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만나더라도 만나지 않은 것이다 [도서/문학]

이병률 시집 <바다는 잘 있습니다>를 읽고
글 입력 2023.02.19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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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관련한 교양 수업을 들었다. 그 때 '나의 애송시'를 주제로 발표하는 과제가 있어서, 나는 그 당시 억지로인 듯, 요즘의 '갬성'인 듯, 내 진심인 듯 서점의 시집 코너에 들렀다. 시집 코너에 온 만큼 감성적이고 싶었던 나의 눈에 먼저 보인 '9000원'. 내 안의 모든 감성을 쓸어버리고 이성만 남게 했다. 값진 독서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지만, 치킨 한마리에 비하면 2배는 더 저렴하지만, 그 돈을 쓰기가 싫어 서점에서 다 읽고 가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결심한 뒤부터는 시를 제대로 감상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나마 겉면이 가장 와 닿았던 시집 중 하나를 질러 집에 가져오게 되었다.

 

"바다는 잘 있습니다...."

 

 

우리는 안 괜찮으면서 괜찮다고 말합니다. 당신은 혼자를 핑계로 혼자만이 늘릴 수 있는 힘에 대해 모른 척 합니다. 누구든 한쪽으로 치우칠 수 있겠지만 당신만은, 방에서 나와 더 절망하기를 바랍니다.

 

오래 전하지 못한 안부를 전합니다.

바다는 잘 있습니다.

 

  

 

나의 겉멋과 책의 겉면이 마주했을 때 생기는 일


 

이병률 시인의 시집이었다. 나는 평소에 외우고 다닐만큼 사랑하는 애송시가 없었다.  한창 외로움과 공허함을 느낀다고 표출하고 다닐 때쯤, 그 문구에 넘어가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아뿔싸! 막상 이 문구는 책 속에 아예 적혀있지 않았다. 마치 책과 내가 겉 vs 겉으로 만났는데 서로 속을 까 보니 처음 보는 사람인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관심이 뚝 끝겨 시집을 간헐적으로 보다가, 안보다가, 받침대로 쓰다가, 그러다 정말 우연히, 운명처럼 이 시를 읽게 되었다. 

 

 

<사람의 재료>

 

오늘은 약속에 나가

사람들과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문자가 왔다

왜 오지 않는 거냐고

 

이미 약속 시간으로부터 십분이 지나 있었다

무엇이 문제였단 말인가

황급히 일어나 간판을 다시금 확인하고

옆 건물로 들어가 사람들 사이에 다시 앉았다

 

만나도 모르는 사람들

몰라도 만나는 사람들

 

만나더라도 만나지 않은 것이다

이제 이 좁디좁은 우주에서 우리는 그리 되었다

 

이 바다의 물을 다 퍼서 다른 바다로 옮기는 일들처럼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우리는 우리가 내뱉은 말들이라 가능했다고 믿었다

 

꽃이 꽃을 꺾는다거나

비가 비를 마시게 된다는 식의 일들

우정의 모든 사랑이라든가

그로 인해 어제는 가볍지 않았다는 기록조차도

 

감당할 수 없는 이대로를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가정만으로

이제 감각도 없는 굳은살들을 떼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인생의 재료들 사이에서

무조건 속의 조건들을 골라낼 줄 알게 된다면

 

저편에 또 다른 나 하나가 생성된다는

잔인한 가정을 믿기로 한다면

정말이지 누군가에게 무언가라도 되어야겠는데

 

오늘 한 일이라곤

약속에 나가 감히 다른 자리에 앉아 있다 온 거였다

 

 

만나도 모르는 사람들, 몰라도 만나는 사람들. 세상이 좁아졌고, 사람 간의 거리도 좁아진 것 같은데, 왜 만나도 모른다고 하는지. 만나지 않아도 다 알 것만 같은 세상에서 논리적으로 이 말이 이해가 안가야하는데, 왜 내 마음은 너무나도 이해를 잘 하고 있는 걸까. 너무 정곡을 찔릴 만큼이라 사랑할 수 없는 시라 여길 정도로 말이다.

 

겉을 중요시하는 만남과 그만큼 얕아진 인간 관계 속에서, 나는 내 겉모습을 벗고 책과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었다. 평소에 일어나지 않던 특별한 경험이었다. '얘는 그냥 글자니까.'라는 마음으로 내 속을 내비칠 수 있었으니까. 복잡해져버린 지구에 앉아 난 시집을 잡고 계속 곱씹었다.

 

이 시가 나의 애송시일까? 난 이 시와 내 자신의 속의 재료까지 속속들이 골라내 사랑할 수 있을까? 사랑하게되는 날이 온다면, 이 시가 내 마음속 깊이 자리잡는 애송시가 될 수도 있을 듯 하다.

 

 

[이지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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