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끝나지 않는 노래 [공연]

연극 <일리아드>, 지금 여기 우리
글 입력 2023.02.12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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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은 특정 배우의 회차를 관람한 뒤에 작성되었습니다. 

 

 

[크기변환]일리아드 포스터.jpg

  

  

신이 죽어버린 시대에 신화의 서사시를 노래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일리아드>는 잘 알려진 고대 그리스의 극작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기반으로 한 연극이다. 2021년에 이 오래된 서사시는 왜 무대 위에 올라와야 했으며, 왜 나는 2023년에 이 연극에 대해 말하고 있을까. 그것은 이 극이 다시 이야기되어야 하는 극이기 때문이다. 이 극은 트로이 전쟁 속 아킬레스와 헥토르 두 영웅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비단 트로이 전쟁 이야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연극은 인류 역사상의 모든 전쟁과 폭력, 그에 얽힌 삶들을 호명하며 분노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그 자체로 애도의 노래이다.

 

 

 

"난 노래했어. 매일 또 매일. 밤이고 낮이고. 모든 전쟁에서, 모든 여담에서."



[크기변환]일리아드 공연사진.jpg

  

 

연극에는 한 인물과 한 명의 신이 등장한다. 바로 내레이터와 뮤즈이다. 뮤즈는 내레이터를 도와 영감을 불어넣듯 악기 연주를 통해 이야기의 진행을 돕고, 내레이터는 일인다역을 수행하며 극을 이어간다. 연출 지시상 내레이터는 답을 찾기 전까지 이 무대에서 나갈 수 없다. 그는 무엇에 대한 답을 찾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분노를 멈추는 방법이다. 전쟁을 멈추는 방법이지만 전쟁의 시작에는 늘 그렇듯 분노가 있으니 분노에 관해 이야기하겠다. 극 중에는 이런 장면이 등장한다. 아킬레스와 프리아모스 왕이 있다. 전쟁 중, 프리아모스 왕은 아킬레스의 막사로 찾아간다. 그는 자신의 아들 헥토르를 죽인 원수, 아킬레스의 앞에 무릎을 꿇고 간청한다. “제발 내 아들의 시체를 돌려주시오.” 아킬레스는 소중한 친구이자 가족인 파트로클로스를 헥토르에게 잃었다. 아킬레스는 고민 끝에 분노를 놓아버리고 헥토르의 시신을 프리아모스 왕에게 보낸다. 그리고 헥토르의 장례를 치를 열하루를 마련해 전쟁을 잠시 중단한다. 내레이터는 이 장면을 연기하다가, 돌연 관객에게 묻는다. “어떻게 한 거지?” 도대체 아킬레스는 어떻게 이 9년간의 지독하고 지난한 전쟁을 촉발한 분노를 내려놓을 수 있던 것일까?

 

 

 

"느껴져?"



김종구 내레이터는 관객에게 묻는다. “느껴져?” 이 연극은 분노를 멈추는 방법으로 ‘내레이터-되기’를 제안한다. ‘내레이터-되기’란 체화다. 내레이터라는 존재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몸을 갖고 있다. 그의 몸은 긴 시간 속 분노에 얽힌 피해자와 가해자, 남은 자와 떠난 자, 이름난 자와 이름나지 않은 자의 삶을 입고 벗는다. 마치 무속 신앙에서 무당이 신내림을 받듯이 그는 <일리아스> 속 인물들을 연기하면서 동시에 서사 밖 현실의 분노와 얽힌 삶들을 보여준다. 그는 연기하는 도중에 인물의 분노와 감정에 휩쓸리기도 하며, PTSD 증상을 보이기도 한다. 그가 연기하는 인물 중에는 현대전의 피해자도 있으며, 전쟁에 나간 이를 기다리는 자도 있다. 수많은 그들을 입고 벗은 내레이터는 전쟁의 참상과 모든 전쟁의 이름을 늘어놓는다.

 

연극 <일리아드>는 기존의 전쟁을 재현하는 텍스트와 다르다. 기존의 텍스트들은 대개 전쟁을 비롯한 불행을 그들의 이야기로 타자화하여 재현한다. 전쟁을 관객과 동떨어진 이야기로 만든다. 그러나 “느껴져”라는 질문은 관객을 감각의 주체로 끌어와 분노로 인한 불행을 ‘우리’의 이야기로 체화하게끔한다. 하여 관객의 신체는 극 속으로 들어온다. 관객의 신체는 내레이터를 따라 분노와 얽힌 수많은 삶을 경유한다. 김종구 내레이터의 경우 마지막 장면에서 오백원 동전을 던지는데, 이는 휴전 상태에 놓인 한국 관객의 현실을 상기시킴으로써 우리가 언제든 불행의 중심에 올 수 있음을 전달한다. 연극은 관객의 처지를 상기시킬 뿐 아니라, 이를 확장하여 우리가 경유한 삶들을 마음속에 품을 수 있도록 이끈다. 아킬레스가 프리아모스 왕의 모습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보듯, 돌아가지 못하는 헥토르의 시체에서 자신을 보듯이, 관객은 자신의 위치를 상기하게 되고, 분노의 맥락에서 분노를 내려놓을 수 있는 선례를 만난다.

 

 

 

왜 하필 『일리아스』인가?



왜 현대에 고대의 서사시 『일리아스』를 기반으로 한 극이 창작되었을까. 『일리아스』라는 작품을 기반으로 하여 메시지를 전달하는 이런 방법은, 전쟁의 재현에 있어 의도적인 편집을 경계할 수 있다. 인간의 기억은 계속해서 변화한다. 기억은 각자에게 익숙한 혹은 사회적으로 익숙한 전형적인 서사 틀 안에서 선별되거나 그에 갇히기 쉽다. 또한 어떤 역사는 거대 담론하에서 피해자들의 증언이 소외되거나 편집된 결과물일 수 있다. 연극 <일리아드>는 묵살되거나 편집된 개개인의 발화를 기존의 텍스트에 더해 입혀 재현한다. 또한 <일리아드>는 그 자체로 모든 전쟁의 은유가 되어 피해자들이 고통스러운 경험을 발화하는 데 있어 직접적 언급을 피할 수 있다. 또한 피해자들이 대상화되거나 직접적으로 재현되지 않을 수 있다. 더하여 머나먼 고대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이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성을 가진 존재로서 인간을 분리하였던 인간중심주의적인 생각에 대한 비판이 될 수 있다.

 

 

 

“매번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난 이번이 마지막이었으면 해.”



여기, 2023년에도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2021년, 연극 <일리아드>가 공연되던 그 시점에도 전쟁은 벌어지고 있었다. 전쟁으로 짓밟힌 도시의 이름이 나열되던 연극의 끝무렵에는 ‘카불’이라는 이름이 추가됐다. 아마 이 연극이 다시 올라온다면, 인류의 모든 전쟁을 읊는 그 대사는 더 길어질 것이다. 이 대본이 수정되지 않을 수 있을까? 내레이터의 노래는 끝날 수 있을까? 분노로 인한 폭력이 멈추지 않는 이상 그의 노래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분노에 휩쓸리는 건 순식간이고 폭력이 쓸고 간 자리는 참혹하다. 우리가 이 연극을 봐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내레이터가 되어야한다. 내레이터처럼 분노에 휩쓸렸던 삶들을 품어야한다. 그리하여 분노에 휩쓸리는 순간 그 내레이터의 울부짖음을 떠올려야 한다. 얼마나 많은 목숨이 스러져갔는지. 우리의 신전이 얼마나 많은 시체 위에 세워졌는지. 전쟁의 이름을 읊는 그 대사가 짧아질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더 길어지는 것은 막아야한다. 언젠가 이 분노가 멈출 수 있으리라 믿으면서 우리는 느껴야한다. 내레이터가 괴로워하던 그 더위를 떠올려야 한다. 매순간마다. 그러기위해 이 연극은 다시 이야기되어야 한다.


 

[박하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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