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인간성에 대한 본원적 물음을 던지다, 연극 ‘태양’ [공연]

글 입력 2023.02.20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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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정동극장] 연극 태양_포스터(2.3-26).jpg

 

 

Prologue.


 

초능력이 있다면 어떤 능력을 가장 갖고 싶어?라며 가벼운 대화 주제를 던져오는 지인에게 나는 당연히 텔레포트,라고 답했다.

 

시간과 비용의 제약이 없이 어디든지 오고 갈 수 있는 능력이야 말로 최고라고 늘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고달픈 출퇴근도, 여유가 없어 가까운 이를 보지 못하는 그리움도 없는 세상은 얼마나 편리하고 좋을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고 말이다.

 

과학적으로는 물론 말이 되지 않는 허상에 불과한 이야기겠지만, 만약 그런 세상이 온다면 정말 많은 부분이 달라질 테다. 감성적인 부분에서든, 물리적인 부분에서든 지금의 상식과 논리로는 상상할 수 없는 세계가 펼쳐질 것이라며 말을 이어가다, 여전히 텔레포트 능력이 없는 우리는 서로의 목적지를 향해 떠났다.

 

 

 

하나의 태양 아래, 둘로 갈라진 인류


 

<태양>은 21세기 초 바이러스로 인해 전 세계 인구가 급감하고, 감염자 중 바이러스 항체가 생긴 사람들이 우월한 신체를 가진 신인류로 부상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가 중심이 된다. 태양이 공평히 떠 있는 하늘 아래, 신인류 '녹스'와 구인류 '큐리오'의 정신과 육체를 이분법적으로 나눈 세계. 작품은 판타지 장르의 SF 소재 극으로 손에 잡히질 않을 듯 먼 이야기를 다루는 것 같지만 타인과 공명해야 하는 유한하고 불완전한 인간의 삶을 통해 곧 우리의 현실 이야기임을 보여준다.

 

두산연강예술상 공연부문 수상자이자 경기도극단 상임 연출가인 김정은 "이번 무대에서는 두 인류의 양극화에 더욱 집중하려 한다. 또렷하게 구분된 두 집단의 경계선상에 있는 관객분들과 의문과 질문이 오가며 쉴새 없이 소통할 수 있었으면 한다."며 재연의 소감을 전했다. 신화와 실화, 현실과 꿈의 공간을 오가며 예측 불가능한 긴장감을 자아내는데 일가견이 있는 그의 시선이 이번 무대에서 어떻게 발현될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21세기 초, 바이러스로 인해 세계 인구가 급감하고, 모든 사회기반이 파괴된 때. 기적적으로 바이러스 항체가 생긴 사람들이 나타난다.그들은 자외선에 치명적으로 약해 밤에만 활동 가능하지만, 젊고 건강한 신체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는 초월적 변이를 기반으로 정치 경제를 이끌어가는 존재가 된다.

 

그렇게 젊은 사람들은 계속해서 밤의 세계로 몰려들고, 밤의 인간 녹스들은 신인류로 부상한다. 어느 날, 구인류가 모여 사는 작은 마을에서 신인류 녹스가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으로 마을은 고립되고, 사람들은 하나 둘 떠나 이제 남은 주민이라고는 스무 명 남짓. 10년이나 이어진 따돌림 같은 봉쇄가 풀린 지금, 다시 녹스와의 왕래가 시작되는데...

 


 

두려움과 환상으로 마주하는 이종


 

이 이야기는 바이러스로 인해 나뉜 두 인류 간의 갈등으로 시작한다. 이제는 우리 사회와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는 이 소재가 연극으로 어떻게 구현될지 상상하기 어려웠던 나로서는 막이 오르자 단숨에 몰입해 나가노 8구의 주민이 되어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압도적인 연기력과 무대 연출, 탄탄한 스토리에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이 시작과 동시에 내면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알 수 없는 원인으로 발생한 바이러스를 극복한 인류 녹스와 그렇지 못한 본래의 인류 큐리오는, 처음부터 완전히 단절된 사회에서 살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어느 밤, 나가노 8구에서 큐리오가 녹스를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며 일종의 단죄로 녹스가 큐리오에게 10년간 경제적 지원 중단을 선언한 것이 깊은 감정의 골을 만든 것이었다. 그동안 20명 남짓의 인구만 남게 된 나가노 8구는 폐허에 가까운 수준으로 낙후되고 시간이 지나 마침내 녹스의 지원을 다시 받으며 안도와 함께 증오, 열등감이 한데 뭉친 묘한 감정으로 서로를 오랜만에 마주한다.

 

녹스라는 존재의 출발은 큐리오가 백신을 맞아 항체를 갖게 된 것이었다. 이들의 치명적 약점은 바로 태양을 볼 수 없다는 것으로, 다분히 이성적인 말투와 시선, 차림새 탓에 극도로 발전한 인간 AI와도 같은 모습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젊음과 영생을 얻었지만 바로 이 점에서 역설적이게도 큐리오를 그리워하고 부러워한다. 큐리오는 반대의 이유로 그들이 가진 인간적 지혜와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섬세한 감정들을 내버리고서라도 녹스가 되길 원한다.

 

갖지 못한 것에 대한 환상, 그리고 잃게 될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자신과 너무 닮은 과거의, 혹은 미래의 또 다른 나를 바라보는 듯한 감정은 계속해서 서로에 대한 자연스러운 끌림으로 발현된다. 다름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깊은 내면에서는 함께하고 싶다는 양가 감정이 있었기에 어느 한쪽이 흡수되거나 파괴되지 않고 공존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


 

극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가장 인간다운 것에 대한 물음을 던졌다. 당신이 생각하기에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삶이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다른 이를 향한 일련의 사랑, 미움, 그리움과 같은 감정이 복잡하게 얽히고 설킬수록 더욱 완전한 인간으로 향해가는 것일까, 부차적인 감정은 제쳐두고 이성적 논리와 이해관계에 의한 의사결정이 거듭될 수록 성장하고 발전하는 인간이 되는 것일까. 상황에 따라 감성과 이성의 중요도가 달라질 뿐, 두 가지가 조화로운 공존을 이룰 때 이상적인 인간이 된다는 것은 사실 이 바보 같은 물음에 대한 당연한 결론일 것이다. 그러나 녹스와 큐리오로 갈라진 세상에서 이것은 굳이,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질문이었다. 어떤 답이 나오냐에 따라 각자의 존재 이유를 정립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가노 8구의 경비병을 맡고 있는 어린 큐리오 후지타, 고립된 마을에서 자라 학교에 다니지 못했지만 일찍이 차밭을 가꾸며 자라온 데츠히코는 두 인간 종의 희박한 교집합을 보여준다. 태어날 적부터 녹스였던 후지타는 감성과 지혜를 지닌 데츠히코를 보며 친구가 되길 꿈꾸고, 문명 사회를 경험하지 못한 데츠히코는 부족함 없는 사회에서 완벽히 자란 듯한 후지타를 동경한다. 큐리오에서 녹스가 되었지만 우연히 늙어버린 옛 친구 소이치를 보고 다시 큐리오가 되길 원하는 가네다 요지는 또 어떤가. 더 유복하고 발전했기에 완벽한 인간으로 규정된 녹스들의 사회가 차마 생각지 못한 오류, 경우의 수가 발생하고 있었고 이는 무시할 수 없는 분명한 균열, 곧 혼란이었다. 저마다 결핍된 부분을 채우기 위해 전이되길 원하는 이들이 계속 나타나고 있었다. 큐리오가 녹스가 되는 것은 물론이고, 바랄 것 없어 보이는 녹스 또한 큐리오가 되고 싶어했다.

 

 

 

이분법이 지속가능하지 않은 이유


 

좋고 나쁨은 반드시 옳고 그름으로 치환되지 않는다. 양쪽 모두의 장단점을 잘 이해하고 수용하는 자세가 중요할 뿐이다. 이 영역이 부족한 사회는 그래서 건강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완전에 가까운 이성을 지녔지만 타인에 대한 공감이 부재하는 인류 녹스는 저출생으로 사회가 존속되기 어렵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지니고 있었다.

 

화합, 협력보다는 개인의 만족, 논리적 납득이 우선되는 성향 탓에 인구는 쉽게 늘지 않았고 큐리오에게서 부족한 노동력을 취하거나 녹스로 변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며 구성원을 충당해야 했다.

 

큐리오 쪽도 상황이 좋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인구가 녹스로 빠져나가고 있었고, 큐리오들이 꾸린 신도시 시코쿠 역시 감정적인 성향이 우선한 사람들이 남아 녹스만큼의 경제발전을 이루지는 못하고 있었다. 결핍된 부분이 채워지지 않는 한, 너무 다른 두 사회의 양립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인간의 근원, 태양을 향하여


 

가네다 요지는 결국 태양을 볼 수 없다는 녹스의 치명적 단점을 극복하지 못하고 옛 친구 소이치의 옆에서 떠오르는 해를 보며 죽음을 맞이한다.그의 죽음은 이 사회의 미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감성적 영역에 속하는 인간다움의 역할은 인간의 존재 이유에서 생각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므로 점차 많은 인구가 가네다와 같이 자발적 죽음을 택할 수 있음을 암묵적으로 뜻하는 듯했다. 모든 것의 시작인 태양을 등지고 선 달의 인간은 단기간 신인류로 주목받아 발전을 이뤘더라도 결국 자립보다는 자멸을 택하게 될 것이라는 디스토피아적 결말이었다.

 

정말로 존재할 것만 같은 그 세상에 태어났다면 과연 나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그의 죽음을 보며 작은 의문이 들었다. 살아가는 내내 어떤 쪽이든 다른 세계에 대한 동경 혹은 질투로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찾아가기가 쉽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 다다르자, 아직 신인류가 나타나지 않은 현 사회에 감사해야 하나 싶기도 했다. 애초에 선택지가 없으니 나와 내 주변에 더 쉽게 집중해 좋은 삶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같은 태양을 바라보며 일어나 같은 달을 보고 잠드는 삶. 비슷한 뜨거움과 차가움으로 서로를 더 잘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지금의 적당히 따뜻한 삶이 주는 감사함, 그리고 다행스러움.

 

물론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인간의 진화는 작게나마 이미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천부적인 능력을 지닌 두뇌, 강인한 신체 능력, 그런 것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면 아마 일부는 선택받은 이들이라 스스로를 자명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이타적인 마음이다. 인간이 사회적인 동물이라는 절대적인 전제 하에,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갖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녹스와 큐리오의 구분은 결국, 사라질 수밖에 없는 정해진 결말에 달할 것이다. 바이러스를 이겨내는 제3의 인간의 등장으로.



[차소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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