎌내야 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예고했던 일을 그만두자마자 연달아 전화가 왔다. 내심 못마땅한 목소리였다. 곧바로 이제 어떻게 할 거냐는 질문이 날아들었다. 나 이제 막 끝났는데? 의문과 동시에 울컥 화가 치밀었다. 좋아서 시작한 일이었지만 계약일이 종료되어 끝마친 사람에게 다소 잔인한 청문이 아닌가.


그런 의미로 등산의 목적은 다양하지만 내게는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시발점이 되길 바랐다. 아무 생각 없이 몸을 고되게 만들 수도 있으나 가파른 겨울산을 오르는 이유는 단 하나다. 정상에 오르겠다는 것. 연고도 없는 사람들과 같은 곳을 향해 오르지만 누가 먼저 정상을 찍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게나 떠들어대던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나는 가쁜 숨을 삼켜내며 얼렁뚱땅 등산의 이유를 만들어낸다. 다음 달에 결혼하는 친구를 위해. 오늘 생일을 맞이한 절친을 위해. 새로 이직한 후배의 원만한 회사생활을 위해서, 그리고 다시 재정비할 시간을 갖는 나를 위해서.


조금씩 동이 터오기 시작하자 휴대폰 손전등을 껐다. 오로지 손전등 빛이 안내하는 돌길뿐이었는데 주위가 보이기 시작하자 시야가 넓어진 것이다. 중간에 몇 번씩 다른 길로 들었지만 이내 다시 길을 찾았다. 지난여름에 수건을 두르고 흠뻑 젖은 머리카락을 질끈 묶었던 한낮의 등산과는 차원이 다른 곳이었다. 누군가 겨울과 여름의 차이를 물었을 때 여름은 온 만물이 살아있는 계절이고 겨울은 모두가 죽어있는 계절이라고 답한 것에 공감한 적이 있다. 내게도 겨울산은 생동감 하나 없이 고요하고 두려운 곳이었다. 철사다리를 건너며 붙잡은 쇳덩이를 빨갛게 얼어붙은 맨손으로 가감 없이 느끼는 겨울이다.


헤어짐은 언제나 익숙지 않은 법이다. 5년 동안 다녔던 첫 회사를 그만뒀을 때도 나는 덤덤하고 시원한 마음으로 건물을 나섰다. 친한 동료가 선물해 준 꽃바구니와 짐을 챙겨 버스에 올라 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정든 풍경을 바라보다가 눈물이 솟구쳤다. 진짜 끝이구나. 매일같이 보던 사람들도 마음과 시간을 내지 않는 이상 영영 보지 못할 것이다. 이번에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새벽에 출발할 등산을 준비하면서도 도통 실감이 나지 않아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다시금 집을 나섰다.


어쩌면 퇴사를 핑계 삼아 무작정 등산을 추진한 것은 이별을 오래 통감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꾸며낸 동기부여일지도 모른다. 꼭대기까지 무사히 등정하여 무운을 빌면 나 역시 끝내 잘 풀릴 수 있으리라, 스스로에게 거는 최면 같은 것이었다.


이제 거의 다 왔어. 힘내. 희망고문처럼 이어지는 응원에 고개를 드니 험준한 바위 위로 사람들이 매미처럼 달라붙어있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얼굴을 찢을 것처럼 강한 바람이 불어댔다. 사람들은 로프 줄에 매달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경사가 심해 줄 없이는 오르기 힘든 코스였다. 게다가 맨손으로 이곳까지 올라온 사람은 초보 등산인은 우리뿐이었다. 올라오기까지 비축한 체력이 바닥났지만 가시거리에 들어오는 백운대 정상을 향해 젖 먹던 힘까지 산을 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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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대 정상에는 바람이 세게 불었다. 이를 이겨내기 위해 펭귄 떼처럼 무리 지어 모여있는 사람들은 무언가를 간절하게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풀어헤친 머리카락처럼 정신없이 휘날리는 태극기 앞에서 인증샷을 찍었다.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절경과 능선을 따라 시선을 옮기며 위대한 자연 앞에 경외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둠이 물러간 아침 일곱 시. 불그스름한 하늘을 응시하던 많은 사람들이 마침내 감탄을 자아내기 시작했다. 저 멀리 손톱만 한 해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고 나타난 것이다.


이미 밝아진 하늘이었는데 신기하리만큼 붉은 태양이었다. 차가운 바위에 웅크리고 앉아있던 사람들은 성취감에 젖은 얼굴로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이걸 보기 위해 어둠을 뚫고 올라왔구나. 금요일의 연장선으로 여겨졌던 새벽이 끝이 나고 비로소 새로운 아침을 맞이한 기분이었다. 해가 나오자 따뜻한 기운이 돌았지만 칼바람이 에는 추위에 손가락이 부르틀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것 같은 느낌이 생생했다. 일출의 순간을 떠올리면 생동감이라곤 져버린 겨울산에서 유일하게 생명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차가운 땅을 녹이고 햇빛이 드리운 양지를 밟아 내려가는 아침의 출발.


결국 바라던 컵라면은 하산 중에 먹게 되었다. 어둠 탓에 보이지 않았던 길을 눈에 담으며 따뜻한 면발을 씹었다. 백운대 코스는 짧고 험했다. 그러나 내게는 험준한 바위가 있기에 도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곳이었다. 길도 인생도 안정적인 것을 택하는 것은 인지상정이지만 막상 넘기고 나면 별 것 아니라는 것을 안다. 두려움 앞에 지느냐의 문제라는 것을. 산을 내려와 그날의 등산을 복기하면서 드는 감정에는 부정은 없었다. 앞으로 이어질 어떠한 역경이라도 도전 끝에 반드시 성취감이 따라올 테다. 등산을 마치며 시작된 것은 하루의 출발이 아닌 새로운 도전의 출발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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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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