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결핍의 리얼리즘 [도서/문학]

레이먼드 카버, 『대성당』(문학동네, 2007)
글 입력 2023.02.23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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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드 카버의 소설 속 인물들은 대체로 결핍을 가지고 있다. 마치 그의 단편 속에 채워질 인물을 뽑는 가장 확실한 기준은 결핍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는 수많은 인물 표본의 어떠한 부족함을 포착해 집요하게 그려낸다.

 

현실을 정확하게 포착하여 사실적으로 구현하는 것을 리얼리즘의 기본 태도라고 규정한다면, 우리가 레이먼드 카버를 리얼리즘의 대가로 인정한다는 것은 그가 인간을 보는 방식―결핍의 존재―이 지극히 ‘리얼’하다는 방증일 테다. 결핍에 한해서만 우리는 이견 없이 정확할 수 있으므로, 리얼함을 탐구했던 카버의 노력에 ‘결핍학’이라는 이름을 붙인 후 그의 소설을 다시 본다.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집 『대성당』(문학동네, 2007)을 읽는다.


등장인물의 결핍은 소설적이면서 동시에 현실적인 상황 속에서 드러난다. 「보존」에서 샌디의 남편은 실직 상태다. 샌디는 밸런타인데이에 직장에서 해고된 후 석 달 째 직업을 구하지 못하고 있는 남편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지만, 그녀 또한 생계 앞에서 “겁이 나는 건”(57쪽) 마찬가지다. 하루의 대부분을 소파에서 무기력하게 보내는 남편의 모습에서 샌디는 문득 “이천 년 만에 발견”된 미라의 사진을 겹쳐본다. 죽었지만 죽지 않은 듯, 혹은 죽지 않았지만 죽은 듯한 존재. 샌디는 마침내 남편이 “부끄러워”(61쪽)지는 순간을 맞닥뜨리기에 이른다. 다시 몸을 움직이고 호흡을 계속하기 위해서 이들 부부에게 필요한 것은 명확하다. 하지만 냉엄한 현실이 그러한 것처럼, 레이먼드 카버가 그들에게 쥐어주는 것은 고장나버린 냉장고로 표현되는 소박한 불행뿐이다.


한편 「내가 전화를 거는 곳」의 화자인 ‘나’는 알코올 중독자다. 벌써 두 번째 알코올 중독 치료 시설에 들어올 정도로 중증을 앓고 있는 나는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나는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아내와 이별했으며 지금은 새로 생긴 애인의 안부조차 알 수 없다는 자신의 이야기를 절망적인 태도로 고백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이 짧은 소설이 희망적인 “회복의 이야기”(179쪽) 또한 결코 아니다.

 

사랑했던 사람이 자신의 전화를 받아줄 것이라는, 망상에 가까운 상상을 품고 전화기 앞에 선 나의 독백으로 소설은 끝난다. 절망적 상황 속에 놓인 인물이 절망에 빠지지 않았다고 해서 희망은 아니라는 것. 진짜 현실이란 절망과 희망이라는 극단을 경계하며 위태롭게 섰을 때 명징해진다는 것. 카버의 결핍학은 이러한 대전제 위에서 전개된다.


카버의 소설 속 많은 인물은 사건의 명확한 해결, 갈등의 확실한 해소, 고뇌의 진실한 해원에 도달하지 못한다. 결핍된 존재들이 결핍을 충족하지 못한 채 끝나므로, 우리는 카버의 결핍학이 사실상 ‘절망학개론’이라는 성급한 결론에 다가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카버의 몇몇 소설들, 그러니까 우리가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몇 편의 소설 속에서 리얼리즘은 다른 결론을 향해 열린다.

 

예컨대 사고로 아이를 잃게 된 부모가 빵집 주인이 건넨 “별것 아닌”(127쪽) 따뜻한 빵을 먹으며 다시 햇살을 맞이하거나(「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아내의 맹인 친구에 대한 막연한 적개심이 함께 손을 잡고 대성당을 그리며 녹아내리는 순간이 그렇다.(「대성당」) 그럼에도 이어지는 삶 앞에서 형언할 수 없는 것이 올라오는 진실한 순간을, 카버의 결핍학은 기어이 포착해낸다.


레이먼드 카버의 리얼리즘은 선명하고 지독하다. 혼탁한 현실은 반드시 결핍을 드러내고, 드러난 결핍은 절망과 희망의 경계에서 배회하다가, 서서히 절망 쪽으로 몸을 기울인다. 그러나 모든 현실이 단지 좌절하며 끝나는 것은 아니다. ‘별 것 아닌 것’들을 통하여 우리는 방향을 잡고, “살아오는 동안”, “멈추지 말고”, “해낸 것 같”을 때까지, 우리는 현실을 “함께 만들고”(310쪽) 살아간다. 리얼한 리얼리즘이란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을 지독하게 그려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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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승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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